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제 10화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강민준이 떠나는 날은 11월이었다.

새벽 비행기였다. 그가 그렇게 골랐다. 배웅 오는 사람이 없도록. 사진을 찍는 사람이 없도록. 조용히 나가는 것.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전날 밤 문자가 왔다.

'세무사님, 내일 새벽에 출발합니다.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한참 그 문자를 봤다. 덕분에. 그 말이 고마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이쪽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렇게 답했다.


새벽 네 시에 나는 잠에서 깼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깼다. 창밖이 어두웠다. 강민준이 지금쯤 공항에 있을 것이었다. 출국 수속을 밟고 있을 것이었다.

뒤를 돌아봤을까. 안 봤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강민준이 떠나고 나서 한 달이 지났다.

아들이 설립한 해외 법인이 국내 법인 지분을 인수했다. 양도세는 냈다. 서류상으로는 깔끔했다. 하지만 회사는 달라졌다. 강민준이 없는 회사는 강민준이 있던 회사가 아니었다.


20년 동안 한 명도 자르지 않았던 회사.

6개월이 지나자 희망퇴직 공고가 났다.


전화가 온 건 그로부터 또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였다.


"세무사님이시죠. 저 강 회장님 회사에서 경리 일하던 사람인데요."

목소리가 낮았다. 조심스러웠다.

"네, 말씀하세요."

"저 세무사님 연락처를 어디서 알았냐면요. 회장님이 예전에 저한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이분한테 연락해 보라고 하셨거든요."


나는 잠깐 멈췄다.

강민준이 이 사람에게 내 번호를 줬다는 것. 떠나기 전에. 미리.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떠나고 나서 이 사람이 어떻게 될지.


"어떤 일로 연락하셨을까요?"

"취업 관련해서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회사가 바뀌고 나서 저도 나오게 됐거든요. 다른 데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얼마 못 있었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이 일하던 분들도 많이 힘드세요. 특별한 기술이 있던 게 아니라서요. 강 회장님 때는 그냥 열심히 하면 됐는데. 지금은 다들 수입이 없어서."


목소리가 흔들렸다.

"직접 한번 뵐 수 있을까요."


일주일 후 그 사람이 사무실로 왔다.

50대 초반이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었지만 오래된 옷이었다.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이력서였다.


"이거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이력서를 받아 들었다.

경력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강민준 회사에서 12년. 그 전에 다른 회사에서 5년. 경리 업무. 세금 신고. 급여 관리. 성실하게 쌓아온 경력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이력서가 어떻게 읽힐지.


50대. 여성. 미혼. 경리직.


채용 시장에서 이 조합이 어떻게 보이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회사들은 뽑지 않는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말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결과는 그렇게 나온다.


"주변에 도움받을 곳은 없으십니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없어요."

담담한 말이었다.


"가족은요."

"부모님이 계시는데 제가 도움을 드려야 하는 상황이에요. 남편은 없고요."


나는 이력서를 내려다봤다.

혼자였다. 도움을 받을 곳도, 기댈 곳도 없는 사람이었다. 12년을 성실하게 일했는데 그게 지금 아무 방패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세무사님, 실례가 되는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말씀하세요."

"그래도 조사팀장, 조사반장 하셨으면 기업에 힘을 쓰실 수 있지 않나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힘을 쓴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구르고 나서야 그 무게가 느껴졌다. 이 사람에게 나는 아직도 국세청 조사반장이었다. 전화 한 통이면 어딘가에 취직시켜줄 수 있는 사람. 아는 기업에 부탁 한 마디 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착각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착각을 깨줄 수도, 채워줄 수도 없었다.


23년 동안 칼을 휘둘렀다. 표창을 받았고, 승진을 했고, 국장이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그건 조직 안에서의 이야기였다. 조직을 나온 사람에게 그 권한은 없었다. 전화 한 통으로 누군가를 취직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하는가.

당신의 기대가 착각이라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 자리를 알아보려 최선을 다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그 최선이 이 사람이 원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고맙다고 했다.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치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나는 이력서를 봤다.


12년이었다. 강민준 회사에서 12년. 그 12년이 이 종이 한 장에 담겨 있었다.

강민준은 지금 싱가포르에 있다. 아들이 설립한 법인이 회사를 인수했다. 양도세를 냈다. 서류상으로는 깔끔하다. 그 설계를 내가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이력서를 놓고 갔다.


내가 설계한 것과 이 사람이 지금 겪는 것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는지, 나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꾸 생각이 떠올랐다.


그날 밤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술잔을 앞에 두고, 마시지도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나는 그 회사를 조사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회사가 매각되도록 도운 사람이었다. 결과는 비슷했다. 직원들이 길에 나앉았다. 수입이 없어졌다. 이 사람이 내 앞에 이력서를 들고 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한테 부탁을 했다.


원망하지 않았다. 욕하지 않았다. 그냥 부탁을 했다.

나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한참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뜻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23년 동안 칼을 휘두르면서도 사람을 잃지는 않았다는 것. 저승사자였지만 망나니는 아니었다는 것.

그게 작은 위안이었다.

아주 작은.


김재원에게서 문자가 온 건 그날 밤이었다.

'형님, 강 회장 잘 보내드렸어요?'


나는 그 문자를 읽고 한참 있다가 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민준이 떠났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도왔다는 것을.

조용했다. 더 이상 잡으러 오겠다는 말도 없었다. 그냥 알고 있다는 것만 말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조용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끝난 것이거나,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거나.


나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문자를 지웠다.


창밖을 봤다. 합정동 골목이었다. 저녁이었다.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지쳐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걷고 있었다.

책상 위에 이력서가 있었다. 나는 그걸 서랍에 넣었다. 내일 다시 볼 것이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랍에 넣어두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르다.


전화가 울린 건 그때였다.

밤이었다. 발신자 표시 없음.

나는 세 번째 벨이 울릴 때 받았다.

"박 세무사님이시죠."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50대 남자. 서울 말씨인데 어딘가 힘을 빼려고 애쓰는 티가 났다.


"네, 맞습니다."

"소개받고 연락드렸습니다. 직접 뵙고 싶은데요."

창밖 가로등이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그 아래를 지나갔다.


"어떤 건으로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안에 진짜 질문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떠날 수 있을까요? 만나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창밖을 봤다.

강민준이 떠났다. 김재원은 조용하다. 경리 직원의 이력서가 서랍 안에 있다.


그래도 전화는 온다.

항상 밤에.

"내일 오전 10시. 마포구 합정동에 사무실이 있습니다."

나는 수첩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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