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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Aug 27. 2018

15. 도둑맞은 토르의 망치 - 2


 막다른 길이 나타나고 그 끝에 거대한 철문이 서 있었다. 딥언더니아 왕국으로 통하는 석문의 크기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으리으리하여, 앞에 서 있는 그들은 마치 쥐처럼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청 무거워 보이고 손오공의 키 만한 두께의 쇠말뚝 여러 개가 위에서 아래까지 대칭으로 박혀 내려오며 문을 완전히 봉쇄해버렸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가시들이 촘촘히 엉켜진 장미덩굴 쇠사슬이 그 위를 여러 겹 감싸며 지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막기 위해 저렇게까지 했을까?라는 의문이 그들의 머릿속에 번쩍했다. 그토록 찾던 것이 저 안에 있을까? 틀림없었다. 분명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저렇게 꽁꽁 싸놓았으리라. 

 이안과 손오공은 아까 감옥에서 느꼈던 공포를 완전히 잊은 채 점차 흥분하기 시작했다.

 

“여의봉아, 조금만 기다려. 곧 찾으러 갈 테니.”


“저 안에 토르의 망치가 있단 말이지. 너도 곧 내 손에 들리겠구나.”


 이안의 언급에 옆에 섰던 수진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깜짝 놀랐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 그녀는 문으로 달려 나가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안, 토르의 망치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음, 사실 내가 그것이 필요해졌거든.”


“뭐?”


“잠시 빌려가려고.”


“뭐라고?”


“마침 타이밍도 딱 맞잖아. 손오공이 가짜 여의봉을 남겨두고 올 테니 나도 부탁해서 가짜 망치를 대신 두고 나오면 돼. 모두를 감쪽같이 속일 완벽한 계획이라고.”


“미쳤어? 토르의 망치는 딥언더니아 왕국의 것이야. 손오공이야 자신의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왔다 쳐도 넌 원래 그것의 주인도 아니잖아. 어떻게 훔칠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훔치는 게 아니라 잠시 빌리는 거지. 이미 블랙수트가 탈출한 마당에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근데 그 망치는 거인과 괴물을 무찌르는 천하의 무기라며? 그러니 몰래 빌려가 잠시 썼다가 다시 갖다 놓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지금 상황이 앞뒤 재고 말고 할 때가 아니라고. 마왕이 탈출했다잖아, 마왕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넌 왕자가 되어서 남의 나라 성물을 그렇게 우습게 봐도 되는 거야?”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야? 어차피 가짜가 대신 버젓이 놓여 있을 테니 보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겠지. 그리고 마왕이 노리는 것은 일룸니아 왕국이지 여기 지하 깊은 곳은 아닐 거라고. 상황을 보다가 이곳이 더 위험해지면 그때 진짜를 되돌려주면 되잖아.”


“그래도 난 네가 진심으로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온 줄 알았어.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물론 손오공을 도와줄 거야. 그렇지만 너도 말했듯이 난 일룸니아의 왕자야. 결코 내 안위만 생각할 순 없어. 저 망치만 있으면 수백 명,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언제는 그냥 모른 척 숨어 있겠다고 말해놓고선.”


“그래서, 넌 내가 그렇게 숨어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니고. 하지만 방법이 올바르지 않잖아.”


“나도 많이 고민했고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저리 좀 비켜! 혹시 잔해가 떨어져 다칠지도 몰라.”


 이안은 뒤로 가라며 그녀를 가볍게 밀치고는 쇠사슬에 매달려 끙끙대고 있는 손오공을 도우러 달려 나갔다.

 

“안에 보물이 얼마나 많으면 이렇게 단단히 봉해놓았을까?”


 손오공의 말에 이안 역시 신나는 표정을 지으며 날렵한 몸으로 장미 가시들을 타고 올랐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겨우 쇠사슬 두 줄이 바닥에 떨어졌을 뿐이었다. 아직도 풀어야 할 것이 대여섯 개 더 남아있었다. 

