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오후는 딥언더니아의 평범한 가정방문 체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할은 자신의 집으로 이안과 수진을 초대했다. 예전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어 그들은 별 부담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안은 오전의 일로 여전히 예민한 상태였지만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 눈에 가시 같던 티앤이 보이지 않는 것도 한 요인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카할이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집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그의 어머니가 단박에 뛰어나왔다. 그녀는 아들이 거의 질식할 정도로 꼭 껴안아 준 다음 이안과 수진도 차례로 힘껏 포옹하였다. 이 날은 반가운 손님이 한 명 더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카할의 아버지 미할 캐이브였다. 그는 무사히 물건들을 배달하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매우 반가워하며 그들을 맞이하던 그가 이안의 손을 덥석 잡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을 대신해 캠프비를 내줘서 고맙다. 정말 고마워.”
어색해진 이안이 괜찮다고 여러 번 말해도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안 역시 그와 보조를 맞춰 목을 굽신거렸고, 그렇게 몇 분간 두루미들이 서로 인사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다른 이들의 입에서 웃음폭탄이 팡 터져 나왔다. 다 같이 한바탕 웃고 나서야 그들은 식탁에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카할의 어머니가 막 구워온 옥수수 빵과 진한 코코아 잔들이 식탁에 올려졌다. 잔잔한 시냇물처럼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 정성 들인 음식, 친구, 이야기, 따듯한 우정과 애정, 이런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로도 행복이 무한정 만들어질 수 있으며 주변을 가득 채워 나가는 것을 그들은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미할은 여행 중에 사귄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오두막에서 목격했던 백골단에 대해서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안과 수진 역시 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 때마다 꽤 조심하였다. 미할이 옥수수 빵을 한 입 베어 먹으며 달력을 쳐다보다가 벌떡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신이 난 표정으로 소식을 크게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빵 부스러기가 여기저기로 발사되었지만 모두 안전하게 몸을 대피하여 별 피해가 없었음을 꼭 알려주고 싶다.
“지금 스위티니아 왕국에서는 ‘스위티니아 케이크 축제’ 준비로 온 나라가 정신이 없더구나. 대회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와서 숙소와 대회장을 짓느라 과자와 사탕, 초콜릿이 아주 많이 필요하데. 이번에 약 300팀 넘게 참가하는데 대회가 개최된 이래 최대 규모라 하더군. 그래서 그런지 배달해온 물건들을 내려놓자마자 바로 칼, 오븐판, 냄비 등등 주문을 많이 하더구나. 새로 주문받은 것까지 다 팔고 나면 카할 참가비로 낸 금화 3닢을 제하고도 꽤 남을 거 같아. 그때까지만 조금 더 기다려 줄 수 있겠니, 이안?”
“아니에요. 안 주셔도 돼요.”
그는 정색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미할이 더 난리를 치며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야. 그래도 그게 아니지. 더군다나 내가 갚을 능력이 된다면 갚아야지.”
“맞아요, 아버지.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장사가 잘 되었다는 소식에 카할이 신이 나서 대꾸했다. 이안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렇다면 금화로 주시지 말고 필요한 물품을 대신 만들어서 주시면 안 될까요?”
“그것도 좋지. 최선을 다해 만들어주마.”
“이래 봐도 우리 아버지 솜씨가 블랙 아이런에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으셔. 내가 장담한다니까.”
“저는 딱히 필요한 건 없고요, 음... 수진, 너 뭐 필요한 것 있어?”
그녀는 예전 오두막에서 미할이 직접 소개해주었던 물품들을 기억해 내고는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리며 대답했다.
“파이를 깨끗이 자를 수 있는 디저트 전용 칼도 좋고요. 열기가 세 달 가고 물만으로 설거지되는 냄비도 좋아요. 아무리 봐도 칼이 더 좋을 것 같아요. 할머니께 드리면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하하, 따로 선택할 필요 없이 내가 알아서 챙겨 보내주마.”
“고맙습니다.”
수진의 얼굴에 함박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옥수수 빵 한 개를 통째로 먹기 시작했다. 카할이 코코아 한 모금을 급히 삼키다가 뜨거워 켁켁거렸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버지를 향해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그동안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심히 자책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집에 오시면 바로 물어보려 했는데,‘학 쫓아버리기 축제’가곧 돌아오지요?”
“그렇지. 매년 요맘때였지, 아마?”
“2주 뒤래요. 곧 포스터가 붙을 거래요.”
어머니가 대신 답해주자 카할의 얼굴이 금세 환해지며 좋아라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레는 표정으로 주먹을 쥔 채 식탁 주위를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미할은 그가 왜 그러는지 충분히 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며 이안과 수진을 향해 제안했다.
