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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론 Feb 14. 2024

행복하기에 슬픈, 기억의 기록들

독후감: 명랑한 은둔자



고독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두고 즐길 때 가장 흡족하고 가장 유익하다.
적절한 균형을 지키지 못하면, 삶이 약간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TV 등장인물들을 현실의 사람들처럼 생각하게 되고,
집에 들어온 파리가 친구 삼을 만한 상대로 느껴지고,
남들은 더없이 일상적인 일로 생각하는 작은 사건들이(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추리닝 바지보다 더 점잖은 옷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라거나)
기이하고 불가해한 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P.48)

우정은 때로 아주 실질적이고 긴요한 것이지만,
여러 관계들 중에서 가장 일시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마모는 자연스럽고 예측 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변하고, 각자 자기 갈 길을 간다. (P.96)

사건을 기록하는 행위,
내게 벌어진 일과 그에 대한 내 감정을 세부적으로 적어서 활자로 고정해두는 행위가 내게는 늘 유용했다.
그것은 꽃을 책에 끼워서 압화를 간직하는 일,
혹은 추억의 기념품을 특별한 상자에 보관하는 일과도 좀 비슷하다.
일단 세부를 보존해두면,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을 덜고서 다른 일로 삶을 채우며 나아갈 수 있다. (P.142)

기억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기억할 만한 일들을 기억해 내는 방법을 싫어했다는 말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과거의 나는 모든 사건들을 기억의 저장고에 보관할 능력도, 그럴 이유를 찾아낼 여유도 없었기에(혹은 그렇다고 느꼈기에) 특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사건들 몇 가지를 골라내어 기억의 저장고로 이송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기준점을 가지고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어떠한 '사건' 혹은 특정 상황의 '감정'이 기억으로 변환되는 최소한의 임계점은 존재하는 듯하다. 나의  경우 오랫동안 '얼마나 극적인 사건이었나?', '내가 사건에 들인 노력(시간, 감정 등)은 큰가 작은가?'라는 두 가지의 기준에 의해 일련의 사건들을 일단 기억 저장고로 냅다 던져두곤 했다.


그 어설픈 기준 때문이었을까. 기억의 저장고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사건들을 정리하려고 그들 앞에 섰을 때, 그 사건이 정확히 어떤 사건이었는지,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 등 '기억'의 조건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무엇이었는지 종종... 아니 대부분의 경우 잊어버리곤 했다.


나의 부주의와 무책임함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 나는 번번이 '어찌 됐든 당시에는 그래도 이 녀석들이 기억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이곳에 놔둔 거겠지.'라는 합리화와 함께 큰 보따리 두 개를 끌고 왔다. '아, 그때 참 좋았었는데'라고 평가할 만한 녀석들은 죄다 '긍정적인 기억'이라는 보따리에 처넣고, '그땐 참 힘들었었지.'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녀석들은 죄다 '부정적인 기억'이라는 보따리에 쑤셔 박았다.


어찌 됐든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보따리를 들춰내고 싶은 순간이 왔을 때였다. 특정 기억을 기억해 내고 싶어 긍정과 부정의 보따리를 뒤져 기억들을 바닥에 와르르 쏟아 놓았을 때였다. 미묘하게 다르면서도, 동시에 미묘하게 닮아있는 기억들. 내겐 그 기억들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간해낼 능력과 단서가 없었다. 때문에 기억들이 쏟아져 나온 보따리들을 바라보며 기억들의 유사점을 다시 한번 구분해 볼 뿐이었다.


"아 너는 긍정적이네, 너는 부정적, 긍정적 하나 더..." 분명히 보따리 안에 내가 찾으려는 그 기억이 있긴 한데, 찾을 수 없었다. 설령 찾아낸다 한들 해독할 수도 없었지만. 답답함과 공허함이 찾아왔고, 분풀이를 한답시고 보따리들을 뻥 차버리곤 했다. 쏟아져 뒤섞여버린 기억들. 한동안 그들을 노려보다 내가 그것들이 긍정적 기억인지 혹은 부정적 기억 인지마저 잊어버릴까 봐 화들짝 놀라 다시금 쏟아진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주섬주섬 보따리들에 넣는 한심한 짓을 반복했다.