 손오공이 말뚝과 쇠사슬이 교차된 지점 뒤에서 잠시 쉬고 있는 동안, 이안은 계속 사슬에 매달려 마법지팡이가 변한 쇠톱으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수진의 등으로 문득 차갑고 날카로운 뭔가가 불쑥 닿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고 바로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이안!”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매우 환한 빛이 그의 얼굴로 반사되었다. 눈이 너무 부셨기에 그는 소매로 눈을 가려야 했다. 곧 소매를 내리고 시야가 잡히자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었다.

      

 딥언더니아 군사들이 그녀 뒤를 완전히 포위해버린 것이다. 그들이 내민 은색 방패들에서 품어져 나온 빛 때문에 암흑처럼 어두웠던 주위는 마치 대낮처럼 환해졌다. 개미떼처럼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 어마어마한 군대의 정열이 가위로 잘리듯 양쪽으로 나뉘었다. 그 사이로 화려한 갑옷과 금도끼로 무장한 누군가가 씩씩거리며 걸어 나왔다. 스톰펌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보다 더 큰 도끼를 머리 위로 흔들어대다가 이안을 향해 쳐들고서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그의 표정이 마치 적군이라도 만난 장수처럼 무시무시했다.


“이런 고얀 것들, 당장 저 어둠의 자식들을 포위하라!” 


 이안이 날렵하게 바닥으로 점프해 내려오자 그의 곁으로 군사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의 곁에서 역시나 포위당한 수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스톰펌 왕은 한껏 분노한 표정으로 그들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시선을 올려 한참 동안 그들을 노려보다가 격분하여 외치었다. 


“나의 추측이 거짓으로 밝혀지길 희망했었는데 역시나 군. 도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예, 저희는…”  


 그녀는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둑질하러 왔다고 당당히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왕은 그들 곁을 지나쳐 문 밑으로 다가갔다. 떨어져서 엉망이 된 쇠사슬 잔해를 목격하고는 그의 눈썹 끝이 바짝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에 휩싸여 두려움으로 물들어갔다. 그의 손에 들린 도끼 끝이 부들부들 떨리며 잔해를 가리켰고 그의 입에서 호통이 벼락 치듯 튀어나왔다.


“이놈들아~ 당장 다시 설치하지 않고 뭐해! 빨리 복구하란 말이야! 이번엔 여섯 줄을 더 감아야 해. 빨리 해!”


 아이들은 처음엔 자신들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어쩔 줄 몰라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포위한 군대가 알아듣고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려 엄한 표정으로 나무라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저 문이 뭔지나 알고 이렇게 해놓은 것이냐?”


“보물실이 아닙니까?”


“뭐? 보물실? 우하하하.”


 이안의 답변에 왕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배를 부여잡고 요란하게 웃어댔다. 뒤의 군사들도 따라 웃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동굴 벽에 메아리치며 매우 시끄러워지자, 왕은 웃음을 거두고 손을 들어 주위를 조용히 시켰다. 몇 초 적막이 흐르는 동안 아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저것이 보물실이 아니란 말인가? 그럼 도대체 뭐지?


 왕은 입술 끝에 비웃음을 내건 채 야리는 눈초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이런 못된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근데 너 혼자서 어떻게 저 무거운 쇠사슬을 풀 수 있었지?”


“손오공이 같이 도왔는데요.”


“손오공?” 


 왕은 자신의 머리에 저장되어 있는 명단에서 그 이름을 찾다가 결국 모르는 자라 판명을 내리고 다시 물었다.


“손오공이 누구냐? 눈을 비비고 살펴봐도 너희 둘 밖에 없는데.”


 이안과 수진은 그제야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동시에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런, 혼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나 봐.”


 화가 난 이안이 주먹을 세게 쥐며 날아다니는 파리나 달리는 쥐가 없는지 주변을 열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의심스레 쳐다보던 왕이 문으로 시선을 돌리었다. 군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전보다 더 크고 위협적인 가시덩굴 쇠사슬을 막 치기 시작한 것이다. 지켜보다가 좀 못마땅했는지 그는 도끼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다시 호통을 쳤다.

