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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Feb 28. 2024

"희랍어 시간"을 읽고

언어의 본질 

"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 자신의 묘비명으로 써달라는 보르헤스의 유언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언어는 칼일까 읽는 내내 생각해 본다.


희랍어를 배우는 여자는 열일곱 살 때, 그리고 서른일곱 살 지난해 늦봄 말을 잃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여섯 살 때 마당에 앉아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은 문자들의 결합을 스스로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흥분과 등과 목덜미에 내리쬐던 햇빛이다. 그녀의 어머니 말대로 그녀는 혼자 한글을 깨친 영민한 아이인가. 그녀는 "숲" 단어를 좋아했다. 그러나 자신이 내뱉는 말이 분명하게 들리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열일곱 살 그녀의 몸에 정적이 들어왔다. 물 밑에서 수면 밖을 바라보는 것 같은 고요였다. 그런데 겨울 평범한 불어 단어가 그녀 입에서 갑자기 나왔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천천히 타들어갔다.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나 다시 찾아온 침묵은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항암치료를 받던 어머니의 사망, 이혼 후 빼앗긴 아이의 양육권으로 그녀는 힘들다. 그때의 불어처럼 히브리어가 다시 그녀가 입을 열게 해 줄까 그녀는 간절하게, 조용하게 희랍어를 공부한다.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는 열다섯 살에 독일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서서히 시력을 잃고 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이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압도당한다. 모든 사물의 몸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와 눈으로 스며드는 새벽의 색은 그의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 어리석음으로 사랑을 잃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독일에 남겨둔 채 모국어가 있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의 그 복잡한 문법체계에서 고요함과 안전을 느낀다. 희랍어를 잘하는 신기한 동양애로 알려지면서 플라톤의 저작들에 매료되었다. 


남자는 여자가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지 못한 점을 사과한다. 칠 월 마지막 주 수업에는 남자와 여자만 있다. 남자는 계단에서 넘어져 안경이 깨지고 손을 베인다. 초록색 안경이 없자 남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여자는 남자를 부축해 택시를 타고 남자 집으로 데려다준다. 남자는 여자가 듣는지  확인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눈꺼풀과 입술은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 단단히 걸어 잠글 수 있는 것이다.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말고 침묵으로 그들은 서로 알아갈 수 있을까. 


어느 언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은 모국어를 그리워하는 남자와 그 모국어를 잃어버린 여자는 낯선 외국어 희랍어에서 만났다. 외국어는 어렵지만 예의 바르다. 가끔의 침묵이 있고 완벽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어에는 여성명사와 남성명사가 있다. 명사에 맞게 관형사를 골라 써야 한다. 우리나라 말에는 없는 문법이다. 독일어는 중성 명사까지 있다. 모국어가 아닌 이상 복잡한 문법으로 익숙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말도 외국인들에게 어려운 말이다. 존댓말이 없는 나라는 배우기가 어렵다. 나는 아프리카인이 김용택의 "콩, 너는 죽었다" 시를 익히고 몸으로 표현하는 장면을 봤다. 한국어에 푹 빠진 그는  "또르르 또르르" 음절이 주는 경쾌함을 이야기한다. 외국어도 언어이기에 우리는 배울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공기와도 같은 모국어에서 느낄 수 없는 낯선 긴장감과 직관적 이해가 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무형의 분위기가 있다. 낯선 언어를 읽고 발음하고 그 속의 뜻을 알아갈 때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언어도 감촉이 있고 정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까. 언어는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이기 전에 영혼이 들어있는 생물이다.  언어에는 인간이 담겨 있다. 칼로 찌르는 잔인성, 밝음으로 안내하는 사랑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언어로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언어 본질이 갖는 비극성이다. 침묵도 언어일 수 있을까. 시력이 사라지듯, 생명이 사라지듯 언어가 사라지면 암흑이 남을까 아니면 흔적을 남길까. 언어의 정념을  눈을 잃은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언어는 글자와 소리만이 아니다.  내가 불어를 공부하던 시기로 되돌아가본다.






