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dy Hwang 황선연 Sep 26. 2018

15. 도둑맞은 토르의 망치 - 3


 계단을 내려가고 천장이 높아짐에 따라 이안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달구어진 난로의 열기로 인한 후끈거림이 등 뒤로 사라지고 꽉 막혔던 사방이 조금씩 트이었다. 저 아래로 계단의 끝이 보였다. 바닥에 내려서자 그들 앞으로 자수정 원석들이 오각형 모양으로 박힌 벽이 나타났다. 그 한가운데에 은으로 제작된 문이 은빛을 반짝이며 우아하게 서 있었다. 실선으로 태양과 달, 별이 새겨진 문의 화려함으로, 그리고 보석들이 박힌 벽의 화사함으로 감히 판단해보건대 분명 보물실이 틀림없다고 손오공과 아이들은 내심 확신했다. 그들의 얼굴이 긴장된 흥분으로 점차 붉어졌다. 손오공은 곧 심장이 멈출 것 같이 숨을 컥컥 몰아쉬었다.


 왕이 목걸이를 옷 밖으로 끄집어냈다. 금으로 된 큼지막한 열쇠가 끝에 매달려 있었다. 문의 열쇠 구멍에 집어넣고 돌리자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왕을 제외한 모두는 충격을 받아 입이 함지박만 하게 쩍 벌어졌다.


 진귀한 보물들이 넓은 방 안 가득 산처럼 쌓여있었다. 보석 목걸이와 금괴, 금잔, 황금 촛대, 커다란 다이아몬드나 루비 원석 등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마치 이곳이 바다 한가운데에 떠있는 전설의 보물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사이로 지나갈 수 있도록 보석 더미 위에 은판으로 길이 닦여있었다. 왕은 이미 저 앞에 걸어가고 있었다. 이런 장관을 물리도록 봤을 그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길을 채 따라가지 못하고 한눈을 팔기에 여념이 없었다. 손오공은 멋있는 황금 목걸이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을 찾아 작은 두상에 꾹 눌러썼다. 길을 전진할수록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 개수도 늘어났다.

 수진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팔찌를 들어 직접 끼어보고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보석 장신구가 너무 많았기에 몸에 걸쳤다 빼기를 반복하느라 거의 전진하지 못하였다. 뒤에서 보다 못한 이안이 재촉하고 나서야 겨우 한 발자국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유독 이안만이 보물들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길은 점차 넓어지더니 그 끝에 조그만 원형 광장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황금과 보석이 달린 비단옷으로 치장하고 화려한 왕관을 쓴 고대 왕들의 대리석 입상들이 바깥쪽으로 향한 채 빙 둘러가며 세워져 있었다. 그들이 앞으로 살짝 내민, 모아진 두 손바닥 위로 전에 '아이런 대장간 박물관'에서 보았었던 것들이 놓여 있었다. 블랙 아이런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두 진품이었다.

 


 접혀 있는 손바닥 크기의 스키드블라드니르,

 

 군데군데 녹이 슨 철제의자,


 매우 평범해 보이는 철제 사다리,


 그리고 손오공이 그렇게나 애타게 찾던 여의봉은 입상 옆 바닥에 놓여 있었다.



“너무 무거워서 다른 것들처럼 저기에 올렸다가는 완전 무너져 내릴 것 같았거든.”


 왕이 여의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아령보다 조금 더 길고 위와 아래쪽 테두리에는 금테가 둘러져 있었으며 중간은 검은 쇠로 이루어졌다. 수진은 호기심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 검은 쇠 부분을 잡고 들어 올리려 했다. 완벽한 실패였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바닥과 원래부터 한 몸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이안 역시 한 번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줘도 그것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질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순순히 포기했다. 

 

 스톰펌 왕이 손오공을 향해 손을 내밀어 재촉했다.


“이제 네 차례이다.”


 손오공은 마치 자식을 보는 어머니의 미소를 머금은 채 그것에게 다가갔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었다. 그의 독주 서커스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것을 마치 솜방망이인 것처럼 한 손으로 거뜬히 들어 올린 다음, 여러 번 위로 던졌다 받았다,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왔다 갔다를 수십 차례 선보였다. 돌리기, 던지기, 흔들기 등등 오래전에 갈고닦은 여의봉 실력을 마음껏 뽐내었다.