 

“그것 갖고는 안 되겠어. 얼른 블랙 아이론에게 쇠사슬 두 개를 더 만들라고 해. 거기 빨간 스카프 두른 죽일 놈아, 동작 좀 빨리 못해? 어물쩍거리다 혹 저쪽에서 문이 허술해진 줄 알고 또 쳐들어오면 어떡할 거야? (조금 전까지 따라 웃으며 구경하던 군사들을 째려보며) 니들도 어서 올라가 일하지 않고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이런 제기랄, 오늘 밤 안으로 완벽하게 복구해놔야 한다고. 어서 하라고!”


 마치 살인마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그는 극도의 불안한 상태를 보이며 자꾸 재촉하였다. 수리작업은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되어갔다. 


 잠시 뒤 철문은 아이들이 처음 봤을 때보다 쇠사슬로 더 꽁꽁 싸매져 완벽하게 봉쇄되었다. 이젠 도저히 저것을 푼다는 건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서 혹시 아까의 그 지하 감옥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이 이안과 수진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었다.


 수리가 다 끝나자 스톰펌 왕은 군대에게 철수를 명하고 아이들을 자신의 서재로 데리고 가라고 시켰다. 그들의 눈을 천으로 감아 가는 길을 보지 못하게 했는데, 그들이 얼핏 느끼기에 전에 들어왔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길 같았다. 계단을 조금 오르는가 싶더니 오른쪽으로 꺾었고 바로 걸음을 멈추라는 명령이 들리었다. 눈을 가렸던 천을 풀자 그들은 어느새 소금궁전 안의 서재 앞에 도착해있었다. 감옥 동굴과 이곳을 연결하는 비밀통로를 방금 통과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군사는 따라 들어오지 않고 문 바깥에서 대기하였다.      



 서재는 한마디로 굉장했다. 둥근 방을 감싸는 모든 벽면에 책꽂이가 천장부터 바닥까지 꼼꼼히 설치되어 있고, 그 안에 꽂힌 어마어마한 숫자의 고서들과 두루마리들이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은은한 램프 불빛 아래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희한하게 이곳의 난로는 벽면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따로 벽돌집처럼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그것의 높이는 상당히 높아 이안도 고개를 살짝 숙이면 그 안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벽돌 난로 속에서 시뻘건 석탄불이 활활 타오르며 실내를 따듯이 데워주었다. 불을 쬘 수 있는 바로 앞으로 하얀 양털 깔개가 바닥에 깔려 있고, 그 뒤로 기다란 가죽 소파가 놓여있었다. 소파 뒤로 원형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책과 종이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그 위를 지도 여러 장이 덮었는데 제일 윗장에는 체스판에서 쓰는 말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곧 스톰펌왕이 갑옷 무장을 해제하고 평상시의 모습으로, 머리 위에 황금 왕관을 쓴 채 혼자 서재로 들어왔다. 그는 그들에게 난로 앞의 가죽 소파에 앉으라고 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책상 의자를 끙끙거리며 끌어와 소파 맞은편에 갖다 놓았다. 그의 왕관 아래 이마에 그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었다. 겨우 의자에 오른 왕의 시선이 그들을 샅샅이 살펴보자 그들은 부담스러워 눈길을 피한 채 그의 장화만 줄곧 쳐다보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석탄이 탁탁 튀어 오르는 소리까지 들려올 정도로 불편한 고요함이 지속되었다. 


 왕은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어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을 그들에게 고정한 채 동굴에서보다 좀 더 부드러운 어조로 추궁하기 시작했다.


“자, 여기는 너희와 나밖에 없다. 그러니 날 속일 생각일랑 하지도 말고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너희는 왜 그 문을 열려고 했지?”


“ ……”


“왜 대답을 안 하는 거냐? 좋다. 그럼 내가 추측한 것을 먼저 들려주지. 너희는 그 문을 열고 거인들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여서는 나의 왕국을 멸망시키려 한 것이야. 지하 광산에서 너희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어둠의 자식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악한 거인들이 너희를 도와주었고, 그 대가로 문을 열어 그들이 침범할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거인은 뭐고 대가로 문을 열다니?’ 


 속으로 당황한 이안이 먼저 입을 열어 항의했다.


