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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 산티아고

3월 29일 푸엔테 라 레이나

by 하루달

오늘은 다섯 명 모두 각자의 속도로 걸었다. 나는 어제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작게 잡혔다. 소독한 바늘로 터뜨리고 밴드를 붙였다. 아침부터 쩔뚝쩔뚝 걷게 된다. 알베르게도 예약하지 않았다. 컨디션에 따라 10km나 20km를 걸을 생각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나의 신체 중 가장 낮은 발을 생각해 봤다. 걷지 못한다면 순례길 계획은 무산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신체이다. (사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신체라는 말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발은 늘 남에게 오픈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리고 잘 돌보지 않는 못생긴 신체이다. (한때는 발에게도 가혹한 적이 있었다. 발이 작아야 미인이라며 발을 꽁꽁 싸매서 걷지 못하는 여자도 있었고 높은 힐이 여자들의 몸을 건강하지 못하게 했고 어이없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도 구두에서 시작이다) 부랴부랴 이제야 밤마다 나의 발을 보살피고 있다. 풋크림을 바르고 아침에는 바셀린을 바르고 발가락 하나하나 밴드를 한다. 그래도 많이 걸어 물집이 생겼다. 요 작은 녀석은 나의 신경을 거스른다. 마치 나의 마음 깊이깊이 숨어 있는 트라우마 같다. 나는 이게 트라우마예요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트라우마가 아니라고 한다. 말 못 하는, 꽁꽁 숨겨 있는 것이 트라우마이다. 오늘은 용서의 언덕에 올라왔다.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에게 용서를 빌 것인가. 본인만이 알고 있다. 그림책 동아리나 여러 모임에서 나는 솔직해지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놀란다. 나는 용감하지 않아요라고 하면 착하게도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위로한다. 그만큼 내가 꽁꽁 숨기기를 잘한 것이다. 나의 못생긴 발을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발은 내 신체 중 가장 못생긴 부분이며 더러운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순례자에게는 보여준다. 그들은 괜찮냐고 계속 묻는다. 트라우마는 극복해야 할 무언가로 생각했다.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트라우마를 사랑하기로, 좀 더 나를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그렇게 용서의 언덕에서 나 자신을 용서하고 용서받았다. 물집도 얼른 낫길 바란다.

첫날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를 가는 길은 잠시 하이웨이를 지나가는 것이 맞다. 많은 사람들이 하이웨이와 숲을 오가며 높은 피레네 산맥 옆길을 넘은 것이다. 그래도 구글이 끝없는 하이웨이만 안내할 때 두려웠다. 구글의 말을 듣지 않고 까미노 조개, 화살표를 믿기로 했다. 어제 푸엔테 라 레이나 가는 길에서 또 한 번 시련의 순간이 왔다. 구글말을 들을 것인가, 노란 화살표를 따라갈 것인가. 그때 독일인 아저씨는 구글을 믿는다며 가버렸다. 그래, 구글을 믿어보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나는 길을 떠났다. 예쁜 마을에는 알베르게가 있을 것 같아 숲 길로 들어갔다. 그런데 또 하이웨이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좀 넓은 인도길이 있긴 하다. 산맥이 아니라 평평한 길이다. 구글이 1시간 30분을 걸으란다. 내가 미쳐, 아, 무섭다, 또 아무도 없다. 노래라도 부르자. 저기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부지런히 가보자. 오, 나무이다. 저기 집이 보인다. 카페가 아닐까. 가까이 가보니 폐허집이다. 이제 30분 남았다. 힘을 내보자. 길바닥에 통통한 지렁이가 지나간다. 내 신세랑 같아 보인다. 이제 알베르게를 검색해 보자. 가장 가까운 알베르게가 보인다. 와우 9유로에 방이 있단다. 어, 제니퍼도 독일인 아저씨도 있다. 와우, 아침에 만난 한국인 소민 씨도 있다. 그녀는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며 허그를 한 사람이다. 조금 대화를 나눈 후 각자의 속도로 걷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녀는 40km를 걸은 적도 있고 북쪽길도 걷고 싶어 하는 열정녀였다. 너무나 반가워서 샤워를 하자마자 근처 레스토랑에 갔다. 그녀는 늘 혼자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님은 회사를 다니는 줄 알고 있다며 아무도 모르게 온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한다. 시저 샐러드, 대구살 토르티야, 화이트 와인을 먹고 마시며 폭풍 대화가 이어졌다. 여기는 나이랑 상관없이 친구가 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그녀는 최초의 유럽 여행이라 더 많은 것을 보고 싶다며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도 머문다고 한다. 대단하다. 알베르게 앞에서 먼저 출발한 미영 씨와 수정 씨를 만났다. 나를 보며 일찍 왔다며 놀란다. 아무래도 구글맵이 빠른 길을 안내한 모양이다. 나는 빨리 왔지만 멋진 풍경을 많이 보지 못했다. 구글맵은 낭만이 없다. 그래도 소민 씨를 다시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실수는 했지만 행운을 얻었다. 새벽 6시 반에 출발을 하니 좀 어둡다. 아무도 없다. 내가 일등 출발인가 보다. 처음 보는 풍경을 찍으며 걷다가 생각이 났다. 오 마이갓, 스틱을 두고 왔다. 다시 출발할 때는 구글을 껐다. 어제 다짐을 했건만 다시 구글을 믿었는데 역시 아니다. 다른 순례자를 따라가는 것이 더 낫다. 처음으로 오로지 조개를 따라 에스테야에 잘 도착했다. 한국인 중년 부부, 둘이 온 젊은 여성분들도 만났다. 한국인은 무조건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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