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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hard B Nov 14. 2024

죽어지지 않는 삶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꼬여온 인생이기에 여태껏 한번 제대로 피어볼 시도조차 못하는 것일까. 축축하고 음습하며 불행하다 느끼기에 충분한 유년시절의 그림자에 한 뼘의 볕이 드는 것을 기대한 적은 없으나, 그래도 시멘트 바닥에라도 피는 이름 모를 잡초처럼, 흐르는 물에 정처 없이 마냥 떠다니는 부초처럼 이라도 소박스러운 봉오리 맺힌 꽃을 끌어안고라도 살아질 줄 알았다.



죽으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죽었으면 했었다.

과연 '나'라는 존재는 '나'라는 우주 안에서 과연 어떤 의미로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신이 있다면 나를 시험에 빠뜨리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신은 없는 것인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는 존재를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나를 에워싸고 있는 존재들로부터 따스함이라던가 어떠한 온정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될는지 가만히 헤아려본 적이 있었다.


따스함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다섯 살 되던 무렵, 굉장히 외진 시골에 살았다. 

동네에 가로등이라곤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인 오지의 동네로 해가지면 그야말로 칠흑 같은 암흑천지가 되던 동네였고 그 칠흑 같은 어둠에 걸맞게 한 줌, 한 뼘의 볕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의 불행한 울타리 속에서 매일같이 불안을 안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라는 존재는 내가 식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인지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갈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술에 절어살 앗고 일곱 살이 막 넘은 나에게 술 심부름을 시켰더랬다. 고사리손 손자의 손에 들려온 술을 마치 고로쇠 물이라도 되느냐 들이키곤 온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무렵부터 밭일을 시키기 시작했고, 다 큰 장정이나 소가 끌만한 쟁기를 매게 하여 돌 밭을 갈도록했다. 열여덟이 아니라 무려 여덟 살 이었다. 그러다 쟁기가 가는 고랑이 비틀어지기만 하면 어김없이 욕설을 쏟아냈다.


일곱 살 무렵의 겨울이 기억난다.


엄마라는 존재가 동네 이웃집에 우리 남매를 데리고 저녁식사를 하러 갔고 그곳에 모인 동네 어른들과의 걸판진 술자리가 이어져 꽤나 늦게 집으로 향한 적이 있다. 집이라고 일컫는 곳으로 가는 길은 발목까지 눈이 자박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짚어보자면 한 밤 아홉 시나 됐을까?

집의 모든 문들과 창문이 잠겨있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라고 고함을 질러도 집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교류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마누라와 자식들이 동네 이웃집에 저녁을 먹으러 다녀오는 모습이 싫다고 집에 모든 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오갈 곳 없는 천애고아 신세가 된 우리 셋은 소를 먹이기 위해 지푸라기를 쌓아놨던 창고 한편에서 지푸라기와 농작물들을 말릴 때 바닥에 깔거나 위를 덮어놓는 큰 천막을 덮고 밤을 지새워야 했다.


시절이 좋았다면 아동학대라고 고소나 되었을까.

낳아준 친부라는 핑계로 훈방조치나 되고 말았을까. 그때 영문도 모른 채 외양간 한편에서 떨며 잠들었던 일곱 살 겨울에 느꼈던 한기가 여전하다.


같은 해 겨울, 부모라는 사람들이 언제나처럼 싸우기 시작한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일방적인 행패인 것 같다.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르고 던지며 집에 있는 유리란 유리는 모조리 박살이 났다.


섣달그믐이 가까운 한 겨울, 바람막이되어줄 건물조차 없는 시골집 방에 차디찬 칼바람이 들이닥친다.

양 뺨을 할퀴는 칼바람이 더 차가운지, 매일같이 지속되는 소동 속에 떨어야 했던 둘 곳 없는 불안한 내 마음이 더 차가운지 도통 몰랐었다.


그때부터다. 

온정이라는 것을 모른 채 살았고 모든 집들이, 모든 부모들이 이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가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한 방에 살아야 했기에 반 강제로 일일연속극에서 화목한 모습의 가정이 비추어지면 나와 동생은 고개를 돌리거나 마치 부모와 영화를 보다 야한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어색함과 민망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런 모습들이 나오면 어김없이 욕지거릴 내뱉었다.


