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든, 행인이든, 가게 점원이든, 웃으면 어디 잡혀가기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언제나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다. 낯선 이들에게 아낌없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언제 어디서나 지적질을 할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알쓸신잡>에서 독일에 방송협조를 부탁했을 때 반응. 충분히 이럴 수 있다!
정(情) 떨어지는 에피소드 몇 개
1.
우리 집은 4층짜리 아파트의 1층(독일에서는 0층)이다. 공동현관 쪽으로 큰 창문이 두 개가 나 있어 커튼을 꼭꼭 쳐놓지 않는 한 밖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대충 알 수 있다. 때문에 윗집 사람들이 부재중인 날이면(맞벌이 부부가 살기 때문에 낮시간엔 대부분 부재중이다) 택배기사들이 우리 집 초인종을 그렇게 눌러댄다. 택배 좀 대신 맡아달라는 심산이다.
처음엔 이웃 좋다는 게 뭐야~ 하며 대수롭지 않게 맡아줬는데, 열몇 번이 지나가자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뭐 하나 고마운 표시를 안 하네. 우리 같았으면 초콜릿이라도 한 봉지 가져다주며 매번 고맙게 됐다고 한 마디 할 법 한데.. 어쩌다 외출하다 마주칠 때 'Hallo'라는 한마디 말고는 뭐가 없다.
괘씸한 마음이 드니 더 이상 맡아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다음과 같은 말을 되뇌며 소심한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An der tür bitte(안데튀어비테 /문 앞에 좀...)"
2.
뮌헨(München)에 방문했을 때 목격한 일이다.
그 유명한 바이젠 비어(Weizen, 밀맥주 또는 백 맥주)를 맛보기 위해 북적이는 유명 맥주집에 자리를 겨우 잡았다. 우리 뒤편에는 약 3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있었는데, 30~40대 되는 독일 아저씨들이 둘러 앉아 술을 한잔씩 걸치고 있었다(아마 동호회 사람들이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담소라기에는 너무나 큰 목소리로, 간간히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독일 아저씨들. 나중에는 취기가 올라왔는지 너나없이 한 목소리로 노래까지 부른다. 독일 사람들도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며) 시끄럽게 떠들며 노는 경우도 다 있구나 하며 그 의외성에 놀랐었다. 역시 저들도 인간이었어.
우리 테이블을 담당하는 웨이터를 지루하게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식당 안 소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신바람 났던 독일 아저씨들은 뭐 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뒤돌아보니 긴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 중 절반은 빠져나간 상태. 창 밖에서 멀뚱히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남은 사람들은 한 명씩 차례차례 웨이터와 독대하며 각자 자기의 술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대충 어림잡아도 한 사람 당 계산하는데 1분씩은 걸리는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 웨이터가 안보였던 이유가 있었다.)
회비를 걷던지, 한 사람이 일괄 계산하고 나중에 거둬들이던지, 아니면 모임 중 한 사람이 '오늘은 내가 쏜다'라며 호기롭게 계산하는 문화에 익숙해있던 나에게 그 장면은 말 그대로 컬처쇼크였다.
정확한 계산과 깔끔한 뒤처리라고 생각하면 좋게 볼 법도 하지만, 전혀 효율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은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게다가 덕분에 우리는 그 테이블 마지막 사람이 나설 때까지 추가 주문을 못했단 말이다. (엄청 배고팠는데!!)
3.
둘째가 독일 유치원에 슬슬 적응하자 몇몇 친구와 '플레이 데이트(Play date)'를 하고 싶다고 했다. 친구를 집에 초대해 놀고 싶다는 얘기다.
아이들을 초대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 엄마들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이만 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어떤 주제로 수다를 이끌어 가야 하나, OO엄마는 영어라도 잘 하지만 △△엄마는 독일어밖에 못하는 것 같은데, 무슨 수로 대화를 나눌까.
결론부터 말하면 괜한 고민이었다.
'엄마도 함께 초대한다'라는 특별한 코멘트가 없다면 이 곳 플레이 데이트는 온전히 아이들끼리만 보내는 시간이다. 보통 방과 후 호스트 부모가 아이들을 한꺼번에 픽업해서 놀리다가 정해진 시간(대략 2~3시간 후)에 해당 부모님이 찾아가는 시스템이다.
'좀 앉았다 가세요'라는 뻔한 인사치레도 흔치 않다. 아이들 플레이 데이트로 어른들의 친분을 쌓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4.
이런 일들은 비단 나만 겪거나 느끼는 일들이 아니었다.
'이사 왔다고 인사차 옆집에 잔치국수를 해다 줬는데 면전에서 냄새를 맡더니 안 먹는다고 거절하더군요'
'저는 옆집에 잡채를 갖다 주며 인사했는데, 다음날 보니 자기 집 앞에 빈 접시만 덜렁 놔두었더라고요. 무슨 배달 음식인 줄?'
이렇듯 네이X의 독일맘 카페에서도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기 위해 의욕을 앞세우다 상처만 깊게 입은 사람들의 경험담이 줄지어 올라와 있다.
맛있게 먹었으면 먹었다, 왜 말을 못 해?
이질적인 외모와 언어와 문화 때문도 아닌 것 같다.