다행히도 그 한심한 짓들을 몇 번 되풀이하다 보니, 그 과정 속에서 찾아오는 답답하고 공허한 기분에 싫증이 났다. 그 싫증에서 벗어나고자 어느 순간부터 일련의 사건들을 기억의 보관소로 냅다 던지기 전에 '누구와 어떤 일이 있었고, 그때 내 기분은 어땠고, 그래서 어떻게 했고...' 등의 최소한의 설명들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그런 수기 행위가 점점 익숙해지자 더 많은 요소들을 적어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수기의 과정 속에서 쌓인 노하우가 어느 정도 그 욕심들을 충족시켜줬다.


덕분에 현재 나의 기억 보관소는 기억들을 비교적 온전하게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내가 가지고 행했던 치졸한 마음가짐과 행동들이 빼곡히 적혀 있지 않았더라면, 아무 사람이나 붙잡아두고 이 위대한 기억 보관소 (그리고 그걸 만들어낸 더 위대한 나)를 자랑했을 것이다. "이보세요. 제가 기록해놓은 기억들을 좀 보세요. 정말 꼼꼼하고 세심하고 또... 그렇기에 대단하지 않습니까?(그리고 그걸 누가 만들어냈다고요?)"


하지만 자랑을 주저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뿌듯한 마음으로 그 기록된 기억들을 열람하는 과정 속에서 때론 서서히 때론 갑작스럽게 마음을 적시는 슬픔이다. 부정적인 기억들을 되돌아보는 과정의 경우, 지나치게 세심하게 옮겨 적어 놓은 그때의 상황과 감정들을 마주하면 나는 다시금 얼마간 화가 나고, 다소 무기력해지다가 이내 슬퍼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정적인 기억의 경우, '부정적'이라는 그 기억의 속성이 내가 느끼는 슬픔을 정당화하는 짓을 덜 어렵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 슬픈 기억이었지. 안 좋은 기억이었지. 그러니까 내가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해'라는 합리화는 이제껏 꽤나 유용하게 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더 깊은 슬픔을 던지고, 보다 어려운 합리화 수식을 요구하는 '긍정적'이라는 라벨이 붙여진 기억들이다.


고교 시절 친구 둘과 아파트 단지 구석진 곳에 있는 매점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해치우고,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후반부 '김 형'과 '안 형'이 헤어지며 했던 대사를 한 명씩 번갈아가며 읊조리며 깔깔대던 순간을 회상할 때면, 서먹해져 버린 그들과의 관계에, 어느샌가 철거되어 버린 그 매점에, 그 시절의 추억을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그들과의 만남 약속을 계속 미루기만 하는 나 자신에 쓸쓸하다가, 부끄러웠다가 이내 슬퍼진다.


이처럼 행복했던 기억을 되돌아보는 순간들은 대부분 그 행복했던 순간들과 현재를 비교하게 만들고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실현할 수 없는 관계, 배경, 상황 등의 부재감만을 더한다. 나아가 실현할 수 없는 요소들은 '관계', '배경', '상황'과 같이 단일하고 깔끔하게 정리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관계와 상황과 배경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면서 또 다른 실현 불가능한 이유들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연유로 행복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는 일은 항상 최소한 그때의 행복만큼의, 그리고 대부분은 그 이상의 슬픔을 남긴다. 기억을 기록하는 일에 익숙해진 만큼, 또 능숙해졌다고 느끼는 만큼, 기록된 기억을 들여다보는 일은 더욱 어색해지고, 서툴러진다. 가끔씩은 나 자신이 기록을 기억해 낼 용기는 없으면서도, 기억을 기록해내둬야 한다는 욕심 혹은 강박에 갇혀 기계적으로 펜을 쥐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어쩌면 이 글 또한 '저는 이러이러한 연유로 기억을 기록하는 것을 들춰보기를 두려워합니다'라는 또 다른 기록으로 방치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 저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결국 그것을 극복해 내고 이런저런 의미를 발견했습니다'라는 식의 시원하고 깔끔한 결론이 없는 글자들의 조합.


그렇기에 이 전문(全文)은 '글'이라는 하나의 완성품이 아니라, 무언가를 어찌 됐든 적어놓은 '기록'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저는 지금 기억의 기록물을 다시금 불러오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다고요.'라는 식의 찝찝한 후반부를 가진 기록.


이런, 이젠 기록을 남기는 일조차 서글퍼지려고 한다. 그렇기에 서둘러 이만 기억의 기록을 기억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기록을 마쳐야겠다. 미래의 발전되고 성숙해진 내가 언젠가 멋진 결말을 찾아내 이 기록을 글로 바꿔줄 때를 기다려야겠다. 비록 내가 이 기록을 다시 꺼내보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명랑한 은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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