자연과 함께 자라는 프랑스 아이들
처음 파리에 도착해서 1년 동안 아이와 함께 붙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거리 곳곳에 있는 공원 덕분이었다. 파리 곳곳에는 공원이 수없이 많다. 2022년 6월 기준으로 파리시는 530개의 공원 및 정원을 관리하고 있다. 또한 3000개 이상의 야외 공간을 파리시에서 관리 감독하고 있다. 공원마다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예술가 및 정치가의 이름을 딴 공원 이름이 많은 편이다.
공원에 가면 아이들을 늘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흔하디 흔한 키즈 카페가 이곳 파리에는 없다. 파리에서는 한국의 키즈 카페가 곧 동네 공원이다. 공원 한 켠에는 놀이터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미끄럼틀과 모래밭이 있다. 대단한 것 없이 낡고 소박해도 아이들은 동네 공원 놀이터를 사랑한다.
파리 16구에 살았을 당시 집 근처 하넬라그 공원(Jardin du Ranelagh)에 가서 아이와 함께 주로 시간을 보냈다. 이 공원은 규모가 꽤 크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시민들이 이 공원을 즐긴다. 라 뮤에트(La Muette) 지하철 역 근처에 위치했다. 뮤에트는 영어 뮤트(Mute)에 해당하는 음소거라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 단어다. 지하철역 이름처럼 하넬라그 공원 매우 평화롭고 아늑한 느낌을 풍긴다. 이 공원은 1860년 영국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던 하넬라그 경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공원 주변에는 유명한 건물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뉴스에서 자주 들어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본사가 있고,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인 끌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립 마르모땅 모네 미술관 (Musée Marmottan Monet) 있다. 또한, 가봉, 아프가니스탄, 마다가스카르, 인도, 수단 등의 대사관이 공원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사람들은 점심때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가지고 공원에 나와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공원에서 마음껏 뛰어 논다. 평일과 주말,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하기도 한다. 천막으로 처져 있는 곳인데, 동네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나도 우진이와 함께 공원 야외 인형극을 보러 갔는데, 시설은 소박하지만 50명에 달하는 아이와 부모들이 함께 모여서 인형극을 보며 깔깔 대며 웃었다. 현대적이고 화려한 키즈 카페가 아닌 오래되고 낡은 나무로 된 기다란 의자와 천막으로 된 소박한 야외 인형극장에서 한 사람이 1인 3역을 하는 소박한 인형극에도 재밌다며 어른이고 아이고 모두 박장대소를 터트린다.
현재 뇌이쉬르센으로 이사한 뒤로는 집과 걸어서 5분 거리의 볼로뉴 숲에 자주 간다. 볼로뉴 숲은 파리의 허파라고도 불리는데 그만큼 숲이 울창하다. 볼로뉴 숲 안에는 호수가 여기저기 있는데, 호수에 사는 오리와 백조를 구경하는 아이들이 많다. 장난감 하나 없이 오로지 자연 속에서 생물이 친구가 되고 장난감이 된다. 유치원을 마치고 날이 좋을 때는 늘 볼로뉴 슾으로 아이와 함께 갔다. 호숫가의 각종 동식물을 관찰하며 노는 아이들이 이미 와 있다. 아이들은 각종 물새를 구경하고, 거기에 모인 아이들과 금세 친구가 된다. 같이 온 어른들도 함께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어느 날은 근처 볼로뉴 숲에 간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그날따라 볼로뉴 숲을 지나갔다. 무심코 앞만 보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엄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요 학교에서는 오늘 일정에 야외 프로그램이 없었는데 어찌 된 일일까? 함께 있는 선생님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실내에만 있을 수가 없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했다. 학교 건물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볼로뉴 숲이라서 걸어서 나왔다고 했다.
나는 풀밭에 털석 앉아서 온통 초록색으로 물든 초여름의 볼로뉴 숲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초록빛 세상에 초록빛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있었다. 나는 그때 당시에 내 눈에 들어온 풍경에 넋이 나간 채 하염없이 자연과 아이들을 바라봤다. 아마도 그때 그 장면은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약 20명가량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보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에서 나무에 기대 노는 아이들, 땅 위에 기어가는 개미를 유심히 관찰하는 아이들, 나무에 올라타는 아이들, 풀밭 사이사이에 있는 작은 곤충을 관찰하는 아이들. 20명 모두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된 모습이었다. 그 뒤로 호숫가가 펼쳐져 있고, 호수 위에는 백조 한 쌍이 유유히 가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을 보냈다.