“올해에도 예외 없이 아주 볼만한 경기가 될 거야. 이번에는 너희들도 다 함께 축제를 구경하면 참 좋겠는데. 캠프가 끝나고 별 일 없으면 잠시 우리 집에서 머물다가 축제까지 보고 떠나는 게 어떻겠니?”
“아주 좋아요! 그렇지, 이안? 근데 ‘학 쫓아버리기 축제’는 뭔가요?”
이안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수진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카할이 저쪽에서 식탁으로 단번에 달려오더니 그녀의 두 손을 붙잡으며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는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였고 그런 모습이 이안의 흥미를 끌기 시작했다. 그 역시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축제였던 것이다.
“수진, 지상에 펼쳐진 옥수수 밭을 보았지?”
“응, 카할. 아주 넓더라.”
“옥수수는 딥언더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양식이야. 1년 내내 옥수수가 열려. 그런데 가끔씩 불청객들이 날아들어 훼방을 놓지 뭐야. 바로 ‘학’이야. 그들은 멀리서 날아와 곧 추수를 앞둔 옥수수를 따먹거나 긴 다리로 휘저어 밭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지. 그래서 예전부터 딥언더니아에서는 농부들이 순번을 정해 밭에서 그들을 내쫓았어.
하지만 어느 특정한 날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학들이 떼 지어 몰려온데. 그래서 그날을 나라 자체적으로 ‘축제’라는 이름을 내걸어서 다 함께 힘을 합쳐 학들을 내쫓고 우리 식량을 보호하는 거야.”
“와, 듣기만 해도 아주 재미있는걸. 나도 학 정도는 달려가서 내쫓을 수 있어.”
동물원에서 보던 학을 떠올린 그녀가 자신 있게 말하자 옆에서 가만히 듣던 미할이 껄껄거렸다. 이어 카할과 그의 어머니까지도 따라 웃었다. 그녀뿐 아니라 이안조차 그들이 왜 그렇게 웃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수진아, 과연 네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장담 못하겠구나. 왜냐면 이건 생명을 내걸고 하는 아주 위험한 축제이거든. 매년 사망자와 부상자가 나오니까 말이다.”
“학이 독수리나 매처럼 위험한 종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위험하다는 거죠?”
이안의 대꾸에 미할은 바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방금 부인이 잔에 부어준 코코아를 호호 불어가며 두어 모금 마시고 난 후 또 다른 제안을 했다.
“나랑 좀 있다가 같이 밭에 나가보자꾸나. 그러면 이해가 될 거야. '백번 말해줘도 못 알아듣던 놈, 한번 보여주니 단박에 아네.'란 딥언더니아 격언처럼 말이다.”
“아버지, 올해에는 제가 ‘학과의 결투’에 나가 싸우는 것을 친구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요. 나가도 괜찮죠?”
"카할, 안 된다, 무조건 안 돼! 어미 속을 또 뒤집어놓겠다는 거냐?”
어머니가 무섭게 화를 내자 그는 미할에게 간절히 애원하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가 부인의 눈치를 슬슬 살피자 그녀는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그는 "휴우~”하고 한숨을 내쉰 뒤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바닥을 위로 들어 올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아들을 타일렀다.
“네 어머니가 저렇게나 반대하니 안 되겠다. 좀 더 커서 나가렴. 아직은 너무 어려.”
“다 큰 후에도 절대로 안 된다. 왜 굳이 거기에 또 나가려고 하는 거니? 네가 잘못되면 우린 어떻게 될지 생각 안 해봤니? 아주 날고 긴다는 용사도 나갈까 말까 한 결투를 왜 기를 쓰며 나가려고 그래? 안 그래도 요 몇 달간 예전보다 학이 나타나는 횟수와 숫자가 훨씬 늘어났다고 다들 걱정인데, 축제날은 오죽하려고. 그냥 편안히 살자. 응, 아들?”
어머니의 애원에 카할은 퍽 실망한 표정으로 빈 의자로 다가와 힘없이 앉았다. 그의 고개와 어깨가 푹 숙여졌다. 옆에서 수진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다독거려주었다.
이안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미할을 향해 물었다.
“‘학과의 결투’는 뭔가요?”
카할이 수진의 격려에 힘이라도 얻은 듯 고개를 번쩍 쳐들고 아버지를 대신해 신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하는 도중에 일어나더니 학이 나는 것처럼 두 팔을 허우적대기도 하였다.
