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산, 강, 바다 등의 이름이 지어지기 전의 자연, 그 날 것 그대로의 우주는 여전히 내 일상 곳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내 오감과 감성을 거쳐 탁본을 매개로 내가 목격한 우주를 화면에 펼쳐 보인다.
한영섭 (1941~ )
무작위로 흐르기만 하는 줄 알았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의미가 더 깊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 코가 석자라며, 내 처지와 안위만 신경 쓰며 날 세워 살았던 시간들도 있었고요. 두 생명을 낳아기르는 일상 속, 자주 아이들의 지금과 그때의 내가 교차되는 찐하고 짠한 순간들을 자주 만납니다.
원치 않아도 자주 과거를 반추하게 하고, 일의 맥락을 곱씹게 되는 순간들 사이에 그때의 저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 땐 그랬지, 지금보다 한참 더 소심했고, 치졸했지라고 이제는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조금은 생긴 듯하네요. 그나저나 그 덕분에 아이들의 잘못이나 실수도 너그럽게 용인할 수 있는 여유가 더 생기면 참 좋을 텐데요.
오늘의 행선지는 정동길입니다. 약 130여 년 전 서구의 입김이 치열했던 그 길을 헤매며 근대의 조선을, 제국이 되고 싶었던 구 대한민국의 마음을 어렴풋이 떠올려 보곤 합니다. 러시아, 미국을 포함 당시 서구 열강들의 공관터,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과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의 신식 학교 자리와 건물 일부, 최초의 개신교회였던 정동제일교회 등을 만날 수 있어요.
최영섭 작가의 전시가 열렸던 두손갤러리 역시 이러한 역사적인 길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갤러리가 구세군 중앙회관 1층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1908년에 한국에 구세군이 들어온 이후 1928년에 준공되어 선교를 위한 사관학교로 사용되었던 건물입니다. 전면의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박공지붕에 양식적인 4개의 돌기둥, 세로로 긴 창과 벽돌 외장이 한눈에 봐도 남다름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갤러리가 위치하고 있는 구세군 중앙회관의 남다른 위용
장소가 열리는 갤러리의 아우라와 작품의 결이 잘 맞았던 한영섭의 전시, 무한한 관계Infinite Relation
갤러리에 놓인 말린 나무줄기들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작업의 대상과 작품이 어우러진 형상
한영섭 작가는 전통 한지에 탁본* 기법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흔적을 작품에 담아냅니다.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 사물의 본질을 한지의 질감과 물성으로 표현하며, 이를 통해 시간 속에 남겨진 흔적을 재현하는데요. 그의 예술론은 전통적인 소재와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고유한 미감과 시간성,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의 질감이 어린 역사적인 갤러리 공간 속 한지 작품들을 두루 살펴보며 그 어울림의 분위기를 한 껏 음미해 봅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거닐며, 목조 천장 아래에 놓인 탁본 작품들 속작가가 자연에서 얻은 돌멩이, 말린 들깨줄기, 나뭇잎, 옥수숫대 등의 오브제들이 투명한 빛이 새어든 한지 위로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어요.
삶에 대한 묵직한 시선이 담긴 담백한 밥 같은 작품에 언제나 마음이 쓰이는 편입니다. 새로운상상의 시선이 담기거나, 기발한 기법과 원색으로 치장한 달콤짜릿한 디저트 류의 작품들도 좋지만 물리지 않는 은은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한영섭 작가의 회화는 자연물을 재료로, 나무에 가까운 한지라는 바탕 위에 탁본이라는 기법을 취하는 물성이 단순하지만 명료해서 더 저와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작품들의 다수는 <관계 Relation>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예술가의 개입을 드러내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보다는, 주체가 관계를 맺는 자연을 은은하게 정제하여 표현한 분위기가 강했지요. 그런 연유로 작가는 '관계 Relation'이라는이름을 고른 듯 합니다. 흔한 나무줄기 하나가 작가와 관계를 맺으며, 캔버스 아닌, 자연에 가까운 종이 재료인 한지 위에 새로운 형상으로 탁본을 통해 드러나는 새로운 의미적 순간에 집중한 거죠.
*탁본
탁본은 사물 위에 물을 먹인 한지를 덮고 먹물을 묻힌 좁쌀 방망이로 두들겨서 표면의 결을 종이 위에 드러내는 방법입니다.닥나무 껍질을 두들기고 펴서 만드는 한지는 표면이 부드럽고 따스한 질감을 가지는데 반해 내구성이 뛰어나고 질기며, 통기성이 좋아 습도와 온도변화에 강해 오랜 시간 보존이 가능하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지요.