자칫 어른들의 시각으로 볼 때면 1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것이냐, 이 시간에 글자 한 자 더 봐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개미를 관찰하는 것도, 호숫가 위로 떠다니는 백조를 관찰하는 것도, 나무를 만져보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살아있는 공부요 학습이다. 자연의 섭리를 책으로 보는 것보다 오감을 통해 직접 체험하는 것이 훨씬 더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도움이 된다.
뇌 과학을 기초로 프랑스 자율 교육 전통을 결합한 교수법을 소개하며, 프랑스 육아 교육의 혁신을 이끌고 있는 교육자이자 저술가인 셀린 알바레즈는 자신의 책 <아이는 뇌는 스스로 배운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야외에서의 자유 활동은 창의성 발달에도 없어서는 안 될 시간이다. 친구들과 삼총사 놀이나 해적 놀이를 하면서 밖에서 자유롭게 노는 시간이 많은 아이들일수록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데, 그 이유는 이 아이들이 곧잘 틀에 박히지 않은 기발한 방식으로 해결책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계발된 상상력은 창의성과 유연성을 필요로 하는 과제를 수행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막대기, 조약돌, 흙, 잡초, 나뭇잎, 꽃, 나무껍질, 솔방울, 그리고 시간을 내맡겨라. 그들이 놀고, 만들어 내고, 지어 올리고, 굉장한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줄 수 있도록.'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날은 친구네 집 정원에 종종 갈 때가 있다. 이곳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은 주로 이곳이 만남의 장소다. 매일 대략 10명가량의 아이들이 조금씩 바뀌면서 모여드는데 1시간 동안 공놀이를 하거나, 나무에 매달려 놀거나, 풀밭에 있는 각종 곤충을 찾는다. 유치원 및 초등학교를 끝내고 집에 가서 숙제를 하기보다는 아파트 정원에 모여서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낸다. 대단하거나 거창한 놀이 기구도 없다. 그저 나무와 풀밭이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서로가 함께 하는 것만으로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논다.
2021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약 5주 정도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시댁에 머물면서 근처 놀이터에 간 적 있다. 미끄럼틀이 매우 잘 되어 있고 주변 조경도 너무 멋지게 잘 되어 있었다. 우진이와 나는 이런 미끄럼틀은 처음 본다며 재밌어했고, 우리는 자주 그곳을 찾았다. 오후 4시 정도에 만 7세에서 9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들 5명 정도가 모였다. 아이들은 딱지치기를 했다. 만 5세 우진이는 한국 형아들이 치는 딱지를 보며 자신도 해보고 싶다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친절한 한국 형아들은 우진이에게 딱지 하나를 손에 쥐어 주며 어떻게 치는지 가르쳐줬다.
우진이는 금세 형들과 뒤섞여 놀기 시작했다. 한창 재밌어지려는데 오후 5시가 되니 형들은 다들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디에 가냐고 물으니 수영 학원, 태권도 학원, 영어 학원 등 아파트 상가 곳곳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학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내일 또 이 시간에 볼 수 있냐고 물으니 오겠다고 했다. 며칠은 봤는데, 며칠은 또 오지 않았다. 프랑스라면 이렇게 잘 꾸며놓은 놀이터에 최소한 20명 정도는 몰려들었을 것 같은데, 한국은 놀이터 시설이 잘 되어 있어도 다들 학원 가기 바빠서 놀이터가 휑했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고, 놀이터에 가니 여전히 아이들이 많이 나와서 놀고 있었다.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계속해서 놀이터 모레를 만지며 놀고 미끄럼틀을 타며 놀고 있었다. 우진이는 한국에서 산 딱지를 가지고 프랑스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친구들을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만져봤다. 우리는 다시 볼로뉴 숲에 들어가서 마음껏 자연과 함께 뛰어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