“그것은‘학 쫓아버리기 축제’의 하이라이트야. 용맹한 용사들이 학과 일대일로 싸우는 것이지. 싸워서 누가 가장 오래 버티는지 시합하는 거야. 하지만 한 가지 규칙이 있어. 절대로 학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면 안 돼.”
“학은 용사를 죽일 수 있고?”
“응, 이안. 하지만 우린 하면 안 돼.”
“왜 그런 거야?”
“그건 수진, 끔찍한 재앙이 재발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야. 아주 오래전, 한 용사가 결투에서 학을 죽인 적이 있었데. 그러자 화가 난 학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 자리에서 바로 그를 죽여 버렸데. 게다가 그들이 관람석까지 침범해 관람객들을 다치게 했고.
나중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은 동족을 죽인 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데. 어쨌든 이후 결투에서 학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이 생겼어. 관람객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이안과 수진은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카할의 넘치는 흥분을 가라앉을 필요가 있어 보여 더 이상 묻지 않은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우승자에게는 10 가마니의 옥수수와 20인분의 쥐고기가 제공되지. 하지만 대부분은 경기에 걸린 상금보다 일생의 명예를 위해 싸운다고 봐야 해. 우승자는 딥언더니아의 영웅처럼 떠받들어지거든. 경기장 위에 그의 석상이 세워지기도 하고 말이야.”
그때 미할이 옷에 붙은 빵 부스러기를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걸린 낡은 갈색 모자를 머리에 덮어쓰면서 신나는 어조로 그들을 불렀다.
“자,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지상으로 나가보지 않으렴?”
미할 부자와 이안, 수진은 원형광장과 수없이 이어진 동굴들을 지나 지상의 옥수수 밭으로 나왔다. 저 멀리 정면으로 뾰족한 꼭대기 정상에 눈이 쌓인 설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버티며 서 있었다. 여기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기에 실제 가까이 다가가면 그 높이가 어마어마할 듯싶었다.
"안녕하시오, 흰모자노인장!"
미할이 그 산을 향해 모자를 들더니 가볍게 목례하며 인사를 했다. 한순간 그의 목소리가 마치 연인을 만난 젊은이처럼 상쾌하고 싱그러웠다. 저 설산의 이름이 '흰모자노인장'인가 보다. 눈으로 만든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장 아래로는 초록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옥수수나무들이 살랑이는 바람에 초록 파도처럼 부드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황금 수레바퀴처럼 해가 떠올라 있고, 햇살이 초록 파도로 뻗쳐 내려오며 바람에 따라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렸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수진은 마음껏 바깥공기를 들이마셨다. 햇볕을 쬐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안보다 키가 훨씬 더 큰 나무들 끝에 달린 옥수수는 이미 알들이 통통히 오른 것이 꽤나 알차 보였다. 쪽빛 잉크를 풀어놓은 듯 새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초록 물결의 향연은 매우 아름다웠다. 이안과 수진은 두루 바라보며 풍경을 가슴 깊이 담으려 했다.
한쪽에서는 딥언더니아 농부들이 열심히 추수를 하고 있었다. 옥수수에 비해 키가 훨씬 작은 그들은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명이 날카롭게 끝이 구부러진 긴 쇠막대기로 줄기 윗부분을 낚아채어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면 다른 동료가 거기에 달린 옥수수를 땄다. 수확이 끝난 줄기는 튕겨지며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농부들의 어깨에 멘 바구니마다 옥수수로 가득 넘치고 그들의 얼굴에는 수확의 기쁨과 여유가 흘러넘쳤다. 이안은 몇 개를 따서 그들의 바구니에 직접 넣어주었다. 미할과 카할도 밭으로 나온 김에 옥수수 수확을 도왔다.
바구니가 꽉 찬 농부는 여기저기 흙으로 덮어 숨겨놓은 철제뚜껑을 열어 그 안에다 수확물을 붇곤 했다.
일행에서 좀 떨어져 혼자 일하고 있던 수진의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구름이 지나가나 보네.’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일어서려는 순간,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때렸다.
“학이다! 학이야! 거기 조심해!”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상에나, 옥수수나무들 사이에 비치는 하늘로 한 마리의 학이 휙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한순간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평소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학의 크기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보다 몸집이 거의 열 배나 더 커다랬다. 거대한 흰색 학의 청록색 부리는 뾰족하고 무시무시했다. 더군다나 그것이 벌어지며 소리를 지를 때마다 입 안 가득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더 큰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그것의 긴 두 다리에는 끝이 날카롭고 무지막지한 검정 발톱이 매달려 있었다. 학의 붉은 두 눈은 무장이 안 된 그녀를 표적으로 삼으며 그녀 주위를 천천히 배회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분명 학인데, 아주아주 오래전 이 땅에서 멸종해버린 익룡과 꽤 비슷하게 보일 정도였다.
