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악인으로 만든 그들을 증오하는 것을 멈출 생각
언젠가부터 누군갈 증오하는 것은 애정하는 것 만큼이나 힘들다는 생각을 하곤했다.
그러나 애정이란 감정, 사랑이란 낱말이 주는 감정의 깊이를 모르는 나는 차라리 증오라는 감정을 남모르게 품고있는 일이 오히려 더 익숙했고 차라리 쉬웠다.
이런 감정의 파노라마가 늘상 분노와 불안, 증오로 끝이 나는것에 신물을 느낄때가 간혹 있어 나의 그림자나 분신처럼 지척을 쫒아다니는 그러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멈추려고 하곤했다.
그러나 오선지에 새겨진 도돌이표처럼 그러한 감정은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왔으며 나는 그러한 번뇌에 빠져 타국에서 씁쓸한 연말을 보내고 있다.
삼십년이 넘은 나의 일상이며 늘상의 모습이다.
인두겁을 뒤집어 쓴 사람으로서 의도적인 불효행위를 한다는 것은 어떠한 관점으로 보나 마음편한 일이 아님엔 공감을 한다.
하다못해 길에 지나가는 이름 모를 개에게 '너는 참 못생겼구나' 라는 쓰린 소릴하고도 마음 편치 않은 것은 정상적인 지능수준을 가진 사람에겐 당연한 일이겠으나 나는 이러한 간단한 삶의 논리를 터득을 한 지경임에도 자의적인 불효행위를 멈출 수 없었다.
여전히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나의 평온에 가까운 일상을 한 번씩 뒤흔드는 그들의 행동과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다정한 '척'하는 듯한 문자 메시지에 분노를 느끼며 마치 살기위한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것 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처절하게 악담에 가까운 문자 메시지를 한 자 한 자씩 눌러쓰며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나, 정말 미친놈이구나.'
또 다시 스스로를 상처내는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도 이런 짓을 해야했던 처절한 나의 입장을 누가 이해해주리오. 그러나 나는 나의 현재 상태라던가 나의 입장을 충분히 표명을 해야했다.
나를 '아들'이라고 부른다거나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는 그녀, 남들이 흔히 엄마라고 부르는 존재의 모습에 희한한 기시감과 오묘한 거부감을 느끼며 척추반사와도 같은 반감을 느끼는 그 순간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기에 그렇게 악인의 모습에 빙의해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들을 했어야했다.
'사랑? 이딴 감정 배운적도 받은적도 준 적이 없어서 모르겠으니 그런 단어를 나에게 사용하지 말라.'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장이었다.
그런 악담 저주와도 같은 문자들을 보내고 난 후 모든 문자 내역을 지웠지만 내 기억속에는 내가 했던 말들이 선명하다. 평생을 가슴속에 담고 살아온 말들이니까.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정신과 닥터들이라면 나의 이런 어둠과 손을 맞잡은듯한 음침한 마음의 멍을 지워줄 수 있을까.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녔던 적이 있다.
우울감과 불안증으로 산 송장처럼 인생을 살았던 이 십대의 나의 한 부분 역시나 그런 음울한 모습에서 좀 벗어나 활기찬 여느 20대의 남성처럼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울감과 불안증을 완화해주는 약들은 거짓말 처럼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했으며 컴퓨터 모니터 뒤로 나를 관찰하는듯한 그 신경정신과 의사의 눈빛은 총칼 처럼 날카롭게만 보였으며 무엇도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울감과 불안감이 극에 달했던 어느 순간에는 자발적으로 정신병동에 입원을 했었던 적도 있었으나 심각한 중증 정신장애 환자들과 폐쇄병동에 가두어지는 바람에 며칠 버티질 못하고 다시 나왔었다.
왜 나의 인생은 이런 시련과 고난, 빛 한줄기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매 순간, 매 분 매 초 걸어야하는 것일까.
이 곳 홍콩의 겨울도 꽤나 춥다.
추운 가을과 겨울의 날씨를 좋아하지만 이맘때가 되면 항상 어린날의 쓰린 기억들이 한 겨울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과 같이 내 몸과 마음 곳곳을 할퀴며 지나간다.
그러한 칼바람 같은 고통스런 기억의 편린들이 날 움켜쥐고 사정없이 흔들 때면 멈추려고 했던 그 증오심은 외려 배가 된다.
그러한 어둠의 모서리에 웅크리고 있어야했었던, 이유도 모른채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까닭없이 꿇어앉아 잘못했다, 살려달라 빌어야했던 유년시절의 나는 여전히 나의 꿈에 나타나 날 울게한다.
그 시절의 나를 나는 아직도 마주하질 못한다.
그 시절의 나를 지켜주지 못했던 나의 부모라는 사람들을 그래서 더 원망하고 증오한다.
아니, 나를 지켜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매일 그런 순간에 나를 밀어넣었던 원인 제공자들을 그래서 증오하고 미워한다. 때론 온 힘을 다해 그들을 증오하고 저주한다.
그래서 그들보다 빨리 죽고싶었고, 그들 목전에서 참혹하게 삶의 끝을 마감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최고의 복수였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적이 없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들을 쏟아놓아도 그 당사자들은 과연 기억이나 할런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살 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참 파렴치해 보인다.
나의 부모라는 사람들이 어느 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되어 둘 이나 되는 생때같은 손주들을 어화둥둥 끼고 도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욕지기가 날 정더로 비위가 상한다.