“그 문이 거인들을 불러들일 수 있다니요? 저희는 그저 소금궁전의 지하 보물실로만 생각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보물, 보물 타령만 하는데, 설령 감옥 옆에다 보물들을 숨겨 놓았겠느냐?”


“그럼 도대체 뭐였는데 그렇게 문을 꽁꽁 감싸 놓은 거예요?”


 잘못을 시인하기는커녕 당당하게 캐묻는 그의 태도가 왕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의 숨소리가 씩씩 커지고, 목소리는 몇 갈래로 갈라지며 본인이 듣기에도 괴로울 정도로 거칠어졌다. 


“이놈들아, 그 문은 요툰하임으로 향한단 말이야! 이전에 거인들이 딥언더니아를 침범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서 열고 들어왔던 문이야. 그래서 그들이 다시는 이용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꽁꽁 닫아놓은 것이었는데. 그런데 네가 쇠사슬을 마구 풀어헤치니 내 눈에 불이 안 날 수가 있어? 이런, 목에 도끼를 갖다 대기에도 아까운 놈 같으니라고!”


‘요툰하임, 언제 들었었는데. 어디서 들었더라?’


 수진은 그 단어를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머리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당최 기억이 나지 않아 이안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안이 화들짝 놀라더니 큰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는 한층 풀이 죽은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요툰.. 하임.. 요툰하임이라니, 거기는 예전 거인들이 살던 곳 아닙니까? 그곳으로 향하는 문이었다고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왕이 앉은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멀뚱멀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눈빛으로 어서 자신을 따라 하라고 시키자, 그녀도 그의 옆에서 똑같은 자세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목맨 소리로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저희가 큰 잘못을 저지를 뻔했군요.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의 평상시 같지 않게 바짝 엎드리는 태도에 그녀는 불안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동굴 안의 그 끔찍한 지하 감옥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래서 그녀는 이마를 바닥에 아예 갖다 댄 채 그보다 더 애절하고 울먹이는 어조로 사죄를 했다.


“저희는 정말로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감옥으로만 보내지 말아 주세요. 제발이요.”     


 왕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이안은 더 이상 숨기는 것이 상황을 불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모든 것을 다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광산에서 떨어져 지하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그곳에서 오각 정자에 갇힌 손오공을 탈출시키는 이야기까지 솔직하게 모두 이야기했다.


 마왕 블랙수트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알리자 왕의 눈동자는 잠시 흔들렸지만 예상보다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안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왕의 탈출은 분명 그를 덜덜 떨게 만들고 여러 번 점프하고 발을 구를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텐데 말이다.


 자신도 그 소식을 듣고 처음에 얼마나 흔들렸던가? 아니면 그저 농담으로 여기어 한번 웃고 넘길 수도 있는 데 말이다. 그러나 왕은 얼음 같은 냉정함과 모래 같은 차분함을 유지한 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는 살며시 눈을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 마왕은 탈출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아이들의 안색이 새파래지고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이안의 기절할 듯 놀란 외침에 그는 쓰라린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허허,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우리 딥언더니아는 지하에 위치한 나라야. 지하에 갇힌 마왕이 탈출하면서 일으킨 지진을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지. 처음엔 그저 자연적으로 생긴 것으로만 여겼었다. 하지만 일이 터지고 나서야 우리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지.”


“무슨 일인데요?”


“극비라 알려줄 수 없구나. 이안, 너의 이야기는 잘 들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네 말을 믿을 수 없다. ‘오나시아’에서 마왕을 감시할 오각 정자를 지하 깊은 곳에 만들었고, 1000년 넘게 그곳에 갇혔던 손오공을 너희가 구해주었다는 건데, 그럼 손오공은 지금 어디 있지?”

 

“아까 저희와 함께 거기에 있었어요. 분명 변신해서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예요.”


 이안은 생각만 해도 여전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듯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러나 왕은 고개를 여러 번 내저으며 부정하였다.


“너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손오공이란 자를 내 앞에 대령시켜야 한다. 그가 유일한 증거이니까.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지하 감옥에서 평생 썩어야 할 것이야.”


“군대에게 문 주위를 샅샅이 살펴달라고 명령해주십시오. 워낙 둔갑술에 능한 자라 찾기가 쉽지 않을 수…”

 

 바로 그때였다. 군사 한명이 다급히 노크를 하며 서재 안으로 달려 들어와 큰 소리로 보고를 했다.


