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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Jul 08. 2018

우리는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헤어져야 할 순간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돌멩이 구르는 흙 길에서 까끌거리는 먼지를 마시며 들었던 생각. 비바람 몰아치던 날 성난 해변을 걸으며 두려움을 뚫고 떠오르던 생각. 뜨거운 연탄처럼 빨간 열기로 덮인 까만 아스팔트 핀 노란 꽃 곁을 떠나지 못했던 기억.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 해를 보다 눈물이 날 뻔했던 순간.

 

그것들에 대해 말하자 그녀는 알겠다는 듯 웃음 지었다. 우리 대화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고 내가 말하는 것이 그녀 생각이었다. 우리 이야기는 멋진 풍경이나 특이한 경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단 여행 중에 떠올랐던 감정에 대한 것이었다.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을 너무 평범해서 열심히 이야기한들 공감할 수 없을 것들. 그러나 우리에게는 특별했다. 흩어진 조각을 맞추어 그림을 완성하듯 감정들이 모아져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 대화는 길을 걷는 내내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직 알 수 있는 건 그녀는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잊을 수 없어 여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멋지고 신기한 풍경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아닌, 아주 짧은 시간 스치듯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느낌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어딘가로 떠나는 이유도 여행이 끝나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모습보단, 가볍게 여겨져 하찮아했을 작은 장면들과 감정이 생각나고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나무늘보 몸짓처럼 느리고 지루해 보였지만 내면은 치열했고 그래서 오래도록 의미 있었을 것들이었다.


그녀와 내가 걷는 길에는 작고 앙증맞은 들꽃과,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 뜨거운 공기를 뚫고 불어오는 싱그러운 숲의 바람이 있었다. 우리는 여행에서 느낀 감정을 이야기하고 공감했다. 공감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바다가 보일 즈음. 우리는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두 개의 정류장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그녀와 내가 헤어져야 할 곳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을 만나게 되어 좋은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며, 여행의 감정들을 공감받고 공감했던 것을 잊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녀도 마음속에만 담아 두어 희미해져 가던 감정들을 이야기할 수 있어 즐거웠다고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사람들은 여행을 열망한다. 하나의 장면을 보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짐을 꾸려 떠난다. 그러나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멋진 영화 시나리오처럼 극적인 감동을 만들어 보려 해도 막연할 뿐, 정해진 것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계획할 수도 예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막연한 불규칙은 뜻밖의 감동을 가져다준다. 그녀와 나처럼 주목받지 못할 여행의 감정에 대해 속속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여행에서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을 공감하는 것은 빙하를 뚫고 거대한 물줄기로 떨어지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폭포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녀와 나는 길을 사이에 두고 정거장에 서있었다. 그녀는 바다를 등지고 나는 바다를 보며 버스를 기다렸다. 수평선에서는 해가 성큼성큼 붉은빛을 만들 때, 나는 그녀에게 뒤를 보라고 손짓했다. 그녀와 나는 노을을 보았다. 그 순간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소리 내어 말한다면 그녀도 금세 의미를 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았다. 노을이 더욱 크고 붉게 빛을 뿜어댔다. 해가 그녀와 나에게 떠오르는 감정을 말해보라 재촉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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