내가 갓난쟁이때 오밤중에 울었을때, 아버지라는 사람은 날 마당에 집어 던지려고 포대기째로 밖으로 들고나갔다고 한다. 불필요하게 이 사실을 알아야했던 건 엄마라는 사람이 말을 해주어서다.
막냇동생이 돌 무렵 까닭없이 운다는 이유로 아버지라는 사람은 파리채로 그 돌잡이 아기를 후려쳐 몸 구석구석에 피멍이 들었던적이 있다. 그 파리채 폭력으로 부터 막내를 지키겠다고 그 한 겨울 아이를 안고 바깥으로 도망을 가던 나의 엄마라는 사람의 황급한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이런 부조화스러운 부부의 모습, 부모라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주할때마다 넌덜머리가 난다.
나 라는 자식을 놓고 그렇게 죽일 듯한 모습으로 살아왔으면서 무엇을 위해 자식을 더 놓았는지 모를일이다. 그저 암수 한 쌍 짐승의 조절되지 않는 애정행각의 산물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 둔 큰 손주 손을 붙잡고 이것저것 사입히고 먹이며 금동아, 은동아 금은보화 다루듯 하는 모습을 보면 그 역시나 진절머리가 난다.
그 나이에 나는 밭에 끌려가 소나 끌법한 쟁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일곱살 난 아이가 어디에 가서도 듣지 못할법한 욕을 들어야했다. 사방으로 쩍쩍 갈라진 돌밭을 소 처럼 갈며 '병신같이 밥 값도 못하는 새끼'란 소릴 들으며 속이 상하기 보단 동네 어른들이 내게 주는 측은지심의 눈길이 더욱 창피했던 기억이 내 일곱 살 기억의 8할을 차지한다.
나의 부모라는 사람들은 금은보화같이 소중한 손주들을 끼고 돌보며 나란 존재를 키우던 시절을 과연 기억이나 할까.
미안한 마음이라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죄의식을 좁 쌀 반의 반 톨만큼이라도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했었던 적이 있다.
이러한 기억들에 지배되어 서른이 훌쩍넘은 지금도 여전히 조각조각난 마음을 억지로 움켜쥔채 살고있는데 난데없은 문자로 보고싶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문자 메시지가 가당키나한가.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자발적인 불효자 짓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자정이 지났으니 생일이다.
덜컥 겁이난다. 가족이라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생일 축하 메시지라도 보내올까봐.
사실 고향과 가족이란 울타리를 떠나 학창시절을 보내고 직장생활을 했던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들로부터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아본일이 거의 없다.
12월의 마지막 날, 동날동시에 남녀 쌍둥이를 낳아기른, 흔치않은 경험을 한 부모라는 존재들은 우리들의 생일을 곧 잘 잊어버리곤했다.
내 기억으로 받아본 생일상은 다섯 살 무렵 동네에 사는 친구 한 두명을 모아 집에서 밥을 해먹은게 전부다. 그 마져도 어릴적 모습을 담긴 사진을 보며 더듬은 기억일 뿐 그 이후로는 집에서 부모라는 존재로부터 각별한 생일 축하와 관련된 일을 받아본적이 없다.
추운 12월, 연말이면 항상 싸움을 해대거나 집에 유리창이 박살이나 비닐과 테이프로 바람만 겨우 간신히 막고 자야했던 날들이 더욱 빈번했기에 연말은 항상 두려움의 시즌이었다.
그래, 가족이라는 존재들 중 누간가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와 나의 하루를 뒤흔든다는 걱정은 지나친 걱정이었다. 형제들 중 그 누구도 생일 축하를 한다고 한 적이 없었기에 올 해에도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걱정을 놓아도 될 것 같다.
동생이란 년이 결혼을 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공교롭게 같은 건물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녀의 부부는 같은 건물 주인세대에 나는 두 층아래 원룸에 살았는데 동생의 시어머님이 새로 본 며느리 생일 상을 차려주러 왔다가 나를 마주치고는 '사돈 총각 저녁 먹으러 있다 올라와요' 라는 소릴해 가야하나 고민을 하던 찰나 쌍둥이 동생이라는 애는 군데 군데 코팅이 벗겨진 냄비에 미역국을 반쯤 채워와 마치 옥에 갇힌 죄수에게 특별식을 넣어주듯 '먹어' 하고 본인 집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녀를 불러세워 '너네 시어머님이 밥을 먹으러 올라오라던데?' 라는 얘기를 했다가 말 그대로 경멸의 눈초리를 온 몸으로 받으며 눈치좀 있어봐라는 말을 덤으로 들어야 했다.
그냥 가족이란 사람들에겐 나는 두엄을 덮어 두는 멍석이라거나 아무짝에 쓸모없는 헝곂조각 같은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일들을 겪을때 마다 속상했던 적은 없었다.
그냥 인생 내내 이러한 일들을 당연하듯 겪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했고 그 것 말곤 방법이 없었으니까.
후폭풍이란 이런건가보다.
살던 나라, 가족이라 여기던 사람들 그리고 나고 자라온 지옥같은 고향 땅을 벗어나 나의 기준에서 '정상적이고 친사회적인' 범주에 드는 사람들과 네트워킹을 하면서 살다보니 이 것들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그 일련의 일들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뒤늦게 느끼기 시작을 했다.
비로소 가족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 겪었던 일들에 대한 분노의 지당함을 깨닫기 시작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오늘도 나는 자발적인 불효를 멈출 생각이 없다.
아니, 멈추고싶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사람새끼'로 남고싶은 나 이니까 그들이 가만히 가라앉아 있는 나의 일상과 마음을 뒤흔들어 흐린 진창으로 만들지 않길 간절히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