"희랍어 시간"의 그녀처럼 나도 말이 없었다. 늘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로 칭찬도 받았다. 왜냐하면 단체생활에서는 무척 수월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까다롭지도 않고 순종적으로 조용히 그 자리에 있는 아이라 때로는 함부로 대해도 상대방은 아무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타고난 심성인지 나는 차츰 그것이 배려라고 배운 것 같다. 감정 숨기기 그것은 나의 색깔이 되었다. 감정이 드러나면 부끄러웠다. 사람들 모두 나를 한꺼번에 쳐다보면 심장이 뛰었다. 나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수 (1/n) 만큼 작아진다. 한 사람에게 닿는 목소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 흔한 총량의 법칙처럼 목소리는 총량을 채우느라 작아진 것이다. 나는 목소리가 작은 아이로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과 있을 때는 나의 온전한 볼륨을 낼 수 있었다. 정말 목소리가 작은 아이는 아닌 것이다. 운동회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그날이 조금 즐거웠다. 승부욕도 생겼다. 우리 팀 이겨라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쓰러졌다. 일등으로 달리던 계주는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진 것인지, 누가 밀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이 나빠 잘 보지 못했다. 옆에 아이가 소리친다. 야, 너 밀쳤지? 나는 그 목소리만이 진실인 줄 알고 길길이 날뛰었다. 뒤에 아이들에게 말했다. 잘 달리고 있었는데 옆에 아이가 밀친 거래, 어떡해, 나는 다리를 동동 구르고 주먹을 쥐고 울고 싶었다. 마치 내가 달린 것처럼. 갑자기 나를 차분한 모습으로 지켜보는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은 계주가 넘어진 것보다 나의 커다란 목소리에 놀란 것이다. 아주 흥미롭다는 듯한 그 눈에 나는 갑자기 벌거벗은 몸이 된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렇게 나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폭력을 당해도, 약한 자를 괴롭히는 사람을 보아도, 죽은 사람을 보아도 입 밖으로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나는 "희랍어 시간"의 그녀를 이해한다. 


바늘처럼 콕콕 찌르는 말을 나는 불쾌하다고 바늘 같은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러나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 화를 안 내는 편이냐는 말도 듣는다. 참을만해서 참는 것인데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가 보다. 나의 몸은 어릴 적부터 교육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나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말이 없고 조용한 부분은 아빠를 닮았다. 우리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 정신 사나워라는 말은 딱 맞다. 나는 청각이 발달했나. 과묵한 사람은 외국어를 잘 배우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영어도 좋아했고 프랑스어도 좋아했다. 어쩌면 그 말에 대한 오기일 수도 있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외국어를 하면 톤도 달라지고 다른 성격의 나로 변한다. 그리고 어원 속에는 삶의 흔적, 철학, 문학이 있는 점이 좋다. 물론 모국어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모국어는 상처의 언어이다. 조용히 말하면 잘 듣지 않는다.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나는 침묵의 언어에 익숙하다. 화도 침묵으로 표현한다. 침묵한다는 것은 내가 굉장히 화가 난 상황이다. 무례한 사람은 침묵도 공격한다. 말을 하라고, 말을 해야 알지, 자신의 답답함으로 나에게 화를 낸다. 그녀처럼 입술을 내가 닫은 것일까. 내가 스스로 닫고 싶은 적은 없다. 말로 풀어야 하는데 말이 더 커지다 나를 삼킨다. 침묵은 침전할 기회를 준다. 어둠 속에서 나는 감정을 더 잘 표현한다. 침묵하다 나온 말은 짧다. 충분히 감정이 가라앉았으니 또는 해결이 되지 않았으니 길 수가 없다. 간결하지만 시적인 언어, 직관적으로 알아듣는 언어가 좋다. 그래서 긴 글에 나는 익숙하지 않아 더 자세히, 더 길게, 더 감정을 드러내는 글을 써야 한다. 신기하게도 나 같은 작가가 많다. 그래서 나는 글을 읽나 보다. 감정에 서툴다고, 나를 표현하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작가들을 자주 본다. 글은 언어보다 느려서 우리 같은 사람이 표현하기에 적합한 도구인가 보다. 어떻게 내 마음 같지 하는 글을 만나기 위해, 내가 모른 나의 감정을 만나기 위해 나는 글을 읽는다. 한강 작가는 미로처럼 어렵지만 솔직하고 아름다운 글을 쓴다. 초록을 닮은 그녀의 글이 좋다. 오늘도 내 감정을 그녀를 통해 많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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