학은 그녀 위를 빙빙 돌다가 드디어 결심한 듯 빠르게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수진, 도망가!”
카할의 날카로운 비명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손에 든 옥수수를 내던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학의 거대한 날갯짓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 주위의 나무들을 뒤로 확 넘어뜨리며 흔들어댔다. 완전히 노출되어버린 그녀의 몸이 한층 더 움츠려 들었다. 팔로 고개를 푹 감싼 채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웠다. 학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그런데 그때였다.
“이것 좀 먹어라! 받아먹어라!”
여러 명의 세찬 고함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농부들이 학을 향해 옥수수를 던지고 있었다. 학은 부리로 잘도 받아먹다가 다시 낙하하려 하자 그들은 막대기의 날카로운 끝을 위로 흔들어 찌르려고 위협하였다. 그들 중에는 미할도 포함되었다. 수진은 그 틈을 이용해 겨우 빠져나왔다. 아니, 이안과 카할이 공포에 휩싸인 그녀를 질질 끌어당겼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며 멀리 떨어진 밭으로 인도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허옇게 질려있었다. 학은 자신의 목표물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후 주위를 몇 바퀴 빙빙 돌며 그녀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결국 포기한 채 그대로 공중으로 비상했다. 거대한 두 날갯짓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태풍처럼 옥수수 밭을 세차게 흔들어댔다. 그것은 저 멀리 허공으로 날아갔다.
“괜찮아?”
이안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괜찮지 않다는 표시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저쪽에서 미할이 패닉 상태가 되어 농부들과 함께 달려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바로 용서를 구했다.
이안이 걱정스레 그녀를 쳐다보다가 화가 치밀어 오른 듯 그에게 따져 들었다. 미할은 그녀의 손등을 손으로 토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아까 카할이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잡식성으로 곡식뿐 아니라 고기도 먹는단다. 옥수수를 먹기 위해 밭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가끔 그걸로 충분하지 않으면 우리를 사냥감으로 노려 낚아채가기도 하지. 하늘에서 비행하다 가장 약해 보이는 자를 목표물로 삼아 사냥을 하는 거야. 그들의 발톱에 걸린 자는 흰모자노인장 너머 있는 둥지로 끌려가 새끼에게 산 채로 뜯겨 먹힌다고 전해지지.”
그들은 모두 미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흰 눈이 쌓인 산꼭대기를 넘으며 날아가는 학이 이젠 아주 조그만 점으로 보였다. 점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늘 보니까 ‘학과의 결투’는 미친 짓이에요. 목숨이 걸린 경기라면 나라에서 막아야지 왜 계속하도록 놔두는 건지 모르겠어요. 용맹스러운 용사들이 저런 식인 새한테 잡아먹히면 나라 전체적으로 큰 손해잖아요? 카할, 어머니 말씀을 무조건 들어야 해. 그분이 진짜 옳은 거야.”
그녀는 공포와 두려움이 당최 가라앉지 않아 말을 마구 쏟아냈다. 그리고 방금 전 겪었던 그 무서운 장면이 다시 떠오른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안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는 위험해야 재미있는 법이지.”
카할이 그녀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 듯 씩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죽을 뻔한 상황을 그저 재미로 치부하는 그의 반응에 수진은 화가 났다. 그래서 반론을 제기하려 입을 벌리고 팔을 휘두르려는 데, 온화하지만 굳건한 표정의 미할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더 이상의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고 확고한 분위기를 풍기었다.
“무섭다고 자꾸 숨기 시작하면 끝이 없단다. 그리고 우리에겐 지켜야 할 소중한 옥수수가 있지. 그들에게 잡아먹히거나 식량부족으로 죽거나 우리에겐 똑같이 생존이 걸린 문제란다.
우리 조상들은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것과 직접 맞서 싸우는 거라고 하셨어. 그래야만 소중한 것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그래서 매년 이 무시무시한 경기를 치르는 거란다.
‘학과의 결투’에서 목숨을 걸고 열심히 싸우는 용사들을 지켜보면서 나 같은 평범한 자도 어느새 용기를 얻게 되거든. 그것으로 우리는 두려움과 싸워 소중한 것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는 거야.”
그 당시는 미처 몰랐지만, 그의 말은 조약돌이 되어 아이들의 마음속 호수에 잔잔히 던져졌나 보다. 수면 위로 꽤 긴 파장의 물결을 일으키기까지 하면서.