“원숭이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 문에 설치해놓은 쇠사슬을 풀려고 난리를 쳤답니다. 군사들이 잡으려 하자 그것은 조그만 쥐로 변해 도망치다가 물이 찬 솥단지로 떨어졌고 재빨리 솥뚜껑을 덮어 겨우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걸 어떡할까요?”


“바로 그 자입니다!”


 아이들의 앙칼진 목소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 이리로 데려오라고 시켰다. 



 

 쇠가 두꺼운 것이 엄청 무거워 보이는 뚜껑이 얹어진 솥단지가 그들 앞에 대령하였다. 이안이 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단지 안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노란 비늘을 가진 붕어가 보였다.


“손오공, 어서 나와. 다 들켜 버렸어.”


 이안이 짜증스레 말을 내뱉자, 붕어는 물 위로 팍 튀어 오르더니 옆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지며 몸을 여러 번 회전시켰다. "뿅”소리가 연기와 함께 등장하며 손오공이 본래 모습으로 바뀌어 바닥에 안전히 착지하였다. 온몸의 털이 흠뻑 적셔진 채 그는 두려운 눈초리로 서재를 두리번거렸다. 수진이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귓속말로 지금 처한 상황을 빠르게 전달해주었다. 문의 정체를 듣자 그는 엄청 놀라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럼 보물실은 어디 있는 거요?” 


 손오공은 곧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왕 앞으로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그 모습에 왕보다 더 기막혀하는 이안과 수진이었다. 왕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미리 지레짐작하여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오각정자 안에서 온몸으로 통곡하던 그때와 거의 비슷할 정도의 격렬함으로 점차 격상되어갔다.


“아, 여의봉아, 여의봉아! 너는 대체 어디 있는 것이냐? 여의봉이 없는 나는 연필 없는 학생이고, 무기 없는 병사와 같은 꼴이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여의봉아~대체 너는 어디 있는 것이냐? 당장 내 것을 돌려주오. 당장!”


 마침내 그는 바닥을 대굴대굴 구르며 대성통곡하였다. 처음에 왕과 아이들은 그런 그를 안쓰럽게 여겼다. 하지만 점차 울음소리가 커지자 귀가 따가울 정도로 고통스러워졌다. 더 이상 참지 못할 클라이맥스가 오자, 왕은 의자에서 얼른 내려와 그의 곁으로 달려가더니 그의 어깨를 잡고 살살 달래었다. 그러자 그는 몸을 바닥에 납작 엎드려 보석이 박힌 장화를 신은 왕의 왼쪽 발목을 두 손으로 부여잡은 채 애원했다.


“딥언더니아의 위대한 왕이시여. 부디 이 작고 연약한 동물을 불쌍히 여기시어 저의 여의봉을 돌려주십시오. 제발이요. 만약 안 그러신다면 평생 여기서 이렇게 대성통곡이나 하고 있으렵니다. 저는, 한다면 하는 돌원숭이입니다.”


 그의 은근한 협박이, 특히 이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평생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왕의 결정을 순식간에 부추기고 말았다. 왕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발, 제발 울지만 말거라. 이제 너희의 말을 모두 믿겠다. 사실 난 너희가 마왕 블랙수트의 하수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손오공, 너의 등장으로 모든 의심이 다 풀렸구나. 또한 (이안과 수진을 쳐다보며) 친구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침입해 들어온 너희들의 용기에도 감명을 받았다. 우리 딥언더니아인은 우정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자를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다. 도끼로 너희 목을 후려칠 정도로 속이 시원하구나.”


 빈말이란 걸 알았지만 그들은 순간 목 뒤가 뜨끈해짐을 느꼈다. 왕은 몇 초간 침묵을 지킨 후 드디어 결심한 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손오공을 향한 그의 어조가 다소 엄숙했다. 


“네가 여의봉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증명만 한다면 당연히 그것을 돌려주겠다.”


 눈가의 털이 촉촉이 젖은 손오공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그는 손을 천장으로 바짝 들어 올리며 "만세! 만세!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그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왕에게 물었다.


