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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Kim May 12. 2017

감사의 기록.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시간.

놓치고 싶지 않은 오늘 지금 흐린 오후의 1분, 1초.

다음 주 월요일 그러니까 앞으로 세 번째 밤을 보내고 나면 시험이다.

실로 오랜만에 노란색 종이 연습장에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단어를 반복해서 써 내려가고, 슥삭슥삭 잘 써지는 샤프심과 볼펜의 그 마찰을 느끼며 희열이 오는 순간들을... 이렇게 만끽하게 될 줄이야.


한 달, 짧은 시간 동안 수강한 자격증 수업을 만만하게 봤는데 막상 시험을 보려고 하니, 외워야 할 것들이 수두룩 하다. 그럼에도 뭐가 그리 분주하다고, 백수에 점점 무거워지는 몸으로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데 이 핑계, 저 핑계로 책상에 딱 앉아 공부다운 공부를 한 지는 어언 오륙일 째.


그중, 최근 삼일은 매일 같은 자리로 출근도장을 찍으며 이 자리에서 그제보다, 어제보다 더 감사하고 좋은 시간들을 고백하며 충분히 누리고 있는 중이다.

첫째 날. 엄마에게 보낸 사진.

 시험이라는 제한이 없었다면, 이렇게 열심히 이 자리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이 자리가 허락된 많은 것들에 대한 감사함도 평생 알지 못하고 지나 보냈을 것을... 또 오랜만에 약간의 스트레스와 함께 다해 나가는 나의 열심에 보람도 선물로 받은 느낌이다.


둘째 날. 남편이 협찬해 준 노란색 쥬스. 그리고 저 자리에서 받은 니나선배의 퇴사소식을 알린 전화.

둘째 날, 이 자리에 다시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마음이 분주했다. 남편이 준 쿠폰과 함께 빨리 도착하고 싶었고, 그 공간을 더 충분히 누리기 위해 적당한 책이 있었음 하는 생각이 공존하며 시간을 아껴 종종걸음으로 도서관에 들러 어쩌면 내 누림의 허새를 더 완벽하게 구성해 줄 수필집 하나를 골랐다.


오후 2시 즈음 니나 선배에게 1년여 만에 전화가 왔다. 나의 구직장 사수였던 그녀. 오늘 7년 동안 매일 출근하던 그곳에서의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나와 집으로 간다고 한다.


시원, 섭섭하다.  이 말은 어쩜 누가 이렇게도 딱 알맞게 지었을까? 7년 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선배에게 딱 그 순간을 설명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한다. 고작 4년 다닌 나보다야 그 시원함과 섭섭함의 무게는 더 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 누가 몰라준다 해도, 그 순간만큼은 충분히 선배의 수고와 고충을 인정해 주고 싶었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전화를 끊고 책을 폈는데 마주친 문구들...


일터도 엄연히 내 마음을 내줄 수 있는 장소로서 존재한다.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에나 지옥도 있고 짠한 감동도 있다.
사람들끼리 미워하고 시기하며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딪히면서 자극받고 배우며 성장해나가기도 한다.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중-



지금 이 자리가 더욱 감사한 것은 정리를 시작한 지 1년이 넘어가는 나의 구직장의 퇴사로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서울 한복판 누구나 꿈꿀법한 그 동네 높은 빌딩 안, 넓은 내 자리. 아직도 그 자리를 떠올리면 턱! 하고 살짝 숨이 차 오르다가도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를 처음 부여받던 날 또한 나는 감사를 고백했었지... 그저 내가 너무 빨리 그 고백을 잊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다행스러운 결론을 내기까지 퇴사 후 나에게 걸리는 시간은 벌써 1년 하고도 한 달여 정도.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나의 부끄러움으로 인한 민망함과 찡그림보다는

그래도 좋은 시간들이었지... 하며 여유 있게 짓는 웃음이 빠른 시간 내에 찾아와 주길... :)


셋째 날. 미주에게 받은 기프티콘으로 삼일의 호사를 완성.

그리고 셋째 날. 조금 늦은 오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흐린 날씨지만 이 순간들을 완성해 준 모든 것들이 좋고 감. 사. 하. 다.


어쩌면 재시험에 응시하게 될 수도 있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는 행복한 가정을 한다면 지금 이 자리, 이렇게 약간의 부담으로 1분, 1초가 가는 것이 아까운 이 마음과 태도로 이 자리에 임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아 아쉬운 마음으로 기록을 시작했다.

만약 재시험을 본다고 해도 이 자리를 떠올리면 또 불행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도 ㅋㅋㅋ

그렇다면 이번 주일 오후 대림미술관에서 하는 나희경 콘서트 티켓을 예매해야겠다 라는 마음이

슬며시 드는 것도 ㅋㅋㅋ


지금 이 순간 나의 감사를 더욱 풍성하게 완성해 주는 조건들.


저기 오른쪽 빈자리가 바로 그 자리 ;)


삼일 동안 오랜 시간 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아이를 데리고 온 많은 엄마들을 보며, 지금의 나와 다른 상황들에 남일 같지 않은 저 자리들이 내 뒤를 뜀박질해서 쫓아오는 느낌에 설레거나 기대되기도 또 불안하기도 하다.


아직은 뱃속에서 조용한 나의 작은 딸과 함께

여유 있는 이 자리를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 또한 잘 활용해 봐야지.

온유도 좋은지 뱃속에서 꼬물꼬물, 간질간질

이 시간 잘도 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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