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서 날아간 기획서

완벽한 기획은 없다.

by 루니

신입 시절의 저는 자신만만하게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갈 만큼 '자신감'이 충만했습니다.

3주간 밤을 새워 만든 기획서 안의 로직은 완벽하다고 생각하였고, 발표할 내용이 머릿속에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데이터도 탄탄했고, 플로우도 완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070619174723_5445.jpg Atrix 어드벤처 모드


"어드벤처 모드 완주 시 보너스 보상 선택 시스템입니다."


자신감에 차서 발표를 시작했지만,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팀장님의 한마디가 날아왔습니다.

"이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재미를 줄 수 있나요?"


그때의 저는 플레이어의 '재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경쟁'을 하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결과는 예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높은 점수를 가진 플레이어에게 우선 선택권을 주면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처참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보상을 나누기 싫어서 아예 혼자 플레이하기 시작한 것이죠.

경쟁을 유도하려던 시스템이 오히려 '솔로 플레이어 양산 시스템'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데이터와 로직만으로는 플레이어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요.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이러한 경험은 주니어 시절에는 일상다반사였습니다.

제가 자신 있다고 생각한 기획이 실제로 다르게 작동되는 것을 본 이후, 저는 다른 게임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거나, '윗분들이 원하는' 기획이 무엇인지 파악한 후 그분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기획을 쓰기 위해 애썼습니다.

결과적으로 제 기획서에는 '논리'만 있고 '공감'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기획서는 회의실에서 '날아다니는' 기획서가 되었습니다.

제 생각이 온전히 담기지 않아 '아쉬움'이 남은 기획서가 거절당하는 광경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변명이 튀어나왔습니다.

"원래는 그 부분도 적용했는데..."

그럴 때마다 팀장님의 꾸중이 날아왔습니다.

"네 기획에 애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거야."

맞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제 기획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남'이 아닌 '내'가 확신하는 기획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생각이 담기고, '플레이어'가 어떤 목적으로 시스템을 작동할지 고민하며 설계한 기획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저의 시야와 눈높이는 높아졌습니다.


때로는 반발하기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넘어가는 시기.

회사에서 현재 라이브 중인 스토리 기반 게임을 경쟁형 게임으로 리마스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액션과 스토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게임을 단순히 DPS 경쟁 게임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었죠.

저는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현재도 DPS 기준으로 아이템 등급을 나누고 있어 던전 입장 시, 보스 패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처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드 전투로 아이템을 획득하게 하면, 현재 봇 대응으로 막아둔 보상 시스템과 충돌합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나대니까 좋냐?"


그동안 플레이어의 '마음'을 외면한 게임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지 경험한 저도, 저 한마디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확신은 있었지만, 회사의 시스템을 거부하기에는 너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부에서는 '돈'을 벌 것이라 생각했던 그 '완벽한' 리마스터 기획서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SUFMSDF.jpg

플레이어들의 외면을 받으며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때로는 논리를 넘어선 확신으로 반발해야 할 때가 필요하다는 것을요.


기획서는 기능 명세서가 아닙니다.

많은 주니어 기획자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획서를 기능 명세서로 생각하는 것. 데이터를 나열하고 플로우를 그리면 기획이 끝났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발자가 구현할 데이터와 플로우는 개발자가 제일 잘 압니다.

그렇다면 기획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게임의 '정체성'을 잡는 사람입니다.

그 정체성에 맞는 구조를 설계하고, 플레이어가 그 세계를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재미와 성장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그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기획은 없습니다. 사람의 재미 요소는 다양하니까요.

데이터는 완벽했지만, 플레이어의 마음은 없을 수 있습니다.

로직은 탄탄했지만, 게임의 정체성은 없을 수 있습니다.

기능은 명확했지만, 재미의 본질은 없을 수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기획서 중 게임 내 유의미한 결과를 내는 기획들의 공통점은 로직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 있느냐 여부 입니다.


플레이어라는 사람, 팀원이라는 사람, 그리고 그 기획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저라는 사람 말입니다.


keyword
이전 12화야근과 협업 속에서 배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