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왔다. 예전 직장 동료였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적었지만 친구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그는 늘 상대를 존중했다. 그에게 말을 놓는 다면 그가 건네는 존중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늘 묵묵했다. 함께하던 일이 끝나가도 긴장을 풀거나 호들갑스럽게 들떠하지 않았다. 그는 늘 처음처럼 일했다. 일이 끝나면 며칠이 지나서야 “이젠 끝인가 보군요.”라고 했다. 전화 너머로 그에게 하는 일은 잘 되냐고 물었다. 그는 "그냥 하는 거죠 뭐"라고 했다. 이도 저도 아닌 대답 같지만 그의 마음을 아는 나는 “여전하군요”라고 했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11월 같은 사람이었다.
11월 달력을 보았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서른 개의 날들이 평일과 주말에 정직하게 채워져 있었다. 분주한 연말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11월은 무미건조하고 지루하다. 그러나 11월은 덤덤하다. 언제나 그렇듯 계절의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12월에 건네줄 채비를 한다. 세상은 쉼 없이 변한다. 늘 앞서가야 하고 새로운 것은 빨리 손에 쥐어야 한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겨울이 올 즈음이면 사람들은 어서 빨리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기 원하고 새해의 종이 울리길 바란다. 11월은 그들에게 잠시 쉬어갈 한해의 마지막 한숨이 되어준다. 사람들에게는 만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자신은 추운 계절을 준비한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그냥 하는 거죠 뭐.”라고 하는 예전 회사 동료처럼.
11월의 가을을 좋아한다. 영화 때문이다. 어느 해 11월. 길을 걸으며 떨어진 낙엽을 바라보다 측은히 한해의 나를 생각했었다. 결론을 알 수 없을 질문을 되뇌다 어둠이 밀려오면 따뜻함을 찾아 회귀본능 하듯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면 옷깃에 묻어온 가을이 집의 훈훈함에 깊게 익어갔다.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어둡던 날에는 가을이 가득한 방에서 영화 '만추'를 보았다. 영화를 보고 깊어진 가을의 사랑은 하루의 사랑이라도 다른 계절을 합친 사랑보다 더 진하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늦은 가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영원할 것 같아서였다.
며칠 동안 가을비가 내렸다. 비는 장맛비처럼 요란하지도 겨울비처럼 당장 얼어버릴 냉기가 가득하지도 않았다. 한해의 마지막은 12월의 몫이지만 한해의 마지막 가을비는 11월의 몫이 될 것이다. 비가 그치면 거리에 가득했던 푸석함이 비와 섞여 이전보다 더욱 짙게 가을 냄새가 날 것이다. 비에 젖은 낙엽들도 거리에 깔려 가을을 보내기 위한 양탄자가 되어 12월로 향하는 길을 만들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고 그 길을 걸어 12월로 향하겠지. 그러면 나는 그 길을 걷지 않고, 대신 그 길에 서서 다음 가을을 기약할 것이다. 만추의 계절에 다시 만나자던 영화 속 남녀의 약속처럼 어렴풋한 약속이라도 희망이 된다면 좋을 테니. 그날이 11월 어느 가을이라면 더욱 행복할 테니.
11월의 당신께 묻습니다. 미움만 가득 남기고 떠난 사람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지. 어느 가을 작별 인사 없이 찾아갈 수 없을 먼 곳으로 가버린 그대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는지. 꺼칠해진 자신의 손을 애써 숨기며 쭈글거리는 노모의 손에 손 크림을 정성스레 발라 어루만져 주는지. 가을에 만나 가을에 이별하고 가을에 재회하는 연인들의 영화를 보다 슬그머니 떨어진 눈물에 말라버린 슬픔과 기쁨이 찾아온 것을 알고 다시 눈물 흘리는지. 무수히 포기해야만 했던 한해의 시간들에게 잘 가라는 이별의 인사를 준비하고 있는지.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11월이 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해가 짧아질수록 찬란히 결심했던 한해의 다짐도 연말이 오고 새해가 온다는 이유로 점점 포기당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미 정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11월의 가을 때문입니다. 저무는 가을이 나를 돌아보게 하고 마음을 붙잡기 때문입니다.
11월의 당신께 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깊고 고요하고 묵묵한 11월의 가을처럼 사랑하면 좋겠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낸 오늘의 낮과 밤이 아름답다면, 깊어가는 11월의 가을이 당신과 당신의 그대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사랑하는 이가 없어 외롭다면 당신은 11월 가을 같은 사람이어서 괜찮다고. 만추의 계절은 아름다우니 곧 사라질지라도 내년을 기약하며 11월의 가을을 잊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그때까지 애쓰며 잘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