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거리는 태양. 바싹 마른땅. 앙상한 나무.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 거리낌 없이 보이는 지평선. 쉴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 그곳을 걷는 이에게 잠시 쉬어갈 그늘이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구세주다. 몸 한 부분이라도 뜨거운 볕을 피할 수 있다면 초라한 그늘이어도 고맙기만 하다.
살갗을 파고드는 볕과 외로움에 지친 이는 작은 그늘에서 몸을 추스른다. 그늘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늘은 포기를 잊게 한다. 지평선 끝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힘이 들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걷기 위해 힘을 낸다. 그늘 덕분이다. 그늘은 그에게 희망을 주었다.
지친 이가 볕을 피해 쉬어가듯마음에도 기대어 갈 수 있는 그늘이 있다. 그늘은 살다 보니 자신의 노력으로는 더는 어찌할 수 없을 때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막막할 때 마지막으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같은 것이다. 아빠, 엄마, 아내, 남편, 아이들, 가족, 친구.평소에는 무심했지만 절망이 가로막는 순간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사람들. 아픈 마음에 그늘을 드리워얽히고설킨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
그늘은 사랑에도 해당된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그늘이 되어주는 것. 의심도보상도조건도 없이 바늘처럼 따가운 빛과 매서운 바람을 견뎌 사랑하는 이를 지켜 주는 것. 자신의 등으로 묵묵히 그늘을 드리워 사랑하는 이를 아프지 않게 해주는 것. 대가도 바람도 없이 사랑함으로당연히 지켜주는 것.
그늘은 소리소문 없이 드리운다. 소란스럽지않고잔잔하다. 그렇지만 여운은 강하다. 사랑이 끝난 이에게 가장 슬픈 것은 자신에게 드리웠던 그늘이사라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만큼 미움이 되어버린 사람이라 해도 그가 그늘이 되어주었던 적이 있다면 완벽한 미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가 나의 그늘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나의 마음이 회한이 될 것이다. 내 곁에 있는 동안만큼은 내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내 곁에 있어주었던 그가 드리웠던 그늘을.
아버지 기일.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허전해 보였다. 아버지의 부재에 가족들은 겉으로는 씩씩해 보였지만 내면은 황량한 세상에 홀로 남은 아이처럼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나도 그랬다. 아버지께 미안했다. 바람막이처럼 그늘을 드리워 주시던 당신께소홀했다는 것이.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당신의 그늘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했는지.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그늘이 되어준다는 것을 모르는 때가 많다. 고마웠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늘이 사라지고 나서다. 그러니 힘든 순간 내 편이 되어 나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있다면 그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가 존재하는 동안 그가 주는 그늘을 고마워해야 한다. 너무 가깝고 너무 익숙하고 너무 만만하고 친근하여 소홀해질 것 같다면그가 나의 그늘이 되어주었던 날들을 떠올려 경이로운 눈으로 그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눈을 마음에 담아 오래오래 지켜내야 한다. 그래야만나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그늘이 영영 떠나고 나면몸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공허하고 막막할 테지만,나에게 드리웠던 그늘을 감사해하며 나는 또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