 다시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새끼손가락을 쭉 펴서는 관중을 향해 앞으로 쭉 내밀며 잘 보라고 먼저 선전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여의봉 아래를 받쳐서 위로 쑥 들어 올렸다. 그가 호언장담한 대로였다. 새끼손가락의 힘만으로 무거운 여의봉을 거뜬히 들어 올린 것이다.

 

 모두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쳐다보다가 “와우~”감탄사와 함께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스톰펌 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소리를 꽥꽥 지르다가 하마터면 자신의 머리에 쓴 황금 왕관을 아무 데다 내팽개칠 뻔하였다.


 손오공은 여전히 황금 왕관을 머리에 쓴 채 목을 살짝 구부려 예의상 감사인사를 보냈다. 그가 큰 소리로 운을 뗐다.


“자, 마지막 묘기입니다. 커져라~”


 천장을 향하던 여의봉의 금테 앞부분이 쑥쑥 자라더니 금세 천장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혹 지붕을 뚫을까 싶은 두려움에 왕이 “그만!”하고 소리치자 그는 “그만!”하며 그것의 성장을 멈추게 했다.


“작아져라~”


 손오공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것은 푹푹 작아지더니 거의 이쑤시개 길이가 되었고 그는 “그만!”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왼쪽 귀 뒤쪽에 잘 꽂아 고정시켰다. 진정을 되찾은 왕은 진지한 어조로 아까 했던 약속을 다시 상기시켰다.


“이제야 여의봉이 자기 주인을 찾았구나. 사실 여기 있어도 사용할 자가 없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 네 것이니 가지고 가거라.”     


 손오공은 넘쳐나는 기쁨에 왕 앞에 넙죽 엎드려 여러 번 절을 했다. 수진이 정말로 축하한다며 함께 기뻐해 주었다. 그런데 입상 손바닥들을 찬찬히 살피던 이안의 시선 속에 번뜩 번개가 일었다.


‘뭔가가 이상한데.’


 의심이 든 그는 다시 눈길을 돌려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아차 싶었다. 그는 보물실을 나가려고 뒤돌아선 왕의 등에다 대고 다급히 물었다.  


“왜 ‘토르의 망치’가 보이지 않지요?”


 왕이 그 자리에 문득 멈추어 섰다. 몇 초 후, 뒤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미소는 완전히 사라지고 근심과 걱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갑자기 폭삭 늙어버린 개처럼 그의 이마에 주름살이 생기고 그의 눈은 초점이 흐려져 퀭해졌다. 그의 절망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에 보는 이들이 오히려 더 괴로워졌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왕이 혀로 입술을 적신 후 겨우 떼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없다.”


“그럼 어디에 있어요?”


 이안과 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동시에 물었다. 왕은 고개를 들어 원래 토르의 망치가 놓였었던, 그러나 지금은 비어있는 한 입상의 손바닥을 공포에 찬 눈으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요툰하임에서 건너온 거인들이 빼앗아 갔다. 다섯 달 전, 그들은 너희가 열려고 했던 지하의 그 문을 통해 소금궁전 안으로 불시에 침입했단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자세히 좀 알려주세요.”


 이안이 설명을 요구하자 그는 말없이 바닥을 쳐다보다가 이내 두 눈을 감았다. 악몽 같은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리기 싫은 듯 그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지고, 붉은 머리와 수염이 미세하게 떨리었다. 불편한 적막과 고요가 그들 사이에 흘러갔다.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과 분노를 꾹 참으며 힘겹게 눈을 뜬 그가 결심한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구슬픈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사실 멸족당한 걸로 여겼었던 거인들이 소금궁전 지하에 침입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꿈엔들 생각조차 했겠느냐? 별안간 지하 감옥 옆으로, 아무것도 없던 빈 벽에 큰 문이 생기고, 너희가 열려고 했던 바로 그 문 말이다. 그것을 열고 세 거인이 튀어나왔다. 감옥을 지키던 병사들이 급히 도망치는데 살짝 뒤돌아보니 거인들이 감옥 죄수들을 꺼내 먹어치우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더구나.


