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Aug 29. 2017

누구에게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비건 레시피가 필요해.' 


그녀의 답장은 간단했다. 김치 나눠주기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녀가 만든 김치를 싹싹 비우고 유리병에 내가 만든 김치를 가득 담아 돌려주었다. 덕분에 파머스마켓에서 한 번 더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은근슬쩍 일자리 이야기를 꺼냈다. '너 사람 필요하지 않니?' 


메일을 보내겠다는 J와 헤어지고 냉장고에 남은 김치가 푹푹 익어갈 무렵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먹을 수 있는 김치 레시피가 필요하다고 했다. 응? 김치가 원래 채식주의자용 아니었나? 작년 여름 우리 집에 머물렀던 프랑스인 친구 중 A가 채식주의자였다. A에게 네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설명하며 자신 있게 집에 있던 김치를 내밀었는데 내가 잘못한 것일까. 어떤 재료가 문제인지 J에게 물어보니 피시소스가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아 젓갈은 생선으로 만들지. 하지만 그래 봤자 아주 조금 들어갈 텐데. 그래 뭐 빼면 되지. 


다행인지 내가 J에게 건네었던 김치는 젓갈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내가 갔던 마트에 하필 피시소스가 없었고 대신 꽁치통조림 비스무리한 걸 넣어보려다 영 아니다 싶어 흰 밥에 넣어 싹싹 비벼먹었다. 난 젓갈이 없어도 공기 중에 떠도는 균이 제 역할을 하리라 믿었고 다행히 발효의 신(?)이 나를 어여삐 여겨 맛있는 김치로 변신시켜 주었다. 젓갈을 넣지 않았다고 말하는 내 말꼬리에는 힘이 없었는데 오히려 J의 눈이 반짝했던 기억이 났다. 그렇구나. 소비자 층이 겹치는구나. 


한국인이 아니라면 누가 캐나다에서 김치를 먹을까? 한국에 오래 지내서 이미 김치 맛에 중독된 여행자가 우선 떠올랐고 건강에 무척 신경 쓰고 예민한 사람이 그려졌다. 파머스마켓에 잠시 서 있어보니 김치의 효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단지 맛이 익숙지 않아 힘들어했다. 건강에 좋고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는 J의 유혹에 사람들은 다이어트라면 뭐든 입에 넣을 수 있는 각오가 된 마냥 몇 병 사갔다. 물론 몇몇은 글루텐프리인지, 유기농인지, 채식주의자용인지 꼼꼼히 따져 묻고 돌아서기도 했다. 만약 글루텐프리면서 유기농이고 채식주의자용 김치를 만들면 더 쉽게 팔 수 있겠지만 일단 모든 재료를 유기농으로 만드는 건 비용이 올라가니 내가 함부로 제안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목요일에 식당에서 만나자는 답장을 보내고 나는 레시피 점검을 했다. 노바스코샤 주의 퍼블릭 마켓에서 음식을 팔기 위해선 담당부서 공무원에게 부엌 청결 검사는 물론 식재료와 레시피 점검을 받아야 한다. 머리 속 생각대로 집에서 대충 먹는 방식으로 만들어서 나가 팔 수 없다. 부엌도 싱크대, 냉장고, 조리대 등 최소규격이 정해져 있다. 개인사업자가 따로 부엌을 만들기 힘들면 케이터링이나 음식점에서 사용하고 있는 부엌을 임대해서 쓰기도 한다. J의 김치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 레시피는 이미 인터넷에 꽤 많았다. 나는 조리과정을 단순하게 만들어달라는 메일 내용에 따라 양념을 모두 썰고 한 번에 갈아 툭툭 썬 배추에 버무리는 겉절이 방식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매운맛을 줄이기 위해 빨간 파프리카를 넣어 색을 내고 밀가루 풀물 대신 밥 한 덩이를 넣어 시험작을 만들었다. 옅은 주황빛의 이도 저도 아닌 김치가 만들어졌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파프리카에서 물이 나와 예상보다 김칫국물이 많아졌다. 일단 고춧가루로 이 흥건함을 막아보자. 호기롭게 그녀의 부엌으로 향했다.



약 3시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나름 김치를 만들었다. 모든 재료를 계량하느라 허우적대고 배추를 쭉 짜느라 온몸에 힘이 빠지고 밥 대신 쌀가루 풀물을 만들어보자는 도전이 완전히 실패한 것 말고는 괜찮았다. 병 15개에 차곡차곡 김치를 넣고 뒷정리하고 나와 남편과 J는 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고파!!' 


작은 초밥 식당에서 테이크아웃하기로 한 음식을 기다릴 겸 우리는 맥주 한 잔을 가볍게 하러 피자집에 들어갔다. 나는 안주로 가볍게 먹자고 시킨 피자를 허겁지겁 뜯어먹으며 바로 취해버렸다. 뛰어다니느라 배고픔도 잊었고 긴장이 풀리니 맛있는 맥주에 금세 녹아버렸다. 얼굴이 벌게진 우리는 그제야 각자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김치 냄새 맡기만 해도 싫지는 않냐, 파머스에는 진상 손님이 없냐는 내 도발적인 질문에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제 2년 됐는데 솔직히 김치 냄새만 맡는 것도 싫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김치는 꽤 팔리는데 언제까지 매일 퇴근하면서 부엌에서 배추 절이고 마늘 까야할지 모르겠어. 파머스마켓은 정말 별로야. 음식을 팔고 싶은데 그러려면 위층으로 올라가야 해. Oh my word! 누가 그 좁고 더러운 2층에서 김치로 만든 음식을 먹고 싶어 하겠어? 파머스 마켓도 관료조직이야. 완전 자기들 마음대로야. 모든 판매자들이 unhappy해.'


나는 손뼉을 짝짝 치면서 모든 일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콩글리쉬가 아닐까 싶어 잠깐 멈칫했지만 다행히 J는 알아들었다.) 우리는 점점 더 어두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나누기 시작하며 우리를 기다리는 초밥이 딱딱하게 굳을 때까지 떠들었다. 왜 회사는 항상 폐쇄적이고, 상사는 답답하고, 이 동네는 도대체 변화가 없을까. 마치 서울 연남동에서 친구와 떠들듯 우리는 그렇게 넘어가는 해를 잊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태원에서 노는 사람 말고 사는 사람은 처음 만났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