나중에 나와 가족들이란 존재들을 늘 고통스럽게 하던 할아버지란 존재가 드디어 죽어버렸을 때에는 시내로 이사를 나왔는데, 도시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친구들이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하는 장면들을 마주할 때에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만 했었던 것 같다.


'저럴 수가 있나?'


그렇게 나는 기댈 곳과 마음 뉘일 곳, 여린 어린 내가 보듬음을 받아야 할 곳을 찾지도 못한 채 방황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른 해를 넘게 살아오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엄마란 사람이 같이 동행해 준 것을 제외하고 대학교 졸업식 때까지 부모라는 사람이 꽃다발은커녕 관심조차 준 적이 없었다. 졸업식 같은 가족이 동반하는 행사에는 무조건 스스로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몸을 숨기며 길을 에둘러 집에 가기 바빴고 친구 어머니가 부르는 소릴 애써 듣지 못한 척하며 도망가듯 집엘 가야 했었다.


그런 후부터는 가족이라는 사람들에게 '부모 참여 필'이라는 행사를 통보할 엄두도 내지 않았고 그렇게 철저하게 혼자인 삶을 살아야 했다. 가족이라는 존재들과 몸을 뉘일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이 있음에도 고아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부모라는 사람들로부터 외면 아닌 외면을 받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나이가 좀 더 먹어서는 동생이라는 존재들과도 서서히 단절이 되기 시작한다. 철저한 개인주의 생활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느 집 형제들처럼 우애가 깊진 못하더라도 생존의 여부조차 확인하는 연락까지도 불필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시지라도 남겨놓으면 일주일이 되도록 회신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원래 이러는 것일까.

여전히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라던가 우애가 넘치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면 이해를 할 수 없다.

'쇼윈도 일거야'


죽으려고 했었다. 죽어야 했고 죽고 싶었다.

죽음으로라도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고, 죽음이라는 수단으로라도 가족이라는 존재들에게서 약간의 관심이라도 받고 싶었다. 


스산하게 칼바람이 스며드는 이런 나의 어지러운 마음을 알기나 할까, 하잘 것 없는 나라는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그들의 일상과 감정은 큰 동요 없이 여전하게 이어가겠지만 내 영정 앞에서는 그래도 한숨 한 번은 쉬어주지 않을까 하는 딱한 생각을 퍽이나 깊게 했었다.


아무리 인생은 혼자, 특공대라고 하지만 이럴 수 있을까.


참 가족이라는 존재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는 몹시나 관대하고 대단히 떠받드는데 나라는 사람에게는 한 없이 냉정하며 그저 무시와 무관심 때로는 멸시와도 같은 냉소적인 모습만을 보인다.


사람이기에 기댈 곳이 필요했고 가족이기에 그럴 수 있다 생각했으나 일 평생 당해오고 겪어온 나는 멍청한 망각의 동물에 불과한지 또 돌아오지 않는 돌부처 같은 반응에 또 반복하여 상처를 받는다.


이쯤 와서 생각을 해보니 내가 이상한 사람이고 유난을 떠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이상한 사람, 유난을 떠는 사람이라는 자책감에 빠져 스스로를 할퀴고 더 깊은 생채기를 낸다.


집안 행사에서도 장남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새벽부터 열다섯 시간이 넘도록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동분서주했어도 내게 돌아오는 것은 그저 욕뿐이었다.


'병신 같은 게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삼십 년이 넘는 지독한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 나는 나의 지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우울증 검사와 함께 지능검사 와 갖가지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지능엔 별 이상이 없었다. 고로 병신은 아닌 것인데 일 평생을 저런 말을 듣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억울했다.


일 곱살, 칠월의 뙤약볕 아래에서 소나 할 법한 쟁기질을 하며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밥 처먹고 일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병신'이란 소릴 듣던 시절부터 최근까지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런 학대에 가까운 모습들을 보며 별 반응을 하지 않는 엄마라는 사람은 그저 방관자에 불과하다.


