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racle monica Jun 22. 2024

90살에도 이상을 좇는다는 것, 김윤신 조각

김윤신 개인전 <Kim Yun Shin> 국제갤러리@사랑방손칼국수

그저 그런 보통 돌담이 아닌 어느 과거, 누군가의 온 힘과 시간이 담긴


살아 있다면 늦은 시기는 없습니다. If you are alive, it is never too late. 김윤신 (1935- )




 걷기 좋은 나날들입니다. 계절의 축복이란 이런 게 아니었나 싶은 정도로 코 끝을 스치는 공기의 감도에 내심 입꼬리가 올라가는 딱 적당한 날씨지요. 이런 날에 미술 나들이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무성한 이파리를 펼친 초록의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사실, 이번에도 종료가 임박한 전시이긴 합니다.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며 성큼성큼 갤러리로 향합니다.


 현업에 풀리지 않는 이슈들이 있어 심적 여유가 없던 한 주였습니다. 퇴근 시간이 아이들 픽업에 매여있는 워킹맘이다 보니 점심시간까지 회의에 매여 샌드위치, 김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기도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오늘만큼은 바깥공기를 쐬러 나갑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 폭발해 버릴 것 같았거든요.


 이번 탈출의 목적지는 동시대적인 글로벌 큐레이션을 유지하면서도, 한국 예술계의  중진 작가를 아우르는 폭넓은 작가층을 보유한 국제갤러리입니다. 소위 한국의 3대 화랑을 (ㄱㄴㄷ순으로)  가나아트, 국제갤러리, 현대화랑/갤러리 현대로 꼽는다고 한다면, 그중에 제가 제일 즐겨 찾는 갤러리이기도 하지요. 




 

 국제갤러리에 도착해 김윤신 조각가의 개인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윤신 작가는 한국의 1세대 여성 조각가로,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 활동을 60년 이상 지속해 왔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고대의 구조적, 영적 요소를 내포하며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나무를 재료로 한 조각을 필두로, 합치고 나뉘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 회화 작품도 여럿 포함하고 있어요.


 헤아릴 수 없는 울창한 예술 숲. 김윤신 작가의 작품을 대면할 때마다  단단하게 영근 크고 올곧은 나무의 실재 사이를 거니는 기분이 듭니다. 제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약 1년 전, 서울 시립 서울 미술관에서였는데요. 미술계 주요 소식을 전해 듣곤 하는 한  미술 평론가가 추천한 전시여서 자세한 내용은 찾아보지도 않은 채 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간 터였지요.


 기대가 컸던 만큼 전시를 보며 놀라운 마음도 컸습니다. 김윤신이라는 작가가 근 40여 년간 남미, 그것도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르헨티나에서 꾸준하게 활동해 온 여성 조각가인 사실도 작품을 실견하며 알게 되었거든요. 현재 구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현역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당연히 이름만 듣고 5060의 남성 작가일 것이라고 지례 판단한 저의 선입관에 대해서도 반성했어요.


 조각이란 매체는 자주 대중성과 대척점에 놓입니다. 상대적으로 2차원 회화는 주제에 집중해 보통은 캔버스와 물감으로 표현해 내고, 탄탄한 시장의 수요가 보장되어 있기도 하죠. 이에 비해 조각은 재료/도구/제작/보관/운송의 모든 과정에 시공간의 제약이 더 들고, 심지어 시장의 관심도가 낮은 것도 사실이죠. 악기로 치면 하프와 피아노/바이올린 같다고 해야 할까요.


 지구 반대편 남미로 본거지를 옮겨 활동한 이력도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한국 주류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작가는 83년 상명대 교수 시절 아르헨티나 여행을 갔다가 광활한 대지와 풍부한 조각 소재에 매료되는데요. 결국 50세가 되는 이듬해부터 줄곧, 평탄한 삶이 보장된 본거지 한국을 떠나 완전한 타지 아르헨티나에서 40여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올곧은 조각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그 이후 작가는 나무와 돌과 같은 아르헨티나의 자연 일부를 재료 삼아 그 원초성을 자신의 예술에 담아내려는 지난한 시도를 지속합니다. 조각은 물성에서 시작해 개념과 형상을 담는 작업이니만큼 탁월한 재료뿐 아니라 그 재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의 숙련도도 무척 중요한 것이죠. 재료에서 시작된 그녀의 예술은 숙련을 통해 진득해집니다.


 김윤신 작가는 아르헨티나의 거칠고 혹독한 자연 속 생존을 위해 더 단단해진 심재와 변재를 지닌 팔로산토나 알가로보 목재, 오닉스와 같은 준보석을 자르고, 다듬고, 붙여내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이 들고, 그 에너지가 치열했을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작품에서 그 깊은 손 맛이 느껴지는 듯했어요.

