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안지가 아니라 질문지
게임 기획서는 답안지가 아니라 질문지여야 한다
"캐릭터는 1초에 1대를 때리며, 몬스터는 캐릭터 공격 3~5대 정도의 공격을 받고 사망합니다. 즉, 3초에 몬스터 1마리가 처치되는 공식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당시 내 기획서는 이런 식이었죠.
마치 수학 문제의 정답을 써내려가듯, 기능적인 요소와 계산 공식, 플로우차트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설계된 방향에서 조금만 벗어난 질문이 들어오면 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시스템으로 플레이어가 정말 재미있을까요?"라는 질문 앞에서는 늘 막막했죠.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나는 '어떻게'만 써놓고, '왜'는 빠뜨렸던 것입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후, 나는 기획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왜?"였습니다. 육하원칙을 모두 포함하되,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기획서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 Before: 기능 중심의 사고 "이 게임은 서바이벌 게임이니까 인벤토리 UI는 작은 창으로 해야지."
• After: 질문 중심의 사고 "이 게임은 서바이벌 게임이니 게임 상황에 따른 위험을 수시로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장르에 맞는 UI/UX 구조는 작은 창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연쇄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게임 내 아이템 설명과 기능이 많다면 풀(full) 창이어도 되지 않을까?"
"만약 풀 창이라면 빠르게 원하는 장비를 찾고 판단할 편의 기능을 함께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작은 창이라면, 아이템 정보는 왼쪽보다 오른쪽에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선의 흐름을 고려했을 때 말이다."
이렇게 질문 중심으로 접근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 기존 방식: "아이템 종류가 많으니까 풀 창으로 해서 다 보여주자."
• 질문 후 개선된 방식: "서바이벌 장르 특성상 언제든 위험 상황에 노출될 수 있다면, 게임 플레이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아이템을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 작은 창을 화면 오른쪽에 배치하고 토글 방식으로 on/off
→ 만약 정보량이 많아 풀 창이 필요하다면, 게임 흐름을 멈추지 않도록 투명도 조절
→ 빠른 아이템 선택을 위한 추천 시스템 필요
→ 추천 기준: 보유 아이템 기반 vs 공격력 기반, 상황별 대응 가능한 구조
가장 큰 변화는 디자이너와의 협업이었습니다. 작업 시간이 30% 감소했고, 피드백 횟수도 10회 이하로 단축되었습니다.
왜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기능과 배치에 대한 '이유'가 명확해지자, 디자이너들은 더 이상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더 멋지고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한 질문의 기술은
1. 닫힌 질문을 열린 질문으로 바꿔라
❌ Before: "이 기능을 넣어야 할까요, 말까요?"
✅ After: "이 기능이 들어가면 플레이어 경험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2.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정을 의심하라
"만약 우리의 전제가 틀렸다면?"
"모든 유저가 성장을 원한다고 가정하는데, 정말 그럴까?"
"경쟁이 재미를 만든다고 믿는데, 혹시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3. 극단적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라
"만약 유저가 하루에 5분밖에 못 한다면, 이 시스템은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만약 모든 유저가 똑같은 전략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4. 데이터 뒤에 숨은 감정을 읽어라
"이탈률이 높다는 것, 정말 게임이 어려워서일까? 아니면 지루해서일까?"
"숫자 뒤에 숨은 플레이어의 마음은 무엇일까?"
최근 경험한 애자일 회사에서의 일입니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동기부여가 충만한 팀원들이 일주일 만에 게임의 기초 구조를 만들어내는 모습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쌓기'는 잘하는데, 쌓은 것들을 하나의 구조로 '연결'하는 설계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여러 번의 프로젝트 중단을 겪으며 깨달았습니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만 몰두하고 전체적인 성장 구조를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해결책은 프로젝트 드랍이 아니라, 접근성 개선이었습니다.
어느 날 후배 기획자가 자신의 기획서를 봐달라고 했습니다. 그럴듯한 콘셉트가 가득한 문서였지만, 시스템과 콘텐츠의 구분이 없어 구조적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왜 시스템을 우선 설계하지 않고 콘텐츠를 먼저 만들어서 시스템에 매칭시키려 하셨어요?"
후배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어쩐지 콘텐츠를 우선 기획하고 시스템을 맞추니까, 시스템들이 연계되지 않고 낱개처럼 설계되더라고요."
이 순간 깨달았습니다.
전체적인 구조와 방향성을 고민하지 않은 기획서는 확장 불가능한 '콘셉트 문서'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라이브 게임 운영 시절, 자주 진행했던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로그인 보상을 2배로 늘리면 접속률이 올라갈 거예요. 다른 게임들도 다 그렇게 해요."
이런 논리로 계속 진행하다 보니, 기본 경험치 획득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벤트 보상으로 부족한 경험치를 보충하는 구조가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기본 경험치를 대폭 올렸더니, 처음엔 플레이어들이 좋아했지만 곧 문제가 터졌습니다. 더 이상 '2배 이벤트'를 진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때 던졌어야 할 질문:
"보상을 2배로 늘리면 단기적으로는 접속률이 오를 것이다. 그런데 장기적으로는 어떨까?"
"유저들이 보상에만 의존하게 되면, 보상이 없을 때는 더 빠르게 이탈하지 않을까?"
"이 보상이 정말 '재미' 때문에 로그인하게 만들까? 아니면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게 만드는 걸까?"
결국 이벤트는 재미가 아닌 숙제가 되었고, 플레이어들에게는 의무적인 수집 작업으로 남았습니다.
좋은 질문이 가득한 기획서는 다음과 같은 힘을 갖습니다.
� 검토자가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단순히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게 됩니다.
� 잠재적 리스크를 미리 드러낸다: 예상 가능한 문제점들을 사전에 식별하고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 대안에 대한 토론을 유도한다: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최적해를 찾습니다.
� 팀 전체가 시스템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각자의 역할을 넘어 게임 전체를 조망하는 시각을 갖게 됩니다.
기획자의 성장은 질문의 질과 깊이에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질문을 잘 던질수록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리고, 팀과의 소통이 깊어지며, 예상치 못한 해결책을 발견하고, 플레이어의 진짜 마음에 가까워집니다.
기획서를 쓰기 전,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내가 쓰는 이 문장은 답인가? 아니면 새로운 질문의 시작인가?"
만약 후자라면, 당신은 이미 좋은 기획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획서가 아니라 질문을 남기는 것. 그게 진짜 기획자의 일입니다.
오늘도 나는 정답이 아닌 질문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 질문 속에서 더 나은 게임이, 더 나은 경험이 태어날 것을 믿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