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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n 25. 2018

전공의 경제학

과거는 묻지 마세요

“돈이 많나봐.”  


재취업도 어려운데 갑자기 유학을 가서 미술 전공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면 어김없이 돈 이야기가 나왔다. 안타깝지만 유학 비용은 딱 필요한 만큼만 모았고 회사는 막상 그만두고 나니 별로 미련이 남지 않았다. 물론 회사생활에는 장점이 있다. 정년보장, 연봉, 복지같이 눈에 보이는 혜택도 있지만 심리적 안정감이 컸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신분이 보장되고, 무슨 사고가 터져도 회사가 나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우물 안에 살고 싶지 않았다. 전공과 해왔던 일 때문에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이 있었다. 예전에는 순환 근무라는 업무 형태가 있어서 그나마 여러 가지 업무를 해볼 기회는 있었지만, 요즘에는 회사 내에서 한 분야에 오래 있었던 전문가를 더 높게 쳐주는 분위기다. 물론 오래 했기 때문에 더 일을 잘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새로운 사람이 그 일을 건드려 볼 기회를 차단하긴 쉬웠다.  


회사 밖은 각종 학문이 융합하고 신기술이 발전하고 상상도 못한 뉴스가 매일 터지는데, 회사 안은 새로운 의견을 말하는 것조차 힘든 분위기였다. 회사 밖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이직하거나 창업하는 등 도전하라는 얘기를 했다. 물론 대부분은 지금 있는 회사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야 한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경제학과를 나와서 왜 그림을 그리냐는 질문을 꽤 자주 받는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졸업 이후 무엇을 해도 그 질문을 받았다. ‘경제학과 나와서 왜 게임회사 왔어요?’ ‘경제학과 나왔는데 왜 계산은 못해요?’ ‘경제학과 나와서 왜 가방 만들어요?’ 등. 19살까지 학교 공부만 하다가 어찌어찌 휩쓸려 들어간 대학이 진짜 적성인 경우가 별로 없지 않냐고 반문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질문한다. “그럼 지금 하는 거 왜 해요?”  


마음속으로는 내가 평범한 커리어를 만들었다고 뿌듯해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경제학과 졸업생이 어느 순간 내 주변에서 사라졌다. 그러니 잦은 오해가 생겼다. 구구단으로 술 게임을 하거나 돈 계산을 해야 할 때마다 내 이름이 불렸다. 귀찮은 일이 많아지자 이중전공인 ‘언론학부’를 방패로 쓰기도 했다. ‘제 전공은 언론학이라 계산은 잘 못합니다.’ 그러자 축의금 봉투에 이름을 예쁘게 써야 하거나 ‘2015년 밝은 해가 떴습니다’로 시작하는 지루한 공지 글을 작성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내 전공에 쌓인 오해를 풀기 위해 이런 얘기를 자주 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젊은이를 붙잡아 ‘당신은 경제학과를 나왔거나 다니고 있거나 지원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열 명 중 한 명은 ‘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고. 경제학과를 나온 그 흔한 학생들은 세계 경제의 동향을 파악해서 당국의 금리 인상을 비판하기는커녕 환율 변동이 출산율과 어떻게 관련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안타깝지만 나는 계산기도 잘 쓰지 못한다. 곱하기와 뺄셈이 섞여 있는 수식의 괄호 부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라 작게 적어놓고 여러 번 계산해야 한다. 회계부에 있을 때 인터넷에서 계산기 매뉴얼을 찾아 읽었지만 부서를 바꾸자 뇌가 초기화됐다. 술자리에서 누군가 독일의 난민 정책과 세금 인하가 EU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물었을 때 솔직하게 계산기 이야기를 했다. 다들 내 유머가 재미있다며 빵 터졌다. 경제학자들은 원래 계산기를 안 쓰고 암산을 하기 때문에 사용법조차 모른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귀찮은 일이 많아진다고 내 전공을 속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묻기 전에 ‘저는 계산도 못하고 그래프를 싫어하고 독일의 난민 정책과 세금 인하가 EU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모릅니다’라고 선수를 치기도 곤란하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딴 얘기로 돌리는 게 최선이다. “경제학을 공부하긴 했어요. 그런데 어제 TV 보셨어요? 요즘 그 방송이 참 재미있다던데…”  


하지만 과연 회사에서 전공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끔 학교 선후배 술자리에 얼굴을 내밀 때나 기부금을 내라는 지로용지를 받아들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쓸데가 없다. 구구단 술 게임이나 돈 계산을 잘한다고 능력 있는 직원으로 인정받을 일도 없고 지루한 공지 글을 맛깔나게 쓴다고 갑자기 홍보팀으로 발령이 날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박차고 나오면 처음으로 경력과 전공의 관련성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학점 관리하느라 중간 기말고사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머리에 남아 있는 건 거의 없다.  


그나마 내 기억에 남은 개념은 경제학원론 첫 시간에 나오는 ‘매몰비용’이다. 1학년 1학기 술냄새 풍기는 교실에서 인간의 행복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교수님의 설명에 코웃음을 쳤던 그 순간 머릿속에 콕 박힌 단어다. 연애를 잘 하려면 지난 연애에 공들인 노력을 자꾸 생각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던 인기 많은 친구의 명언이 생각났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아무 의미가 없다.’  


매몰비용을 배운 이후 나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듯 이 개념을 여기저기 써먹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이 회사에 들어왔어도 그만둘 때 그 경쟁률을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과거는 더 묻지 않고 현재의 나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왜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회사를 그만두고, 직업을 바꾸고, 다른 전공 공부를 하는 이유가 구구절절 길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는 두 번의 퇴사 후 전공을 바꿔 유학을 떠나는 상황이 실패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내 선택의 이유를 다른 사람이 찾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이 “그거 왜 해요?”라고 물으면 답은 간단하다.  


“그냥 좋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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