인터넷에 '독일에서 친구 만드는 방법(how to make friends in Germany)'라고 검색해봐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독일에서 친구라는 걸 만들 수 있긴 하는 거니'라는 자조적인 질문도 있다.
큰 아이 학교에서 뉴커머(New comer)들을 위해 마련한 워크숍에서는 강사가 독일 사람들이 낯선 이들을 대하는 문화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기도 했다.
새로운 이웃에게 친절하지 않는 이유는 인심이 각박하거나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기보다 단순히 그 상황 자체가 익숙치 않아서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무지'와 '소심함'의 발로라는 것.
따라서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익숙치 않은 선물을 주기보다는 인사 정도로만 시작해 점차 신뢰를 쌓는 것이 정석이라는 뻔한 조언을 한다.
'너(du)'라고 불러도 돼. 그렇다고 친구는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독일에 18년간 살았던 미국인 리처드 로드(Richard Lord)는 <독일(원제 : Culture Shock! Germany)>이라는 저서에서 독일인에게는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가 있다고 설명한다.
공적 자아는 거리나 일터 또는 낯선 상황에서 보이는 무뚝뚝하고 냉정한 자아이며, 사적 자아는 좀 더 개방적이고 친절하며 남에게 도움을 주려는 경향을 띄는데, 가족과 친구 또는 특별히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 드러난다고 한다.
로드는 또 자아가 이렇게 나뉘고 있는 이유가 독일어에서 2인칭을 부르는 호칭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독일어는 격식을 갖춰야 할 상대(Sie, 당신)와 좀 더 편안한 상대(du, 너)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보통 '두(du)'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경계심 없이 친절하고 따뜻하며 호의적이지만, 여기에도 레벨이 존재한다. '친구(Freund/Freundin)'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du 그룹'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독일에서 한 사람과 친구가 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대신 한번 친구가 되면(서로 친구로 인정하면)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끈끈함을 자랑한다(고 한다. 나야 모르니..)
이들이 '친구'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보통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해온 사람들을 뜻한다. 평생 동안 다섯 손가락 내외의 친구만 있다고 해도 이상한 게 아니다.
따라서 물리적인 거주 기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내가 아무리 노력해본들 독일인에게 친구 타이틀을 얻게 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그냥 좀 아는 사람(Bekannte) 또는 아무리 친해보려 노력해도 '잘 아는 사람(gute Bekannte)'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좀 섭섭하긴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Sie에서 du로 격상은 한 번 해봤다. 둘째 유치원 학부모 중 유달리 친절했던 J가 'duzen(두첸)', 즉 '호형호제'를 허했을 때의 그 기분이란!
우리 친구 아이가
모든 게 날씨 탓이다.
<털 없는 원숭이(The Naked Ape)>로 유명한 영국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는 또 다른 저서 <People Watching>에서 지역별로 다른 친밀함의 거리(Personal Space)*를 다음과 같이 나누어 설명한다.
*타인으로부터 침범당했을 대 불편/불쾌하다고 느끼는 무의식적인 경계선
서유럽 사람들은 손가락 끝 거리(Fingertip distance)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이는 팔을 쭉 뻗었을 때 본인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의 어깨에 닿을 듯 말듯한 거리다.
손목 거리(wrist distance)를 선호하는 나라는 동유럽 국가들이다.
단연 지중해 근처(이탈리아, 스페인 등) 나라가 가장 친밀하다. 이들은 팔꿈치 거리(elbow distance) 정도만 유지하면 된다. 팔꿈치로 쿡 찌르면 뭐? 하고 반응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볼 것도 없이 독일은 전형적인 서유럽 국가, 즉 손가락 끝 거리를 선호하는 나라다.
서/북유럽 국가들의 또 다른 특징은 시간 개념이 철저하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을 자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들은 일조량이 극히 적거나 기후조건이 열악하고 계절의 구분이 명확하다는 특성이 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귀하므로 그 시간만큼은 누구의 간섭 또는 방해 없이 온전히 나의 목적에 충실하게 보내야 한다. 다시 말해 날씨도 안 좋은데 잘 모르는 사람과 길거리에서 시시덕 거리며 대화를 나눌 입장이 아니라는 것.
오오, 여기서 몇 해 겨울을 나다 보니 십분 이해가 가긴 한다.
독일 사람들은 '호두'와 같아서 겉으로는 딱딱하지만, 속을 알고 보면 한없이 부드럽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일본인들의 행동 양식인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와도 흡사하다. 다만, 그 성격 특성이 뒤바뀌었을 뿐.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인데, 겉으로는 쌀쌀맞지만 알고 보니 사려 깊은 '츤데레'한 독일 사람들을 간간히 경험하긴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 불편함을 계속 이고 사는 건 여기가 내 나라가 아니어서 그런 건지.
꼭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독일 사람들 집에 초대받았을 때 <초코파이>를 선물로 준비하곤 한다. The most popular snack in Korea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러나 포장박스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정(情)'에 대해서는 부러 설명을 더하지 않는다.
친절함(freundlich), 상냥함(nett), 이해심(verständnisvoll), 오픈마인드(unvoreingenommen), 관용(tolerant) 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이 끈끈한 '정(情)'에 대해서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가 어려울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