“근데 얘가 여의봉의 주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죠? 그것에 이름이 적힌 것도 아닐 텐데요.”


“충분히 할 수 있단다. 여의봉은 딥언더니아에서 제일 힘세다고 자부하는 장정 100명의 힘을 합쳐야만 간신히 들 수 있다. 손오공의 말대로 만약 자기가 진짜 주인이라면 그것을 혼자서 들 수 있어야 해. 그렇지 못하면 그는 진짜 주인이 아닌 게지.”


“여의봉의 무게는 일만 삼천오백 kg이에요. 두고 보세요. 저는 이 새끼손가락만으로 거뜬히 들어 올릴 테니까요.”


 밝게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한 그가 새끼손가락을 구부리고 피기를 반복하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의 새끼손가락에 집중되었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왕은 편안한 여유를 보이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는 마치 들으라는 듯이 크게 중얼거렸다.


“그럼 보물실로 가볼까? 여의봉이 너무 무거워 내가 가지고 나올 수 없으니 다 같이 가는 수밖에 없겠군.”


“그런데요, 저희가 지하 감옥에 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저희는 몰래 궁전 안으로 들어와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는데요.”  


 이안이 진짜 궁금한 눈초리로 물었다. 왕은 고개로 수진의 양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램프반지. 그것은 원래 램프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내가 한 가지 기능을 더 추가했지. 힘센 손오공, 내가 앉은 의자를 책상 앞으로 좀 밀어주렴.”


 그는 말을 하는 동안 소파 앞으로 끌어다 놓은 의자 위로 다시 재빨리 올라갔다. 손오공이 그가 앉은 의자를 번쩍 들더니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의자는 책상 앞으로 조심히 내려졌다. 왕이 곁으로 가까이 오라고 손가락들을 끄덕이자 그들은 다가가 책상을 빙 둘러섰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지도를 그가 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소금궁전의 설계도지.”


 그리고 그 위에 나란히 서 있는 체스판의 말 ‘나이트’와 ‘퀸’을 가리켰다. 


“이것들이 각각 램프반지 두 개와 연결되어 있지. 지금 모두 여기 서재 안에 있지 않니? 수진아, 반지 하나를 빼서 친구에게 줘보렴.”


 그녀가 손오공에게 하나를 건네자 그는 그것을 들고 문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나이트’ 말이 스스로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이 쫙 벌어지며 신기하게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이안은 책상에 배를 바짝 갖다 댄 체, 설계도면 여기저기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나 룬 문자를 모르기에 전혀 읽을 수가 없어 보나 마나였다.


“보물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이안이 중얼거리자 스톰펌 왕은 난로 앞에 깔린 양털 깔개를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가려졌던 바닥 한가운데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피아노 건반이 홀로그램으로 붕 떠올랐다. 그는 양 손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곡을 치기 시작했다. 눌러지는 건반에서 파란빛이 현란하게 뿜어져 나왔지만 희한하게도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마지막 음표를 누른 후 그의 양 손이 건반에서 떼어졌다.

 

“방금 친 곡조가 비밀 암호란다.”


 그는 왕관 밑으로 주르르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크르르르~” 


 벽돌 난로 안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리었다. 난로 전체가 살짝 흔들렸다. 활활 타오르는 석탄더미 위로 난로의 천장에서 납작한 석판이 내려오더니 불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이어 검게 그을린 난로 안 뒷벽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뒤로 전혀 그을음이 없는 비밀 계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직 뜨거우니 난로 벽에 가까이 가거나 손대지 말거라. 화상을 입을 수 있어.”


 왕이 앞장서서 후끈한 안으로 들어갔다. 손오공과 수진에 이어 이안은 고개를 살짝 숙여야 했다.
 몇 분 뒤, 밑으로 사라졌던 뒷벽이 위로 올려지며 입구를 막아버렸다. 동시에 석판이 천장으로 올라가며 그 아래 가두어두었던 불이 다시금 타올랐다.


 서재는 텅 비어있었다. 벽돌 난로 속의 불꽃은 방금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서 능청스럽게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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