 그 소식을 접한 나는 바로 군대를 이끌고 달려갔다. 그러나 너무 급작스럽게 터진 일인지라 우리는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지난 3,000년 동안 동맹은 거의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에 우리의 무기는 녹슬었고, 전투능력도 거의 제로 수준이었지. 도끼와 방패를 어떻게 써야 되는지조차 다 까먹어버린 거야. 도저히 방어가 힘들어지자 우린 지하에서 철수했다. 거인들은 비밀 통로를 모를 테니 지하에 갇힌 채 나오기 힘들 거라 여긴 거지. 그러나 그들은 식량창고 치즈방의 조그만 문을 발견하고는 깨부수기 시작했다.


 상황이 긴급해지자 난 '토르의 망치 묠니르'를 들고 갔다. 그리고 터진 구멍으로 얼굴을 내민 키클로프스족 거인의 외눈을 향해 힘껏 던졌지. 그런데 그것이 날아가다가 그만 중간에서 뚝 떨어지는 거야. 거인은 날아오는 망치를 보고 처음엔 부르르 떨며 공포에 찬 얼굴이었지만 바닥에 떨어지자 안심하는 듯했어. 그리고 팔을 내밀어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갔지. 집을 때도 처음엔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것이 아무 반응 없이 잠잠하자 킥킥거리더군. 그가 나를 향해 비아냥거렸어.


“이건 자신이 주인이라고 정한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모르고 있었나? 안 그래도 빼앗아오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리 스스로 갖다 바치다니 고마워 죽겠군.”


 그 거인은 나머지 동료들을 데리고 거기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망치를 빼앗긴 나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지하 동굴로 뒤따라갔지. 그들이 문으로 들어가려 할 때 내가 격분하여 외쳤어.


“도대체 누가 명을 내린 거냐? 어서 망치를 돌려줘!”


 마지막으로 들어가던 그 키클로프스가 멈춰 선 채 뒤돌아봤다. 그의 외눈에 섬광이 일더니 깊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불타올랐다. 그 눈빛이 너무나 강렬하여 나의 몸은 부르르 떨리었다. 그는 잔인한 표정으로 삐죽거렸어.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요툰하임에 모여든 거인들이 곧 이곳을 초토화시킬 테니 기대해도 좋아. 이젠 망치도 없고 너희를 보호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오늘 이렇게 떠나는 걸 행운으로 알거라.”


“누가 너에게 명을 내린 거냐?”


“블랙수트.”


 나는 순간 잘못 들을 걸로 착각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누구라고?”


 이미 문 안으로 사라져 버린 거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마왕 블랙수트, 우리의 주인님이 돌아오셨다.




 아이들은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황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왕이 거인족을 동원해 행동을 개시하다니, 히든벅이 안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넘어가고도 남을 대형 사태가 분명했다.


 스톰펌 왕은 이야기를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는지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그날 이후 불안과 공포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단다. 알겠니? 오랫동안의 공백을 깨고 왜 내가 성급히 이 캠프를 연 이유를 말이야. 바로 이것 때문이지. 지금의 브라잇 동맹은 이름만 동맹일 뿐, 3,000년 전의 연대와 소속감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아. 하지만 우린 다시 뭉쳐야 해. 요정과 마법사, 난쟁이와 뱀파이어, 인간과 인어가 하나의 동맹으로 끈끈하게 다시 연대해야만 해. 우리의 성물도 되찾아와야지. 

 그런데 캠프의 참가자가 겨우 8명이라니? 내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다들 관심조차 없다는 의미겠지. 동맹이고 뭐고 자신들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인 세상이 된 게야. 이런, 목에 도끼를 갖다 대기에도 아까운 놈들 같으니라고. 그래, 다들 엄청 처먹고 엄청 잘살아라!”


 그는 이어 욕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각자 생각에 빠져있어 아무도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다른 동맹국도 그의 탈출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단 건가요?”


 이안이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여기 손오공을 봐서는 오나시아에서도 곧 사실을 알지 않았을까? 아쿠아니아와 스위티니아는 잘 모르겠지만 마왕이 봉인되었던 곳을 지키던 일룸니아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일 게다. 혹시 모르지, 곧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지.”


