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시스템이 사라져 갔다
제 하드 디스크에는 특별한 폴더가 하나 있습니다.
그 폴더의 이름은 '묻힌 기획들'.
신입 시절 기획했던 '적의 신체를 조합해 강해진다는 개념을 넣은 게임 기획'부터 '3명의 캐릭터와 맵을 탐험 하면서 합격 기를 이용해 전투하는 수집형 RPG 제안서'까지, 언젠가의 꿈으로 모아놓은 기획서들을 보니 당시의 설렘이 되살아납니다.
그 파일 하나하나에는 오래전 게임을 통해 구현하고 싶었던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기획자의 책상 위에는 늘 두 종류의 기획서가 있습니다. 세상에 빛을 본 기획서와, 빛을 보지 못한 기획서입니다. 슬프게도 대부분은 후자입니다. 그리고 그 기획서가 사라진 이유는 늘 비슷했습니다.
개발 리소스 부족
우선순위 조정
개발 방향 변경
혹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묻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내가 만들고 싶은 기획'이 희미해져 갔습니다.
어린 시절, 저의 '최애' 게임은 TGL에서 만든 육성 시뮬레이션 '마법사가 되는 방법'이었습니다. 파랜드 시리즈로 유명한 제작사답게 판타지의 분위기와 요소를 잘 살린 수작이었죠. 이 게임은 '세상의 가장 끝에 있는 섬'을 무대로, 주인공이 '마법사의 집'을 중심으로 마법을 배워가는 이야기인데, 이 게임에는 독특한 시스템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RPG들이 많이 채용하는 '재료 조합 시스템'으로, 마법 하나를 익히기 위해 게임 곳곳을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다양한 재료를 모아 가공하고 조합하는 과정이 필요한 시스템입니다.
현재 마법 책을 구매하여 익히거나, 배우는 등 간소화된 방법과 참 다르지만, 그렇기에 '재료'를 찾아 탐험하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마법을 익히는 과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채집한 재료를 '태우거나', '건조'하는 과정을 통해 가공하고, 4가지 방법과 순서를 정확히 조합해야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게임 내에서는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기에, 저만의 도감이나 규칙을 찾아가며 마법을 만들다 보면 '내가 조합한 재료들이 어떤 마법으로 탄생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커져갔습니다. 특히, 이 게임은 고유의 시간개념인 '절기'를 사용했는데, 절기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재료가 달라졌습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계절에 어떤 재료를 찾을 것인가'를 전략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소였습니다.
이처럼 정해진 결과보다는, 규칙과 '운'이 절묘하게 결합된 시스템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플레이어가 한 행동이 게임 세상에 영향을 주고, 정해진 레시피가 아닌 '진 여신전생'의 합성표처럼 조합 규칙이 있으며, 환경과 성향 등 모든 요소가 이에 반응하여 다양한 결괏값을 만들어내는 게임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 시스템에 "운명 조합 시스템"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게임 플레이를 통해 아이템을 획득하고, 그 아이템을 조합하여 장비를 성장시키거나 각성시키고, 그에 따라 장비의 능력치와 스킬이 랜덤 하게 성장되는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랜덤 요소가 아닌, 플레이어의 선택과 전략이 확률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마치 램넌트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행동과 결정이 트리거가 되어 보상과 스토리에 영향을 주고, 세계에 변화를 주는 그런 규칙의 다양성을 아이템을 통해 제공하는 시스템처럼요.
그 아이템의 능력치를 랜덤으로 만드는 구조를 만들면서도, 플레이어가 '운'을 제어할 수 있다는 느낌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고민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플레이어의 선/악의 개념이 아이템에 영향을 준다.
채집한 시간과 계절이 재료의 속성 능력치와 획득 확률을 높인다.
여러 아이템 간의 상성에 따라 예상치 못한 시너지가 발현될 수 있다.
즉 단순한 메커니즘이 아닌, '운'을 제어할 수 있다는 느낌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데이터 최적화에 길들여진 플레이어들에게 탐험의 재미와 다양성을 찾아가는 즐거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이 시스템을 구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효율을 강조하는 모바일 게임 환경에서는 다양한 선택 요소를 고려한 공수가 큰 시스템이 구현되기 어렵습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랜덤 요소 = 과금이라는 인식: 플레이어는 랜덤 시스템을 재미의 요소로 보기보다, 과금을 유도하는 장치로 인식할 위험이 있습니다.
특정 아이템을 획득하기 위한 강제적 '막일': 특정 재료를 얻기 위해 반복적인 플레이를 강요받는다면, '재미'는 '숙제'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예측 불가능에 대한 불만: 모든 것이 계산된 효율을 추구하는 플레이어들에게 예측 불가능성은 오히려 불만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저는 핵심 철학을 지키되 더 심플하고 단순한 요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플레이어가 재료를 모으고 조합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본질만 있다면 게임의 랜덤성이 지루함을 상쇄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반복에 대한 보상은 있어야 가능하겠죠.
어느 순간, 꿈은 잃어버리고 누군가가 설계한 프로젝트의 일부분을 구현해 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가끔 예전에 즐겨했던 '마법사가 되는 방법'이 그리운 이유는 제가 오래전 꿈꾸던 시스템이 그립기 때문일 것입니다.
'숫자'로 보여주는 플레이어의 '무엇을'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왜'했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실행'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게임 내 '왜'를 플레이어 스스로 만들어가는 그런 게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물론 완벽한 기획은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보다 기존의 성공 기획 공식을 답습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놓치고 있는 요소가 안타깝습니다.
데이터는 완벽했지만, 플레이어의 마음은 없었습니다.
로직은 탄탄했지만, 게임의 정체성은 없었습니다.
기능은 명확했지만, 재미의 본질은 없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기획서 중 게임 내 유의미한 결과를 내는 것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플레이어라는 사람, 팀원이라는 사람, 그리고 그 기획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저라는 사람 말입니다. 숫자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기획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 숫자 너머의 세계관을 설계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철학이고, 스킬 트리나 레벨업 경험치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마음속에 쌓이는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그 철학이 플레이어의 마음에 닿는 순간, 묻혔던 기획들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