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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Aug 06. 2021

대만 쟈오시의 타이완 마마(2)

Tiny, Not Tiny

 병원은 생각보다 멀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20분이 조금 안 되게 걸어야 했다. 가도 가도 나오지 않는 병원에 그녀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 민망했다. 언제나 습습한 대만의 겨울 그대로 비가 조금씩 내렸다. 우산과 우비로 비를 막은 채 서로 꼭 붙어 타이완 레이디와 걸었다. 어색함을 지우려고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그녀와 내 영어실력은 비슷비슷했다. 기본적인 회화만 가능했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으면 으흐흐 웃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지금 기억에 남는 건 몇 가지뿐이다. 우선 그녀는 내 부모님 뻘이다. 자녀들은 결혼했다. 은퇴한 공무원 부부로 혼자 이란을 여행 중이었다. 날 병원에 데려다주고 남편과 만나야 한다.

  

  나는 아이의 영어실력과 아이의 태도로 자꾸 재잘거렸다. 강렬했던 컨딩의 바람과 타이동의 바다, 거기서 먹은 맛있는 음식들. 그리고 친절한 대만 사람들. 마치 당신처럼. 대만 사람들은 다 친절한 것 같아요. 당신처럼요. 당신이 저한테 베푸는 친절은 아주아주 커요. 이런 일은 흔치 않아요. 저는 오늘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아냐, 이건 대만 사람들에게 타이니한 친절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야. '헐과 흑과 흐잉' 사이 어떤 감탄사가 먼저 튀어나왔다. 타이니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형용사란 걸 나는 처음 깨달았다. 나도 남들에게 타이니한 친절을 대수롭지 않게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지. 이 결심이 발목 흉처럼 몸 어딘가에 새겨진다면 그것도 괜찮았다.


  병원은 엄중한 한자 간판이 걸린 흰 건물이었다. 열린 문 안으로 여러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나를 옆에 앉혀두고 병원 진료를 접수했다. '한궈런, 샤오헤이원' 정도가 그녀가 하는 말 중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마른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설명을 하는 타이완 레이디는 참 든든했다. 그녀를 따라 몇 층 위로 올라갔다. 내과였던가. 내 차례까지 한 10명쯤 남아있었다. 내 접수번호가 적힌 종이를 꼭 쥐었다. 부디 내 차례가 빨리 오길. 그래서 그녀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남편과 여유롭게 만날 수 있길. 그래서 자신이 보인 타이니한 친절의 소회를 남편에게 전할 수 있길 바랐다.


  짧은 영어로 대화하는 데에 지친 우리는 아예 파파고와 구글 번역을 켜놓고 육성으로 대화했다. 여전히 엉성한 소통이었다. 음성 녹음 타이밍이 엇갈려 뒷말만 번역되거나, 번역문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다시 해달라고 상대에게 졸라야 했다. 여전히 150% 과한 바디랭귀지에 기대야 했다. 그런데도 번역 AI를 믿고 우리의 문장은 더 길어졌다. 상대의 발화 장면을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고 폰 화면을 읽는 상대의 반응을 점검해야 내 말이 수월히 전달됐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쩐지 교실에서 손으로 가려가며 쪽지를 쓰고 친구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그걸 전하던 날들 같다. 그녀와 나는 완전히 가까워졌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니. 직업이 뭐니. 딱딱한 번역문 아래 인간적인 궁금증이 느껴졌다. 대답을 한국어로 내뱉는데 이 공간에 한국어를 이해하는 건 나밖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직업은 찾고 있어요. 나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막막함과 한심함을 숨기고 그녀에게 턴을 넘겼다. 자신의 턴에서 타이완 레이디는 지체 없이 육성을 입력했다. 만만디가 얼핏 들렸다. 그녀가 건네준 액정화면엔 큼지막한 글씨로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너는 하고픈 걸 찾을 수 있다. 인생은 길다. 천천히. 조급해하지 말라.  


  그 문장을 읽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깊은 우물에서 눈물을 끌어올리듯 엉엉 울었다. '좋아하는 나라에 한 달 있고 싶어' 순전히 본인 위주의 이유로 많은 걸 회피하고 묻어두고 나왔다. 주변의 우려와 한숨도 모른 척하고 떠났다. 허무맹랑한 긍정은 며칠 사이 무너져 내렸다.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 벌 받나 봐.'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자책만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어째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아닌, 낯선 사람에게서 가장 필요한 말들을 얻을 수 건지. 그 말 덕에 힘이 나서 나는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친절하고 따뜻한 타이완 레이디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정말로 친절하고 좋은 사람. 내가 듣고 싶었지만 아무도 전해주지 않았던 문장이었다.