“누가요?”


“마왕 블랙수트.”

  

 그녀의 물음에 왕이 답하자 다들 깜짝 놀라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마치 그 이름이 그렇게 쉽게 내뱉어지면 안 되는 어떤 금기인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마왕이 직접 나타난다고? 이 평화로운 브라잇 동맹에?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눈들의 초점이 불안스레 이리저리 흔들렸다. 숨조차 쉬기 힘든 불편한 분위기가 이 아름다운 보물실에 가득 들어찼다. 숨을 좀 쉬어보려고 입에서 한숨들이 깊게 내쉬어졌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수진의 눈에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보석들이 지금은 그냥 돌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착용하고 싶은 욕망마저 전혀 들지 않았다. 왕성하던 입맛조차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손오공이 주책스럽게 떠들어 그들 사이의 견디기 힘든 침묵을 깨뜨렸다.


“걱정한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으면 저도 지금 같이 걱정을 해주겠어요.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걱정은 스스로 해결을 못하니까요. 저도 지하에서 하루하루 걱정으로 살았지만 오히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반쯤 포기하고 있었을 때 얘네들이 짠~하고 나타났어요.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마세요. 네? 

 원하시면 가짜 망치 하나 만들어드릴까요? 사양치 마세요. 그저 여의봉을 돌려주신 은혜에 대한 작은 보답이니까요.”

 

 그러나 그의 농담 섞인 위로조차 그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긴장해서 눈동자가 더 새파랗게 물든 이안이 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토르의 망치 없이 그냥 이대로 지내시는 건가요?”


“당분간은 그럴 수밖에 없구나. 백성들은 여전히 망치가 자신들과 왕국을 수호해준다고 믿으며 살겠지. 나도 하루에 수십 번 방법을 강구해보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딥언더니아는 용기와 용맹함으로 유명하지. 하지만 무모하게 달려드는 용기는 자제할 필요가 있단다. 상대가 만만치 않으니까. 우선 좀 더 생각을 한 연후에 방법을 강구해보려 한다. 

 혹시 아느냐? 예전에 토르가 죽고 나서 망치가 딥언더니아로 스스로 되돌아온 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마법이 통할지 말이다. 자, 이제 그만 나가자꾸나.”

 

 그들은 황금과 보물들 사이로 난 은판 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문을 바로 지척에 둔 순간이 되자 제일 뒤에서 왕이 앞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손오공, 나가기 전에 보물들을 다 털어놓아야 되지 않을까?”


“저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눈 깜빡할 사이에 이안이 번쩍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두 발목을 잽싸게 낚아 거꾸로 세워 강하게 흔들자, 옷 여기저기에서 보석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그는 귀 뒤에 꽂아둔 여의봉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 귀를 잡은 채 놓아달라고 소리쳤다. 그의 발이 땅으로 내려오자 그는 씩씩거리며 이안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두 손을 들어 올리고 어쩔 수 없었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왕과 헤어진 그들이 소금궁전에서 나와 인적이 드문 구석에 다다를 쯤이었다. 손오공은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그런지 이안에 대한 조금 전의 반감은 다 사라진 후였다. 


“난 고향인 화과산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 너희들의 마지막 소원을 말해봐.”


“저기, 나중에 말해도 될까?”


“이안, 지금 아니면 우린 다시 못 만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오공은 눈빛으로 수진도 동의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씽긋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그가 뒤돌아서려는데 그녀는 재빨리 다가와 그를 꼭 껴안아주었다.

 

“잘 가, 고마웠어. 다시 볼 때까지 안녕.”


