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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Dec 06. 2019

수고로운 삶을 살아낸 12월의 당신에게

목이 늘어난 편안한 옷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나는 역을 향해 걸었다.

누군가를 만나보라는 전화를 받았다. 망설이다 만나겠다고 했다. 약속 장소까지는 차로 세 시간을 가야 했다. 왕복 여섯 시간을 운전에 집중한다는 것은 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여행을 한다 생각하고 기차표를 예매했다. 약속 날에는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운동화와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갈 수는 없었다. 옷을 차려입고 맨 팩을 메고 역으로 향했다. 코트가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구두는 딱딱해서 뒤꿈치가 아파 가뿐히 걸을 수 없었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다.


차창 밖 늦은 가을이었다. 울긋불긋했던 축제가 끝난 가을은 쓸쓸해 보였다. 힘을 잃은 모습 휑한 벌판에 홀로 서있는 허수아비의 늘어진 옷소매 같았다. 가을에게 위로의 눈빛을 보냈지만, 힘을 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을이 기운을 낸다 해도 어제의 가을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곧 눈이 내리고 낙엽이 눈에 덮이면 가을은 사라질 것이다.   


기차에서 내려 도착한 도시는 낯설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있었다. 역 마주한 광장처럼 너른 길에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이것저것을 구경하다 이름이 특이한 카페에 들어갔다. 잔잔한 어쿠스틱 팝이 흐르는 카페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생 커플뿐이었다.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 코트를 벗었다. 솜이불을 두른 것처럼 비둔하던 몸이 가벼다. 한가 몸, 훈훈한 온도, 맛있는 커피와 낯선 공기. 모든 것이 글쓰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패드를 켜고 글을 썼다. 글의 전개가 잘 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감정의 흐름 끊지 않려 하며 글을 썼다. 숨어있던 마음을 꺼내어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모르던 내 마음을 만날 수 있어서이다. 그 마음 중에는 후미지고 어두운 곳에 숨어있는 음울한 마음도 있다. 내면 안 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의 힘을 빌어 나오는 마음. 은 그 마음에 불을 밝힌다. 한 자 한 자 글 채우며 반성하고 그릇된 마음들 지워다. 계속 머무르고 싶었다. 그러나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약속시간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정시에 도착한 상대의 첫 질문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였다. 당황스럽지 않았다. 지금의 나이가 되도록 내가 혼자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질문이었다. 일부러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몇 개의 대답도 있다. 세상에는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번 때를 놓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거나, 마음 맞는 사람을 못 만났다거나, 일에 묻혀 살다 보니 세월 가는 줄 몰랐다거나. 그러나 사실 나도 이유를 모른다. 비혼 주의자처럼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모른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너무 성의 없어 보일 것 같았다. 정해져 있는 대답 중 하나를 말했다. 어지기 전까지 우리의 대화는 기 없어 없이 끊기는 국수 가락 같았다.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갈 기차 시간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다시 글을 쓰던 카페로 갔다. 카페에는 여전히 젊은 커플이 같은 자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도 전과 똑같은 자리에 치즈가 잔뜩 들어간 토스트와 차를 주문하고 코트를 벗었다. 가벼운 몸으로 패드를 켜고 머릿속에 맴돌던 글을 쓰고 고쳤다. 글을 쓰며 내가 이 도시에 온 이유를 생각했다. 누군가를 만나보라며 전화가 왔을 때 그러겠다고 했던 나는 무언가 궁금했던 것 같다. 집에서 멀리 떠난다면 어제의 가을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러나 나의 생각은 터무니없고 무모다. 기차에서 가을에게 힘을 내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 때, 나는 알 있었다. 가을은 쉬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결심했다. 가을을 보내야 하겠다고.


카페에서 나왔을 때 도시는 밤이 되어 있었다. 역까지 이어진 거리에는 주마등 같은 빛들이 허공에 매달려 빛나고 있었다. 바람 불었다. 의 바람과 달리 람에 겨울이 묻어 있다. 깃을 여미고 단추를 채워 어색하고 몸에 맞지 않아 거추장스러워하던 코트에 몸을 의지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슬픈 냄새가 났다. 가을과 겨울이 섞인 냄새. 12월이 고 있다는 신호였다.


우리의 삶은 늘 꼬리를 바싹 곧추세워 경계하는 고양이 같다. 꿈을 이루어야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고 실패하지 말아야 하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별로 없다. 잠시 쉬고 싶지만 마음은 날 선 고양이 등처럼 꼿꼿하다. 하지만 끝도 모른 체 달리기만 할 수는 없다. 밥 한번 먹자, 차 한잔 마시자 하며 공수표처럼 남발하던 약속들이 12월의 마지막 인사 속에 묻혀도, 그 속들의 안부가 마음에 걸려도, 너무 허무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약속을 하던 날.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역까지 이어진 밤은 아름다웠다. 벼룩시장, 낯선 카페, 글쓰기, 처음 보는 사람과의 어색한 대화. 그것들이 있던 도시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빛의 터널 속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수고스러웠던 한해를 마칠 12월을 맞이하는 사람들이었다. 한해의 끝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실패를 했어도,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아도, 삶을 살았다는 것은 그것 만으로도 수고스러운 것이다. 말하고 싶다. 12월이 되면 캣 타워에서 편히 쉬는 몸이 늘어진 고양이처럼 긴장을 놓으라고. 멋진 옷을 입고 반짝이는 신을 신고 폼나는 가방을 메고 애써 입 꼬리를 올려 웃으며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는 몸에 걸쳤던 빈 껍데기들을 벗어던지고 목 늘어난 후줄근한 티셔츠와 무릎이 나온 헐렁한 바지를 입는 것처럼. 12월은 한해의 집 같은 것이다. 지긋지긋해 버려야 한다고 생각지만 결국은 버리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옷이 있는 나의 집처럼.


기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역이 가까워질수록 도시는 멀어지고 있었다. 작아지는 빛들 더욱 빛났다. 그 빛들을 뒤로 목이 늘어난 안한 옷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나는 역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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