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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n 11. 2018

퇴사합니다.

프롤로그


 

 저 회사 그만둘 거예요.


몇 번을 곱씹었던 문장인데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두 번째 사표였다. 서른 살 창창한 커리어 우먼의 삶은 나에게서 더 멀어졌다.  


폭풍 선언을 하고 쓰레기로 뒤덮인 책상으로 돌아왔는데 손이 계속 떨렸다. 정말 이게 맞는 걸까?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의심과 두려움이 마음을 뒤흔들었지만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메일함을 열었다. 딸깍. 퇴사를 준비하며 불안하고 고민 많았던 시간은 긴 스크래치를 남겼다. 그리고 마침내, 회사를 그만두며 느낀 고민의 무게보다 훨씬 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나는 기대했던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  


나는 어른들 말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회사’에서 일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던 평범한 아이였다. 공부한 만큼 성적이 잘 나오진 않았지만 운이 좋게 원하는 학교에 붙었고, 대학 시절 내내 말썽 피우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졸업하자마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게임 회사에서 1년 조금 넘게 일했고, 2012년에 신입 공채를 통해 방송사에 입사했다.  


왜 나는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을까. 사실 주어진 삶을 또박또박 걸어가듯 사는 건 나쁘지 않았다. 회사에 어렵게 들어오고 나니 인생의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 들었고, 좋은 사람도 많았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저축을 할 수 있었고 업무가 몸에 익기 시작하자 긴장은 조금씩 느슨해졌다. 집을 살 만큼은 되지 않아도 둘이 같이 돈을 벌면 생활이 어렵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결혼을 결심했고, 친구들과 가끔 근사한 곳에서 식사하며 즐거울 때도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과제를 해결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앞이 깜깜해졌다. 저만치 멀어져 있던 내 목소리를 되찾아야 했다. 아무 일 없는 듯 살다가 마음에 생긴 균열이 커지기 시작하자 나는 배부른 소리 한다고, 다들 힘들게 사는데 나만 꿈을 얘기하는 건 사치스럽다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려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걸 버려야 하는데, 나는 아직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쉬움과 후회가 눈처럼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저 버텼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이 자리에 계속 머문다면 10년 후 내가 지금의 나에게 뭐라고 할지 뻔했기 때문이다. ‘선택은 점점 더 어려워질 거야. 제발 용기를 내.’  


‘유학 가고 싶어.’ ‘그림도 그리고 디자인도 공부하고 싶어.’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에 특별하지도, 대단할 것도 없는 결심을 하고 나니 잔뜩 흐렸던 마음이 맑아졌다. 하지만 막상 유학을 가려는 결심만 굳혔을 뿐 나에게는 합격통지서도, 든든한 지원군도, 철저한 계획표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닦아놓은 길을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가 길을 만들어야 했다.  


서른 살, 낙엽이 우수수 쌓이는 계절에 나는 그렇게 다시 백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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