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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의 기록자 Mar 30. 2023

미련하고 용기 있었던 나의 첫 이사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진정한 성인이 되겠다며 부모님께 독립을 선언했던 적이 있었다. 호기롭게 말하는 딸을 보며 부모님은 처음에는 당황하셨지만, 어디 한번 고생해 봐라 하는 심정으로 나의 독립을 허락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을 잘 몰랐던 나는 신이 나서 부리나케 짐을 챙겼다.

독립을 한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가진 게 없었던 나는 부모님께 보증금을 빌려 작은 월세 방을 구했다. 25년 만에 부모님에게서 벗어난 삶이 처음에는 자유 그 자체였다.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어도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원하는 배달 음식도 마음껏 시켜 먹었다. 그러나 나의 자유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곧 생활고에 처하게 되었다. 간신히 구한 알바로 생활을 연명하며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1년 정도 흘렀을까. 처음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내가 취업을 하게 된 곳은 살던 자취집에서 거리가 꽤 멀었고, 월세 계약 기간이 다 끝나갈 즈음이어서 나는 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취업도 하고 이사한 집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친구를 불러서 이삿짐을 옮기기로 하였다.

처음에 독립을 할 때는 간단한 조리 도구와 옷가지뿐이었는데, 살다 보니 짐이 꽤 늘어나 있었다. 작은 트럭을 부를까도 했지만 자동차로 몇 번 정도 옮기면 돈을 더 아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삿짐센터를 부르기를 포기한 나는 근처 마트에 가서 박스 몇 개를 주어와 포장을 시작했다. 작은 종이 박스로 포장을 하다 보니 엄청나게 많은 양이 나왔고 이불이나 옷들은 박스에 들어가지 않아서 비닐에 욱여넣었다.

내가 살던 자취방은 5층이었는데, 평소에는 잘 운행되던 엘리베이터가 그날따라 고장으로 작동을 멈췄고 친구와 나는 설상가상으로 양손에 박스와 비닐을 들고 빌라 5층에서 1층까지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 번만 왔다 갔다 하면 될 줄 알았지만 5층까지 그냥 올라가는 것도 힘든데, 무거운 짐을 들고 내려와야 하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결국 박스를 들고 내려가던 중, 종이 박스가 터져버렸고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이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다. 


"우당탕탕, 데구루루"


그때까지 간신히 참고 있던 내 감정도 함께 터져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의 쓴맛을 느꼈으리라. 그렇게 한참을 울다 친구가 나를 겨우 달래주었고, 우리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1층에 내려놓은 터진 박스와 짐들을 자동차로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는 이사 겨우 끝낼 수 있었다.

1~2시간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이사는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에 겨우 마무리가 되었다. 이사를 마친 후 다음날 온몸에 근육통이 생기고 몸살이 나서 며칠을 집에만 누워있었다. 그렇게 대책 없이 했던 나의 첫 이사는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해프닝이었다. 차마 쪽팔려 부모님께는 이삿짐센터를 불러서 이사했다고 거짓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가끔은 이삿짐 차를 보게 될 때면 그때가 생각나 웃음이 지어지곤 한다. 미련하고 용기 있었던 나의 첫 이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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