 

 작가의 예술 철학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그것은 바로 '합이합일 분이분일'입니다. ‘합’과 ‘분’은 우주의 근본으로 동양의 음양사상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둘이 만나 관계를 맺어 하나가 되며, 그 합이 다시 둘로 나뉘어 각각 또 다른 하나가 되는 개념인 거죠. 작가가 재료와 맺는 관계, 하나이자 또 다른 둘이 공존하는 그 세계는 비로소 다시 전시 공간에서 관객과 만나 새로운 결의 의미로 나누어지고요.

 

 한국과 아르헨티나, 돌과 나무, 조각과 회화 사이를 연결하며. 자르고 붙이고, 쌓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김윤신의 세계는 그래서 더 살아 숨 쉬는 듯하고, 단단하며 고양된 아우라를 자아내는 듯했어요. 조각의 문양, 무심하게 쌓인 나무 조각의 형상을 눈으로 훑으며 작가가 몰두해 온 시간, 그리고 그녀가 40여 년 넘도록 표현하고 싶었던 그 손 끝 예술적 이상도 가늠해 봅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여전히 공간을 채우는 강렬한 기운을 얻을 수 있어 참 좋았어요. 아르헨티나의 원시 자연을 옮겨 놓은 듯 작품을 지켜보고 또 지켜보고, 그 사이를 거닐며 그 에너지의 주파수에 공명하는 호사를 자주 누리고 싶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장승같기도 하고, 소원을 빌기 위해 쌓아 올린 돌멩이 같기도 한 물아일체의 이 정직한 조각들을 여러분도 꼭 한번 만나보기를 희망합니다.


90살 너머 100살까지.

몰두하고 싶은 내 일을 향해 기원하는 작가의 손과 마음은 오늘도, 내일도 쉬이 지칠 것 같지 않습니다. 누군가 애씀이 퇴적된 결을 만나는 순간을 더 많이 만들고 싶습니다. 우주의 온 기운을 끌어모아 새로운 재료를 만나고, 작업 세계의 확장을 이뤄낸 김윤신 작가처럼 작고 소중한 내 세계의 성장과 확장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보면서요. 










켜켜이 지나온 시간의 흔적이 쌓인 사랑방손칼국수의 전경
따끈한 삶은 계란이 1알에 500원/ 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작가 정신이 숨 쉬는 조각들이 주는 찐한 감동을 뒤로하고 조금 걸어 청와대 근처까지 슬렁슬렁 걸어가 봅니다. 91년부터 지켜온 약 33년 전통의 손칼국수 집입니다. 직접 손으로 빚어낸 밀가루 반죽에 칼칼하고 시큼한 고추 양념을 더해 먹는 맛이 일품입니다. 쫀득쫀득, 찰 진 밀가루의 맛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뜨끈한 멸치국물의 칼국수가 참 맛있었네요.

 

 사랑방 손칼국수라는 점포 이름만큼이나 정겨운 분위기와 인테리어, 메뉴 구성을 가지고 있는 노포입니다. 선반을 가득 채운 피겨들에서 주인의 취향도 엿볼 수 있고요. 무엇보다 이 집에서의 정겨운 구석은 바로 삶은 계란입니다. 점심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다 팔려서 먹기 힘들 정도라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했네요. 익숙하고 흔한 계란도 밖에 나와 먹으면 더 꿀맛인걸요.







 언제나 담백하고, 솔직한 것에 이끌립니다. 조각과 칼국수. 모두 손을 써서 행하는 인간의 노동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나무의 숨소리를 들으며 내 이상을 조각해내는 일, 밀가루를 치대고 반죽해 최적의 찰기를 가진 면을 만들어내는 일.그리고  지친 와중에서도 기어코 전시를 보려 지속하는 힘, 다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도 단 한 자라도 쓰기를 시작하는 힘.


 붙들고 늘어져도,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용기와 위안을 얻는 산책이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재료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빚어내어야 할지 영감을 받기도 했고요. 무언가 덤비고 싶은 게 있을 때, 용기를 내어 한 걸음 실행해 보겠다는 의지도 다졌습니다 .


 솔직하게는 바쁜 일상에서 글쓰기에 조금 힘이 부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을까요? 다시 한 자, 한 자라도 꾸준히 써 내려가며 더 자주 찾아올게요 :) 좋은 전시는 끝나기 전에 더 많이 공유하고, 같이 나눠보고 싶으니까요! 그럼 또 만나요. (제발)




나는 사전에 어떤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조각을 시작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것은 그저 조각할 나무를 바라보는 것이다. 며칠을 두고 바라보며 나무라는 존재, 그 생김새, 나무의 껍질과 속살의 차이, 나무의 결, 그리고 나무가 진통하는 소리를 듣거나 혹은 향기까지 느끼려 시도한다. 김윤신



김윤신 작가의 아르헨티나 작업실/ 작업모습


☆☆☆☆☆


⭐️See





⭐️Eat

사랑방손칼국수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24길 41-42 (효자동)

https://kko.to/0L-PzZJSF7







<The Conservatory>, 1985, David Bates (American, 1952) https://www.metmuseum.org





매거진의 이전글 온전한 삶을 향하여, 최종태조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