 그는 미소를 지은 채 파리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들 머리 위를 여러 번 날아다닌 후 저 멀리 사라졌다. 그가 떠나자 주변이 너무 조용하고 왠지 허무한 느낌이 드는 그들이었다. 천방지축 손오공 곁에만 있어도 별별 사건 사고가 터지든가 꼭 터질 것만 같았는데, 막상 그렇게 가버리니 나쁜 기억들도 함께 떠나버린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떤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바로 저 친구를 꼭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그 만남의 타이밍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는 희망이 마음속에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들은 푸다크 별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해가 들지 않아 낮과 밤의 구분이 쉽지 않은데, 방으로 돌아와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6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아침 식사시간이었다. 평소와 같이 쾌활한 분위기가 식탁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마법 양탄자를 타고 어둠의 지하세계에서 살아 돌아온 줄 아는 카할과 아이들은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해 수진과 이안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특히 이날 아침에는 수진이 계속 하품을 하며 무척 피곤해 보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이안도 평소와 달리 눈이 퀭한 것이 얼굴까지 푸석거렸다. 그의 옆에서 안젤라가 뱀파니아의 유명한 피부관리사가 해준 조언을 작은 소리로 속삭여 알려주었다. 남이라면, 특히 여자라면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특급 비밀이기에 더더욱 조심했다. 그러나 이안은 듣고 있는 건지, 졸고 있는 건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수진이 하마처럼 또 하품을 하자 옆자리의 우란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어제 잘 못 잤니?”


“응.”  


“왜?”


“어, 그냥... 잠이 안 와서.”


 어떻게 새벽녘의 그 대사건을 알려줄 수 있으리오? 수진은 옥수수 버터구이를 집더니 앞니로 쭉 뽑아먹기 시작했다. 식탁을 바라보며 먹고 있는데 꽃무늬 장식이 그려진 작은 접시가 코 밑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진한 다크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이 올려 있었다.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려지자 티앤 단까오가 거기 서 있었다. 그는 숙면을 취했는지 그녀를 향한 까만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이며 초롱거렸다. 


“어젯밤에 손수 만든 거야. 한 조각만 남기고 내가 다 먹어버렸어. 한번 먹어봐. 고생도 많았는데 이런 것으로라도 위안을 받아야지. 먹고 힘내.”


“정말 고마워. 내가 초콜릿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고.”


 입에서 살살 녹으며 착착 감기는 것이 굉장히 맛있었다. 그녀의 잘 먹는 모습에 티앤 단까오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그 광경을 우연히 목격한 이안의 얼굴엔 대조적으로 쓴웃음이 밀려왔다. 그도 모르게 눈에서 투명 레이저 광선이 튀어나와 티앤을 향해 수차례 쏘아대었다.


‘저 녀석, 또 왜 저러는 거야?’ 


 삐딱하게 째려보던 이안이 번뜩 잠에서 깨어난 듯 머리를 흔들더니 정신이 또렷해졌다. 일부러 그녀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옆자리의 안젤라와 대화도 나누어보았다. 하지만 이상스레 계속 신경이 쓰였다. 다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둘은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안은 피가 담긴 잔을 원샷으로 비운 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일 먼저 침묵을 지키는 복도로 향하였다. 수진이 곁눈질로 지나가는 그를 쓱 쳐다보았지만 따로 부르지는 않았다. 티앤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그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휘파람을 불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리 가 있겠다니 참 모범생 나셨군.” 


 그녀는 자신에게 말한 줄 알고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티앤도 그녀에게 얼굴을 돌리었다. 잠시 그들의 시선이 서로 부딪쳤다. 그녀는 보고야 말았다. 그의 검은 두 눈동자에 가득 소용돌이치던 특별한 섬광을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녀를 설레게 하는 것이 아닌 절절한 애절함을 내비치며 아프게 전해져 왔다. 그녀의 마음 한편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찌릿찌릿 저려왔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자꾸 가슴이 저릿하고 먹먹해졌다.



 이안이 씩씩거리며 복도의 열려있는 문으로 정신없이 들어오더니 아무 데나 걸터앉았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에잇, 또 실크롱 강의가 있나 보네.”


 전에 수업하던 그 교실이었다. 활동적인 일정을 기대한 그로서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다시 수업 중에 보일지도 모를, 수진과 티앤의 오순도순한 모습을 목격할 생각에 벌써부터 속이 꼬이고 머리 꼭대기까지 짜증이 몰려왔다. 


‘내가 왜 이러지?’


 그는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그 위에 고개를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잠이라도 좀 자둘 작정이었다. 뱀파이어였지만 어젯밤을 날로 샜더니 그 역시 몽롱하고 평소보다 몸이 좀 무거운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이 조용히 흘러갔다.


