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이 필요한 순간

숫자와 감정 사이

by 루니
"70% 플레이어가 PVP 모드를 플레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라는 말과 스크린에 뜬 그래프를 가리키며 디렉터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PvP 모드를 이스포츠로 발전시키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당긴 제안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시작부터 '경쟁'이 없었고, '경쟁'에 참여할 명분이 없는 게임에서 시작된 '전장 콘텐츠'에 대한 고려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내부에서는 회사 내 잘된 L 프로젝트와 데이터 지표를 비교하며 방향을 설정했고, 그에 맞게 PVP를 위한 대규모 시스템 개편이 단행되었습니다.


그렇게 구현된 PVP 전장 모드에 대한 내부 테스트 결과는 완벽했습니다.

플레이어의 71%가 '매우 어려움'에서 최고 성장률 달성

해당 난이도에서 플레이 시간 40% 증가

과금률도 25% 상승


"보상을 '매우 어려움'에 집중하고, 다른 난이도는 입문용으로만 활용하죠."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특정 조건에 열리는 PvP 점령 모드. 반박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데이터가 이렇게 명확했고, 이 모드로 성공한 다른 게임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명분'이 없다는 사실이 자꾸 내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으로 피어올랐습니다.

"잠깐만요. 이거 저희 유저 성향과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가 입을 열자 회의실이 조용해졌습니다.

"혹시 이 데이터를 L 프로젝트와 동일 선상에서 파악하신 건 아닐까요?"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집중되었습니다. KPI를 달성하기 위해 추가된 모드에 대한, 데이터 기반의 객관적인 수치와 논리적인 분석이 있는데 막연한 직감만으로 반대하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를 확신이 있었습니다.

'성장 효율이 높다고 해서 꼭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혹시 플레이어들이 성장 효율 때문에 억지로 경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3년 전, 그 뼈아픈 실수

문득 신입 때의 잘못된 과오가 떠올랐습니다. 의도는 파티원 간의 경쟁을 통한 성과 획득을 넣은 '파티 플레이 보상' 시스템이었지만, 실상은 파티를 즐겨하던 유저들조차 보상을 위해 솔로 플레이를 진행하면서 게임 내 협동과 경쟁 요소가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솔로 플레이어 양산 시스템'이 되어버린 이후 게임의 코어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대전 액션으로 만들던 것에 퍼블리셔의 요청으로 만든 탐험 요소가 게임의 코어를 가져가버린 것이 한몫을 했습니다.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만 맹신했다가 완전히 실패한 경험.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데이터는 '무엇'을 했는지만 알려줄 뿐, 그 '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것을.


데이터의 함정: 숨겨진 '왜'

"정말 플레이어들이 'DPS' 공격력을 선호하는 걸까요?"

내가 질문을 던지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습니다.

"데이터를 자세히 보면, 게임 플레이의 막히는 구간을 'DPS' 조정으로 인해 낮춘다면 우리 게임의 원 의도인 '보스 퍼즐 패턴을 피해 합격 기를 발동하여 전략적으로 해소하는 재미'와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은 패턴을 익히기보다는 DPS를 맞추는 방향으로 선택을 제한할 수 있어요. 그런 결론을 내리고 유저에게 적용하는 것이 맞을까요?"

하지만 윗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데이터 근거 없이 직관으로 이어진 나는 소위 '미련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직관이라는 나침반

다음 날, 나는 플레이어 카페의 유저 목소리를 찾아봤습니다. 그 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습니다.

"DPS 맞춘다고 무기 성장 트리 맞추는 게 너무 힘들다."

"무기 트리 구조가 숨이 막히다."

"처음엔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의무감에 해요. 보상 때문에."

데이터가 놓친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플레이어들은 'DPS'가 높아서 게임이 빨리 깨지는 것이 싫은 것인데 개발팀에서는 '어려운 난이도'를 선호하는 것으로 잘못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억지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잘 만든 게임을 망치는 실수를 데이터만 믿고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플레이어들의 피로도는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이런 미묘한 감정, 숨겨진 동기,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플레이어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 나는 이것을 '직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의식의 데이터베이스

"어떻게 데이터 간 연관 관계를 미리 설계하고 구성할 수 있어요?"

후배가 물었습니다. 사실 나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직감은 그냥 생긴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경험으로 쌓인 실패와 방향, 그리고 방법의 층위들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이 모든 것을 고려한 복합적인 데이터를 고민해야 후에 데이터에 의한 방향 전환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수백 개의 게임을 플레이하며 체득한 플레이어 심리

실패한 기획들을 부검하며 얻은 교훈들

커뮤니티에서 읽은 수만 개의 유저 리뷰

동료들과 나눈 수없이 많은 토론들

직관은 단순한 '감'이 아닙니다. 압축된 경험과 지식의 총체입니다.


직관을 잃어버린 세대

안타깝게도, 많은 후배 기획자들이 데이터 만능주의에 빠져 직관의 중요성을 잊고는 합니다. 얼마 전 한 신입 기획자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튜토리얼 이탈률 데이터를 보니까, 30초 이상 되면 급격히 높아져요. 그러니까 15초 안에 끝내야 해요!"

나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정말 튜토리얼이 짧아서 이탈률이 낮은 걸까요? 혹시 게임의 재미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서 나중에 더 빨리 떠나는 건 아닐까요?"

실제 테스트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5초 튜토리얼: 1일 차 이탈률 5% → 7일 차 이탈률 85%

2분 튜토리얼: 1일 차 이탈률 15% → 7일 차 이탈률 45%

데이터를 단편적으로만 보면 15초가 승자였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2분 튜토리얼이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게임의 재미를 충분히 보여준 플레이어들이 더 오래 머물렀던 것입니다.


두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

그렇다고 데이터를 무시하라는 건 아닙니다. 데이터는 현실을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하지만 지도만으로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새로운 길, 예상치 못한 장애물, 숨겨진 보물의 위치를 발견하려면 '직관'이라는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기획은 '데이터'와 '직관'이라는 두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와 같습니다. 한쪽만으로는 제대로 굴러갈 수 없습니다.


후배가 또 물었습니다. "그럼 언제 데이터를 믿고 언제 직관을 믿어야 해요?"

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데이터가 '무엇'을 알려줄 때는 믿어. 하지만 '왜'를 물어야 할 때는 직감을 따라가야 해."

기획자는 단순한 데이터 분석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플레이어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욕망을 발견하고,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경험을 현실로 만드는 창조자입니다. 데이터는 과거를 설명하고, 직관은 미래를 상상합니다.

숫자로 증명할 수 없는 '재미'를 찾아내고, 모두가 외면하는 '왜'를 끈질기게 파고드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기획자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스프레드시트 너머에 숨어있는 플레이어들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들려주는 작은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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