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 자아와 의존적 자아의 첨예한 대립 그리고 마찰
인간은 기본적으로 중요한 대상자와의 관게에서 채우고 싶은 '의존적 욕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존적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 채 결핍하게 되면 실상과는 다르게 겉보기에 굉장히 의젓한 사람이 된다고 한다. 이것을 허구의 독립이라고 한단다.
'애 어른' 또는 '애 늙은이'
애 늙은이는 어감이 친절하지 못한 것 같으니 점잖게 좀 더 따뜻하게 애 어른으로 불러주어보자.
살다보면 한번 씩 마주하게 되는 '애 어른'이 있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의젓하다거나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만큼 애 같지 않은, 어른같은 언행을 하고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TV를 보면 항상 불우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이 지나치게 일찍 철이들어 '애 어른' 같은 행동을 해 사람들을 당황시키게 한다거나 그런 모습들로 사람들을 눈물짓게한다.
나는 철이 일찍들었다거나 나이에 비해 의젓하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었으나 어쨌거나 앞서 언급한 '허구의 독립'의 모습은 충분히 있었던 것 같다.
뭐랄까, 채워지지 않는 어떠한 결핍을 감추고자 아니 감춰야했기에 충만하고 부족함 없는 척을 했어야했고 그게 아니라도 낮은 자존감 때문에 무엇인가 모자람과 빈틈이 없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남들이 보기엔 허점투성이에 빈틈이 많은 사람이었겠지만 여하튼 허구의 독립 또는 그런 포장된 모습으로 나를 속여온 날들이었다.
한 시즌에는 각별하다고 느끼는 친구들이나 연인에 대해 이런 허구의 독립을 벗어던지고 '의존적 자아'를 가감없이 펼치던 '징한 시절'도 있었더랬다.
살아왔던대로 누구에게나 대 놓고 무엇을 부탁하고 바라고 의지하는 듯한 모습을 감히 내비추지는 못했으나 내면의 나는 그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의존을 하고 그들에 대한 소유욕이 들끓었던 시절이 있었다.
다행인것은 단지 20대 한 때, 삶에 대한 외로움과 우울감이 극에 달했을때 떨었던 청승이고 이제는 그런 것들조차 만사 귀찮아 다 벗어던진지 오래라 오히려 옆에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이 더 귀찮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내가 남들에게 그런 의존적인 모습이라거나 애정결핍자의 모습을 보이지않게 된것은 다행이나 이런 모습들은 내가 지켜주고 싶어하는 대상이 나타났을때 약간은 고질적인 모습으로 발현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둘 이나 되는 조카들과 시간을 보낼 때 필요 이상의 '어화둥둥' 모션을 취한다거나 그 아이들을 끔찍하리만큼 예뻐해 그들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질겁을 하던 순간도 있었더랬다.
조카들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일곱살 나이 차이가 나는 막냇동생을 내 자식처럼 물고빨며 업어키웠는데 그 모습조차도 때로는 비정상적으로 보였을 때가 있었다.
마치 나는 내일 당장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이되어 살아생전 내가 가진 사랑이란 감정을 이들에게 모두 쏟아줄 것이라는 모습으로 이들을 안고 업고 물고빨고하며 예뻐했더랬다.
아마도 유년시절 법적 보호자들로부터 받아보지 못한 그런 애정표현과 관심, 사랑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연애를 할 때에도 그랬던 것 같다.
혹자는 장작불처럼 은은하게 그리고 오래 타들어가는 진득한 사랑을 했다면, 나는 시쳇말로 '금사빠'에 속하는 타입이며 한 번 빠지면 쉽게 그 관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나 사랑하고 지나치게 사랑하며 사랑이라는 정의를 제대로 알지 못한채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경계를 허물어뜨린채 톡식(Toxic)한 관계에서 나를 좀 갉아 먹어가며, 나를 태워가며 잿더미 사랑을 했더랬다.
물론 그 와중에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진득한, 장작불이며 불꽃같은 사랑을 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 모든 관계가 끝나고 나면 나에게 남은 것은 정말 한 줌의 재 보다도 못한 시시함이 전부였다.
갈피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사방팔방으로 휘날리고 나부끼는 삶을 살면서 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한 시도 쉬지않고 말했던 것이 있다. '중심을 잡자'
그러나 여전히 얼마나 단단하고 견고한 중심을 잡아야 덜 흔들릴런지, 얼만큼 흔들려야하고 얼만큼 덜 흔들려야하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은 나를 좀 갉아 먹고 시시한 결말 뿐인 유독성의 관계를 더이상 원치 않는 다는 것이며, 동생이던 조카던 거리를 두고 덜 사랑하고 적당히 예뻐하는 선으로 스스로와 합의를 본 상태이다.
내가 항상 추구하는 세 단계의 독립은 언제 쯤 맞이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광복절은 과연 언제일까, 이것이 오늘 날 내가 항상 마음속에 품고있는 의문이자 최종 종착지이다.
경제적 독립, 심리적 독립 그리고 관계의 독립.
나를 좀 갉아먹고 힘들게만하는 곰팡내나는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심리적 독립을 원한다.
허무하고 시시하게 끝나버리는 그런 사치스런 사랑말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어른의 연애 혹은 충분히 농익은 성숙한 관계를 원한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얽힌, 피를 나눈 존재들로부터의 완벽한 분리와 독립을 위해 백퍼센트 경제적 독립을 원한다.
언제까지나 그럴싸한 모습과 말들로 포장하는 허구의 독립이 아닌 완벽한 분리독립을 원한다.
때문에 독립적 자아와 의존적 자아는 여전히 첨예한 대립을 하고 크고작은 마찰음을 빚어내고 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너무 나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지나치게 비화화(悲話化)하는것은 아닐까.
그러다 이내 왜 이런 내용을 엮어낼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왜 이런 내용말고는 들춰낼 수 있는 다른 과거지사가 없는지를 생각하다 몸서리를 친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정말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 희비의 교차곡선은 웬만한 악산(嶽山)의 능선을 방불케한다. 사실은 상승곡선의 '희' 보다는 하강 내지는 추락곡선의 '비'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그래도 한번 씩 상승할 수 있었던 변곡점이 있음이 얼마나 위로가되는 오늘인지 모른다.
나의 광복은 언제인가.
내가 염려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갉아먹는 그러한 것들로 부터의 완벽한 독립은 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