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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n 18. 2018

누군가 가본 길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않더라

“다들 그렇게 살아.” 


어른들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1970년대만 해도 여자가 대학교육 받고 취직하는 게 드문 일이었다고, ‘평생직장’을 다니다 퇴직하는 게 축복이라고, 회사는 전쟁터지만 사회는 지옥이라고. 지상파 방송사의 회계부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하면 다들 그렇게 안정적인 직장에 어떻게 들어갔냐며 치켜세웠다. 철밥통이니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이제 결혼하고 애만 낳으면 된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학교의 여학생 비율이 50퍼센트를 훨씬 넘고 평생직장의 의미가 거의 사라지고 있는 요즘 현실에도 그들은 굳건했다. 회사 내에서도 비슷했다. 최근 몇 년간 방송사의 신입 대졸 채용이 부쩍 줄은 탓에 정년퇴직을 바라보는 50대 이상의 비율이 20대보다 훨씬 높았다. 그분들이 보는 세상과 내 또래가 보는 세상은 너무 달랐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면서도 세대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지상파 방송사에는 한번 들어왔으면 정년까지 끝까지 다녀야 하는 운명 같은 것이 존재했다.  


만약 평생 한 회사만 다녀야 한다면 무슨 일을 하는 게 중요할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자기계발 정도에 들어갈 것 같다. 그보다는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평판을 좋게 만들어 조금이라도 편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게 더 중요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부장이 새로 들어온 사원에게 주는 업무에서 발생한다.  


방송사에서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첫 출근을 하니 회계부로 배치를 받았다. 이유는 내가 경제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란다. 슬프게도 경제학과에서는 회계 과목을 가르치지 않았다. 차변과 대변도 구분 못했던 나는 회사 자금을 출금하는 업무를 맡았고 때로 콜센터 직원처럼, 때로 은행 직원처럼 일했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났을 때 부장에게 업무를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부장은 ‘그 일을 2년은 해야 회사 내 평판이 좋아진다’라는 이유로 내 요청을 거절했다.  


아마 그 부장은 40년은 다닐 회사에서 2년 정도 한 가지 업무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줬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 전혀 상관없는 업무를 2년이나 하는 게 낭비라고 생각했다. 퇴직을 바라보며 평생 한 회사만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경험은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의 과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나와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할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욕심이고 이기심으로 보였다. 다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싫은 티를 곧잘 내는 나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그곳에서 몇 년을 더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섬을 탈출하려면 다른 섬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저 망망대해를 혼자 떠돌 힘은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 열심히 찾아봤다. 강의를 들으러 가고 책을 읽고 유튜브를 열심히 봤다. 하지만 곧 그들의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각자에게 맞는 길을 알아서 찾았고 스스로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한 회사에서 사원-과장-부장-국장-임원의 길을 가고 싶지 않다고 결정한 순간 내게 남은 선택은 별로 없었다. 지상파 방송사는 이직이 잦은 직장은 아니다. 일반 회사와 업무가 비슷하지도 않고 오랜 세월 쌓인 특수성이 강하다. 특히 경영 분야는 이직할 때 쉽게 경력이 인정되기 어렵다. 사실 이직의 사례를 찾기도 힘들다. 지금까지 쌓인 연차와 연봉을 모두 포기하고 새로운 직장에 신입으로 들어가서 비슷한 일을 하는 현실을 상상해보면 오히려 현재가 더 낫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승진도 이직도 새로운 입사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전혀 다른 생각이 튀어나왔다. 


아예 다른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그 공부가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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