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이제야 알았나 봐
최근 우연히 세종대왕 탄신일에 맞춰 생일카페가 열린다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접했다. 아이돌 생일카페(줄여서 생카)나 만화의 주인공 생카는 많이 봤어도 위인의 생카라니? 그것도 세종대왕이라고? 덕후인생 nn연차인 나로서도 이건 꼭 가야 해! 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날짜가 5월 14일부터 15일까지, 바로 스승의 날이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라고 한다. 만백성의 스승이신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사라니, 내 안의 덕력이 끓어 올라 넘치기 직전이었다. 소녀! 전하를 뵈러 가겠사옵니다!
세상은 넓고 덕질은 끝이 없다
덕후들은 늘 이런 말을 달고 산다. 휴덕(덕질을 휴식하는 것)은 있어도 탈덕(덕질을 완전히 끝내는 것)은 없다고. 덕질의 대상이 옮겨갈 뿐 한 번 덕후는 평생 가는 덕후라고. 아이 낳고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깨달음이 왔다. 이렇게 어린아이들도 쉽게 책을 읽게 해주는 한글이란 얼마나 위대한 글자인가. 거기에 이런 글자를 단 한 명의 사람이 창조해 냈다는 사실까지 더해지면 어느 누구라도 세종대왕 덕후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다.
사실 덕후는 그리 좋은 단어가 아니다. 일본어 '오타쿠[御宅]'에서 조금씩 변형되어 오면서 지금의 '덕후'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다행히도 세월이 지나며 본래 '오타쿠'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보다 '어딘가에 열정을 쏟는 사람'을 의미하는 '덕후'가 주는 긍정적인 느낌은 나를 당당하게 만들어 주었다. 세종대왕님이 만드신 이 한글 덕분에 음침한 기운을 뿜어내는 오타쿠라는 단어가 덕후라는 찬란한 빛으로 다시 태어났다고나 할까.
여기예요! 세종대왕 덕후들 모여보세요!
아침부터 서둘러 오픈런을 한 세종대왕 탄신가배. 입구부터 걸린 현수막에 1차 덕후의 가슴이 뛴다. 누군가에겐 '이게 뭐라고' 싶겠지만, 아직도 나의 열정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대상이 있음에 감사한다. 그 대상이 바로 세종대왕이라는 사실도. 그런데 막상 행사 중인 가배집(카페)으로 들어갔더니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너무 마이너 한 덕질만 했던지라 세종대왕님의 유명세를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한국인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이 정도 인파가 몰릴 거라는 예상을 했어야 했다. 한복을 입고 오면 받는 특전도 바로 내 뒤에서 끊겼다. 한 발 늦게 달려왔다면 여기까지 온 보람도 없었을 터. 한숨을 돌리고 먼저 온 일행과 합류했다. 혼자서 올 뻔했는데 다행히 이런 나를 긍휼히 여겨 함께 해 준 분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혼자서도 워낙 이쪽저쪽 잘 다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함께 해준다면 더 행복해지니까.
가배는 커피의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이렇게 예쁜 단어가 있는데 다들 커피 대신에 가배라는 말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타락은 우유를 뜻하는 말이니 아마도 타락가배는 카페라테인 듯. 에이드를 톡 쏘는 물이라고 순화한 표현도 마음에 들었다. 요즘 카페에 들어가면 한글은커녕 영어로 메뉴를 적어 놓는 곳이 많아서 불편했는데 이렇게 우리말로 쓰인 차림표(메뉴의 우리말)를 보니 깨닫게 되는 점이 많다. 무의식적으로 쓰고 이는 외래어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사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은 세종대왕 탄신일이니 최대한 우리말 사용을 해보도록 노력해야지 마음을 먹어본다.
행사가 치러진 '커피한약방' 곳곳에 놓인 홍보물들이 눈길을 끈다. 보면서 광화문에 같이 계신 이순신 장군님도 이렇게 생신 가배 행사가 치러지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도 해봤다.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기 힘든 요즘이다. 이렇게라도 누군가를 기념하는 행사가 자주 열리기를 소망해 본다.
여기 오겠다고 생활한복을 처음으로 구매해 봤는데 우연히 방송국 카메라에 잡혔다. 사실 인터뷰도 길게 했는데 그건 편집돼버린 듯하여 조금 아쉽다. 그래도 나의 옆모습이 이렇게 화면으로라도 남아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아이에게도 자랑했다. "엄마~ 텔레비전 나왔어!"
덕후인생 nn 년,
한 게임방송에서 게임덕후로 인터뷰당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당당하게 세종대왕 덕후가 되어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그때도 지금도 난 늘 열정적이다. 좋아하는 일이 생긴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직진한다. 직진하는 나의 삶이 그리 틀리지만은 않았음을 오늘 방영된 나의 옆모습에서 확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