  눈물의 여운을 닦다가 내 차례가 되어 그녀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타이완 레이디가 나 대신 상황을 설명해줬다. 백발이 조금 섞인 의사는 영어로 진료를 봐줬다. 그는 천천히 설명하려고 애썼다. 다시 영어와 바디랭귀지, 파파고에 기대 보험처리를 위한 진단서 작성을 부탁했다. 거기에 나를 가장 불안케 했던 봉와직염의 가능성은 없는지 물었다. 복잡하게 생긴 봉와직염의 한문을 읽는 그의 발음이 한국어 봉와직염과 비슷했다. 의외의 공통점에 웃음과 안심이 동시에 찾아왔다. 다행히 감염 위험은 없고 앞으로 항생제를 꼼꼼히 바르라고 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1층에서 접수처리를 마무리했다. 보험 접수 때문에 필요한 사항들도 그녀 덕분에 수월히 진행했다. 병원비도 총 3만 원쯤 나왔다. 대만은 병원에서 약도 같이 조제해준다. 진단서, 연고 몇 개와 먹는 약. 영수증 등을 서류봉투에 한 데 담았다. 서류봉투를 소중히 껴안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기분이 좋아져 더욱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쟈오시 역, 위키피디아

  대만에선 엄마를 뭐라 부르나요? "마마." 그렇다면 당신은 제 타이완 마마군요. 정말로 고마워요. 그녀는 와하하 웃었다.  저는 당신의 '코리안 도터'고요. 그녀는 정말 웃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다시 한번 마마는 인심이 좋다 생각했다. 곧 쟈오시 역사가 나와서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는 이제 남편을 만나야 할 것이다. 내일이 체크아웃 데이. 그전에 저랑 꼭 인사하고 가요. 그녀를 배웅하고 다시 숙소로 걸어갔다.


  힘을 내서 혼자 식사도 하고 기차를 타고 뤄동에 갔다. 쟈오시에 돌아와 유명한 베이커리에 가서 선물 세트 하나와 여러 빵을 샀다. 타이완 마마를 위한 선물이다. 내가 느낀 고마움을 최대한 표현하고 싶은데 급작스런 병원비 지출이나 앞으로 남은 반절의 여행 일정에 턱턱 걸려 자꾸 빵을 덜어냈다.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간사한지. 나는 또 얼마나 작으냐, 한탄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마침 로비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타이완 파파. 나는 또 전에 없던 넉살과 어리광을 부리며 둘에게 인사했다. 빵을 전했는데 그녀도 똑같은 베이커리에 가서 똑같은 빵을 샀댄다. 우리는 취향이 같다며 반가워했다. 나는 그녀 부부가 돌려준 빵 반절을 가져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좋은 걸로 많이 사 올걸.


  내 매트리스엔 '겟웰순:)'이라 적힌 이니스프리 시트팩이 올려져 있었다. 오늘 낮에 체크아웃한다던 홍콩 친구의 선물. 내가 뭐라고 이런 선물을. 또 찡해졌다. 아프고 나서 마음이 물렁하다 못해 액체가 된 것 같다. 누가 조금만 호의나 친절을 보여도 넘실대다 못해 넘쳐버리는 마음. 해외라서든 아파서든 특별히 친절한 사람들 때문이든 나는 전에 없이 민감하고 격렬하게 고맙고 즐겁고 감동한다.


   다음날 아침, 최대한 소음을 줄여 짐을 정리해 나갈 준비를 하는 타이완 마마를 붙잡았다. 작별인사해야 돼요.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또 알 수 없는 말을 핸드폰에 녹음했다. 번역기 화면엔 '밤새 별일 없었나, 앞으로 네 여행이 잘 끝나길 기도한다'라고 적혀있다. 아이, 정말. 자꾸 무장해제당한다. 우리 셀카 찍어요. 세수도 못하고 울다 웃는 얼굴로 그녀와 사진을 찍었다. 타이완 마마의 이름도 물어 들었는데 익숙하지 않은 발음이라 금방 까먹었다. 그래도 사진이라도 찍어놓길 잘했다고 두고두고 생각한다.


  한국에 도착하고 누군가 여행 후기를 물으면 나는 매번 귀인의 에피소드를 첫째로 꺼냈다. 인류애와 휴머니티에 벅차 흥분한 내 어조와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내 기대보다 조금 시들했다. 그랬구나, 신기하다. 운이 좋다. 예상과 반응의 괴리를 나날이 접할수록 내가 여행뽕이 심했단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 후엔 덤덤한 태도로 위장했다. 친절하더라고, 사람들이.


  귀환 후 수포가 터진 내 발목을 보고 가족은 징그럽다 흉을 봤다. 그 흉마저 2년이 지나니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잊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다. 내겐 결코 타이니하지 않던 호의를 기억하고 싶었다. 무탈한 발목을 보니 망각의 조바심이 들어 그날을 글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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