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업무 시간에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낮에 오는 전화라 단순한 상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목소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지인이었다. 세무 쪽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가끔 밥을 먹고,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형, 부탁이 하나 있어."
"말해봐."
"큰돈을 해외로 보내야 해. 도와줄 수 있어?"
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큰돈.
구체적인 금액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의 무게가 달랐다. 작은 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게... 좀 복잡해."
복잡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수수료는 넉넉하게 드릴게. 성공액수의 10% 현금으로."
현금이라는 단어는 세무 쪽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다. 영수증이 없다는 것. 기록이 없다는 것. 출처를 묻지 말라는 것.
나는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흔들렸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었다.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흔들렸다. 23년 동안 국세청에서 일했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했다. 표창을 받았고, 승진을 했고, 성실하게 살았다. 그리고 퇴직금으로 받은 게 1억 남짓이었다. 23년을 일한 사람이 손에 쥔 숫자였다.
그런데 전화 한 통으로 그보다 몇 배 많은 돈이 현금으로 온다고 했다.
흔들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계산이 시작됐다. 나도 모르게. 어떻게 하면 가능할지. 어떤 방식이 있는지. 계산이 생각보다 빨리 됐다.
그게 더 무서웠다.
나는 계산을 멈췄다.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현금이야. 출처는 묻지 마. 수수료도 현금으로 줄게. 그것도 두둑하게."
나는 잠깐 멈췄다.
이 일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다는 것. 중간에 누군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도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출처를 묻지 말 것. 기록을 남기지 말 것. 현금으로만 움직일 것.
이건 절세가 아니었다. 회색지대도 아니었다. 이건 명백히 선 너머였다.
세금을 신고하고 실제로 납부하면서 그 금액을 줄이는 것과, 아예 기록 자체를 없애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전자는 내가 하는 일이었다. 후자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김재원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전화가 왔다.
'이게 우연인 걸까?'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건 아닌가.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걸 근거로 나를 잡으려는 건 아닌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답이었다.
"못해."
"형, 수수료가 얼마인지 들어봐. 현금으로."
"알아."
"한 번 만이야. 아무도 몰라."
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한 번 만이야. 아무도 몰라. 내가 조사관일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적발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었다. 처음엔 한 번이었다고.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고.
"못해."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한참 수화기를 봤다.
수수료가 아까웠다. 솔직히 말하면 그랬다. 23년 퇴직금보다 많은 돈이 전화 한 통으로 왔다가 전화 한 통으로 갔다. 그게 아깝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거절한 건 도덕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금을 아예 안 내고 기록 자체를 없애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세금 신고를 하고, 실제 세금을 내면서, 그 금액을 법이 정한 테두리 내에서 줄이는 일을 한다. 그 선이 내가 지키는 선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려면 강민준을 끝까지 도울 수 없다는 것. 회색지대에서 일하는 사람은 선을 지켜야 한다. 선을 한 번 넘으면 다시는 회색지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검정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것이다.
나는 검정 쪽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나는 책상 위 강민준의 메모를 봤다.
싱가포르.
반듯한 글씨였다.
며칠이 지났다.
강민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번째 미팅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정각에 왔다. 낡은 구두였다. 앉자마자 말했다.
"세무사님, 며칠 전에 연락드린 분 있으셨죠."
나는 펜을 멈췄다.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해외 송금 부탁하신 분이요."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강민준을 봤다. 그는 표정이 없었다. 숫자를 말할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분이 회장님과 아는 사이입니까?"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스트였습니까?"
강민준이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세무사님, 저는 큰 결정을 맡기려는 겁니다. 이 일을 같이 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직 고위급 분들을 통해서 평판도 확인했습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일했는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인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내가 23년 동안 납세자를 검증했다. 서류를 뒤지고, 계좌를 들여다보고, 평판을 확인했다. 지금은 납세자가 나를 검증했다.
역전이었다.
"결과가 어땠습니까?"
"지금 여기 있지 않습니까."
강민준이 말했다.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선 앞에서 흔들린다는 것도요."
나는 그 말에서 멈췄다.
"흔들린다는 게 왜 중요합니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강민준이 나를 똑바로 봤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이미 넘어간 사람이거나, 사람이 아닌 사람이거나. 저는 흔들리면서도 버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는 한참 그 말을 생각했다.
흔들리면서도 버티는 사람.
23년 동안 나는 흔들리지 않으려고 했다. 서류를 보면서 얼굴을 외면했다. 감정을 지웠다. 그게 좋은 조사관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은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흔들려야 한다고. 그래야 믿을 수 있다고.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그 제안, 거절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강민준이 잠깐 나를 봤다.
"다른 사람을 찾았겠죠."
담담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세무사님한테는 연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거절이 시작이었다. 흔들렸지만 버텼기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것이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강민준이 먼저 말했다.
"세무사님은 왜 거절하셨습니까."
나는 잠깐 생각했다.
"흔들렸습니다."
내가 말했다.
"23년 퇴직금보다 많은 돈이었으니까요. 아깝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강민준이 나를 봤다.
"그런데도 거절하셨잖아요."
"선을 넘으면 지금 하는 일을 못하게 됩니다. 회장님을 끝까지 도울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세금을 아예 신고하지 않고 기록을 없애는 것은 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세금을 내면서 그 금액을 줄이는 일을 합니다. 그게 제 선입니다."
강민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유였군요."
"네."
"저를 위해서요."
나는 잠깐 멈췄다.
"저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저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강민준이 작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른 웃음이었다. 조금 따뜻한 웃음이었다.
"솔직하시네요."
"거짓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장님도 저를 검증하셨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는 수첩을 봤다.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펜을 들었다.
"네. 계속하겠습니다."
그날 밤 김재원에게서 문자가 왔다.
'형님 요즘 어때요?'
나는 문자를 읽고 한참 있다가 지웠다.
그 제안이 김재원과 연결된 건지, 아닌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강민준이 부탁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민준이 그 지인을 어디서 알았는지, 그 지인이 김재원과 연결돼 있는 건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게 이 바닥의 현실이었다.
나는 창밖을 봤다. 합정동 골목이었다. 밤이었다. 가로등 아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흔들리면서도 버티는 사람.
나는 그 말을 되씹었다.
버티는 게 얼마나 더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