그래도 낳아준 생모이자 모진 삶과 어려움을 같이 겪어온 같은 입장의 피해자라 조금은 같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녀도 그의 가스라이팅에 짙게 물이 든 것일까 아니면 같기 때문에 평생을 붙어사는 것일까.

오늘도 부모라는 존재들에 대한 원망과 환멸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면서 여전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사랑을 하는 법도, 주는 법도 몰랐으며 나 까짓게 그런 감정을 갖는다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 했기에 늘 작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꿈도 내놓고 꾸지 못하는 유년시절을 가졌기에 무얼 하고 싶은지도 무얼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사는 대로 살아왔고 흐르는 대로 살아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은 남들 다 가는 4년제 대학은 나왔다는 것이고 어디밖에 나가 모났다는 소릴 들어본 적은 없다는 것. 그래서 풀칠 정도는 해올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죽고 싶었고 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바닥을 쳐버린 자존감은 사람들과 모여있을 때에 나 함께 일을 할 때 진면모를 보이며 나를 한 없이 가라앉혔다.

좋은 소릴 들어도 감사하단 얘길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유 없는 욕을 들으며 횡포를 당해도 그러려니 해야 했다.

그렇게 살아왔고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코로나가 창궐해 다니던 회사가 휘청거리던 때, 결혼을 해 배달음식점 사업을 시작한 동생이 같이 일을 하자고 도와달라 하여 일을 그만두고 거처를 옮겨 함께 일을 하러 갔는데 일하는 내내 내가 당했던 것, 느꼈던 모든 것은 감시와 무시, 조롱 섞인 잔소리밖에 없었다.


동날 동시에 같은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임에도 살면서 좋은 소리 한번 해준 적 없는 그녀는 나에게 늘 

'그만큼 일하고 이 정도 월급이면 많이 주는 거야.'


하루 열두 시간을 일하고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다. 2021년 10월이었고 그렇게 일하고 받은 한 달 급여는 230만 원이었다. 과연 많은 급여였을까.


그렇게 함께 일을 하다가 쫓겨나다시피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골방에 틀어박혀 몇 날 며칠 술 만들이 켰다.

이렇게 또 가족들로부터 이유 없이 쏟아지는 비난과 멸시의 화살은 여전하구나, 사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거처를 옮겨 동생이란 존재와 지척에 살았을 때에도 엄마라는 사람은 반찬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올라와 딸년과 사위 그리고 손자를 챙겨주기에 바빴고 나에게는 쌀 한 톨 하나 주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주변인들이 '너네 엄마 오셨는데 같이 밥 먹으러 가겠네?'라는 소리를 해서 엄마라는 사람이 온 줄이나 겨우 알았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기에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것일까.



슬픔이라는 감정이 너무 짙어지면 원망으로 바뀌게 되고 그것이 더 깊어지면 한이 된다.

가족들로부터 받는 온정 어린 관심이 없어서 슬프고 우울했던 유년, 청년시절이었다면 이제는 원망을 거쳐 한이 되어가는 시기가 도래한다. 원망이라는 감정을 처음 가졌던 무렵에 죽으려고 작정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으나 목숨이 질긴 탓인지 아니면 그 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모자란 나인지 여태 살고는 있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책임져야 할 처나 자식이 없기에 길에 가다 바스러져 죽어도 눈 못 감을 일 없을 테고, 가족이라는 존재들과 이러한 오묘한 관계에 놓여있으니 그들은 잠시는 놀라겠지만 과연 슬퍼나 해줄지 알리 만무하다.


청년 고독사 소식을 들으며 나의 지척에 지내고 있는 이웃 같다는 가까운 느낌이 든다.


외국에 나와 2년째 살고 있지만 여전히 부모라는 존재들을 포함해 가족들이라는 사람들이 잘 지내냐는 소식을 일절 먼저 묻지 않는다. 내가 한번씩 생각이나 메시지를 넣거나 전화를 해도 채 1분을 넘기지 못한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이겠지. 


이로서 살아야 하는 이유라던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의 부재를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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