<관계(Relation)>, Hanji, Takbon, Korean Ink, 48x80.5cm, 2005
"나는 한지라는 소재와 탁본이라는 기법을 통해
우리가 보는 자연과 우리가 품고 살아가는
철학을 표현하고자 했다."
기억에 남는 작품은 1977년의 <관계(Relation)>입니다. 가로, 세로 55.5cm의 정사각형의 두터운 나무 프레임 안에 실제 나무의 결이 진짜 나무인가 싶은 유쾌한혼동을 일으키는 탁본 작품입니다. 예술가의 자아와 주변의 환경, 작품의 재료가 된 자연, 그리고 예술의 경계가 모두 사라져 혼연일체가 된 듯한 느낌도 듭니다. 얼핏 보면 그저 툭 하고 나무토막을 가져다 놓은 듯한 느낌까지 있으니까요.
1941년생인 한영섭 작가가 해당 작품을 제작했을 시기는 37살쯤 되었던 것 같아요. 한창 전성기에 저렇게 힘을 툭 하고 뺀 듯한 작품을 낸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탁본을 매체로 한 구상에 근거하면서도 지극히 추상적인 작품 경향이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작가의 모든 카탈로그 레조네*를 꼼꼼하게 검토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
카탈로그 레조네는 특정 예술가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학술 목록으로, 작가가 생애 동안 제작한 모든 작품을 포함하려는 목적을 가져요. 이 목록에는 작품의 제목, 제작 시기, 기법, 소유 기록, 전시 내역 등 상세한 정보가 담깁니다.
<4 관계(Relation)>, Hanji, Takbon, Korean Ink, 55.5x55.5cm, 1977
시원담박 칼칼한 국물의 맛, 광화문집 김치찌개
좋은 재료를 찾고, 그 관계 속 어울림을 빚어내는 깊이는 예술의 영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전시를 본 후 주린 배를 채우고자 광화문 역 뒷골목으로 향합니다. 유리 외장으로 반짝거리며 최신임을 우뚝 드러내는 5성급 포시즌스 호텔 건물 뒤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낮은 지붕 노포들의 분위기가 매우 대조적입니다. 구수한(?) 맛이 당겨 김치찌개로 유명한 노포 광화문 집을 찾았어요.
40여 년간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지켜온김치찌개와 엄마 집밥 느낌의 투박한 계란말이가 필수입니다. 달그락달그락 조리 과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부엌과 손님들이 밥을 먹는 공간이 손바닥만큼 좁은 공간 안에 모여 있어요. 5팀 정도 앉을 수 있는 복닥한 1층에 자리를 잡고, 보글보글 바로 끓여낸 시큼하고 깊은 김치와 찌개의 맛을 후루룩 음미할 수 있었어요.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좌식의 2층 공간도 숨겨져 있지요.)
다른 획기적인 황금 레시피의 김치찌개와 계란말이가 있다 해도, 광화문집의 백미는 언제나 변치 않고, 그 맛과 차림의 원형을 오래 쌓아 올린 한결같음에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누추하고, 설령 대단한 맛의 비법이 있지 않다 할지라도 40여 간 이 집에 관계한 사람들의 맛에 대한 기억,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쏟아낸 낭만적인(?)이야기들, 함께 나눴던 뜨끈한 온기까지 모두 이 집의 깊이이자 맛이고, 유일무이한 생동력이니까요.
기본에 충실할 것. 뻔하기는 하지만 기본에 충실한 태도를 갖춘 예술이, 식당이 언제 어디서나 오래 꾸준히 살아남는 것 같습니다.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오래된 장소나 사물에는 어떤 온전한 기운이나 정신이 차곡차곡 쌓여있기에 강력한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그 존재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는 것 같기도 해요. 사람 사는 일도 그런 듯 싶습니다. 그래서 더 잘 깊게 살아내고 싶다는 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기본에 최선을 다하려고요.
특히나 워킹맘으로 이런 꾸준함의 중요성을 더 실감합니다. 매 순간 저글링 하며 존버하는 엄마이지만, 아이들의 하루 타임라인에 잘 숙성된 전통 장 같은 삶의 철학들을 차곡차곡 쌓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크거든요. 큰 욕심내지 않고, 함께 하는 매 순간이 쉬이 바래지고 잊히지 않도록 소박한 일상을 더 단단하게 매만지고 기록할 것을, 우리다움에 더 충실한 시간들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또 희망해 봅니다.
덧) 이번 포스팅은 무려 7월 말에 종료된 전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좋은 전시를 일찍 가서 보고, 빠르게 리뷰해서 정기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될 날도 언젠간(?) 오겠죠? 매번 진즉에 종료된 전시의 리뷰를 적어 내려갈 때마다 괜히 혼자 뜨끔뜨끔하네요. 더 부지런해져 볼게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