“끄으윽, 끄으윽, 끄으윽~”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앞에서 났다. 


‘이상하네. 누군가 들어온 기척을 못 느꼈는데. 잠시 잠들었었나?’


 그는 두 손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그리고 반쯤 떠진 눈으로 앞을 주시하였다. 앗, 이럴 수가, 그의 두 눈이 번쩍 떠지었다. 흰 돌이 스스로 검은 칠판 위를 긁으며 글씨를 쓰고 있었다. 마치 그것에 생명이 부여된 것처럼 스스로 몸을 세워서는 열심히 움직였다.

         

  나의 심장, 나의 숨결, 나의 사랑인 보석을 훔쳐간 자여, 진짜 주인이 너를 찾으리라.    


 거기까지 쓰고 돌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는 그대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곧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달려 나갔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침묵을 지키는 복도의 어둠 속으로 몸을 내던지며 한참을 달렸다. 그가 지나가면 벽에 걸린 횃불들이 켜졌다 꺼지며 줄기차게 따라왔다. 그러나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싸늘한 전율이 그의 등을 훑으며 지나갔다.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 감이 안 잡히는 복도의 어느 지점에서 그는 멈춰 섰다. 양쪽 벽의 횃불이 켜지고 노란 불빛을 받으며 그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목걸이의 루비가 위치해있는 웃옷을 한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이것은 내 것이다.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


 그의 독기 어린 두 눈동자에서 강렬한 하늘빛이 짐승처럼 내뿜어졌다. 

    



 이안이 교실로 터벅터벅 돌아왔을 때 그곳은 문이 활짝 열린 상태였다. 조용했다. 문 밖으로 막 나오던 카할이 그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정신이 팔린 이안은 보지 못하였다. 그의 무반응에 카할이 달려오며 크게 소리쳤다.


“이안, 소식 들었지?”


“뭐? 칠판에... 적힌 거 말이야?”


 이안은 마치 몰래 감춰두었던 비밀이라도 들킨 듯 화들짝 놀라 대꾸했다. 


“응, 근데 얼굴이 왜 그래? 아침보다 안색이 더 나빠진 거 같아.”


“너도 보았어? 칠판에 적힌 경고 말이야.”


 카할은 지금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무슨 경고?”


“보석을 훔친 자에 대한 경고 말이야.”


“뭐? 너 아직도 잠이 덜 깬 거야? 오늘 실크롱 강의가 없다는데 대체 무슨 말이야?”


“잘 봐봐. 칠판에 분명히 적혀 있잖아.”


 이안은 직접 보여주겠다는 표시로 그의 팔을 붙잡아 교실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칠판을 바라보자 이안의 눈동자와 몸이 심하게 떨리었다. 그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크게 벌어졌다. 칠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실크롱의 오전 강의는 취소되었으니 각자 알아서 개인 시간을 보내도록.


 그는 소매로 눈을 몇 번이나 비비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매번 똑같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의 눈동자가 불안스레 흔들렸다. 그의 이상한 행동에 카할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엔 그가 이안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다. 카할이 부드러운 어조로 타일렀다.


“잠이 많이 부족했나 보네. 어서 가서 좀 자. 수진도 방에서 잔다고 했어.”


 이안은 그에게 끌려 나오면서 고개를 내려 칠판 바닥을 훔쳐보았다. 분명 아까 글씨를 쓰고 떨어진 돌조각이 있어야 하는데 부스러기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헛것을 봤나?’


 불길한 예감이 그의 몸에 살짝 경련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지금이라도 수진에게 달려가 털어놓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어줄지 의심이 되었고, 설령 믿는다 해도 괜한 걱정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혹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봤거나 꿈을 꿨을 가능성도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나버린 후였다. 십분 정도 침대를 구르다가 그가 후다닥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가서 확인을 해야만 했다. 그는 침묵을 지키는 복도로 다시 가보았다. 그러나 교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아무리 밀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완력으로 도저히 안 되자 결국 그는 포기한 채 별궁홀로 되돌아왔다.     

이전 20화 15. 도둑맞은 토르의 망치 -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