훗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것은 이안의 결정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일룸니아 왕국과 브라잇 동맹의 미래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고, 또한 수진의 인생이 바뀌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정작 미할 자신은 이때 내뱉은 말의 파급력을 전혀 알지 못했고, 역사의 물길을 바꾸는 한 획이 되었음을 그때도 전혀 예상치 못했거니와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평온해진 밭에서 다시 일을 시작한 농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은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왜 축제날만 갑자기 학이 많이 나타나는 건가요?”
“그건 말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이 ‘흰모자노인장’ 너머 멀리 위치한 요툰하임 숲에서 날아온다는구나. 우리가 축제를 여는 그 날이 요툰하임에서 ‘거인들의 댄스파티’가 있는 날 이래. 거인들이 춤을 추니 온 동네와 숲이 방방 울리고 시끄럽겠지? 그래서 깜짝 놀란 학들이 떼를 지어 둥지에서 벗어나 이쪽으로 날아온다는 거야.
하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이미 오래전 블랙수트마키아에서 거인들 대부분은 사라졌잖니? 댄스파티를 열 이도 없는데 아직도 계속해서 몰려오고 있으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요툰하임이라고요?”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감이 온 그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카할은 이안의 관심 있는 반응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것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다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러고 보니 예전 학에게 잡혀 요툰하임으로 갔다가 무사히 돌아왔다고 자랑하던 이가 있었잖아요? 이름이 뭐였었죠?”
“사기꾼 레빌 말이구나.”
“맞아요. 그자예요. 이안, 몇 년 전에 ‘레빌’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한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어. 난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때 그가 했던 말이 농담처럼 딥언더니아에 유행했었지. 아주 웃기는데 한번 들어볼래?
아 글쎄, 자기가 학에게 납치를 당해 한참을 날아 그것의 둥지로 떨어졌는데 그곳이 요툰하임 숲이었다는 거야. 전설에서 말하던 그대로 말이야. 둥지에는 새끼 한 마리가 있었는데 안 잡아먹히기 위해 항상 가지고 다니는 칼로 학의 발톱을 찔렀고 그만 둥지 밖으로 자신을 내팽개쳐 버렸데. 그런데 운 좋게도 지나가던 거인의 머리 다발 위로 떨어져서 살았데. 그 거인이 친절히 도와줘서 딥언더니아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지. 정말 말도 안 되게 웃기지 않니?”
“후후,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벌써 거인의 위장에 들어가고도 남았겠다.”
미할이 손뼉을 치며 아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안은 궁금하여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다소 심각하게 물었다.
“하지만 거인족 중에는 착한 심성을 가진 과보족도 있잖아요? 과보족은 당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요. 혹시 레빌이 만난 자가 그 종족이 아니었을까요?”
“얘야, 과보족이건 아니건 전혀 상관이 없단다. 왜냐면 그는 사실 지독한 거짓말쟁이거든. 어릴 때부터 입만 열면 죄다 거짓말이었지. 오죽하면 별명이 ‘사기꾼 레빌’이겠니?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마.
한 번은 그자가 나한테 가짜 감기약을 팔려고 내놓은 적이 있었단다. 난 화가 나서 이 다리로 뻥 차서 그를 날려버렸지. 감히 누구한테 사기를 치려고. 비쩍 마르고 재수 없어 보이는 겉모습도 딱 사기꾼이야. 거인을 들먹여 마지막으로 큰 사기 한방 제대로 치려고 그런 얼토당토한 말을 꾸며 댄 거야. 분명해.”
미할과 카할이 잡담을 하며 걸어가는 사이 이안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수진이 그의 옆으로 다가와 소곤거렸다.
“무슨 생각해?”
그는 그녀의 질문을 듣지 못한 채 혼자만의 상념에 푹 빠져 있었다. 그녀가 그의 팔을 쿡쿡 찌르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그는 달려가서 카할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질문했다.
“혹시 그 ‘레빌’이라는 자,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미안하지만 그는 지금 여기 없어. 1년 전에 다시 실종되었거든. 빚쟁이를 피해 어디론가 도망쳤다는 말도 있고, 농담으로 그 착한 거인이 그리워 다시 요툰하임으로 돌아갔다고도 하고.”
농부들은 추수 마무리를 하였다. 밝게 머리를 비추던 햇살은 어느덧 늦은 오후의 샛노란 옷으로 갈아입고서 마지막 빛을 발하였다. 그들은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안과 수진은 운 좋게도 솜씨 좋은 카할 어머니의 저녁식사를 얻어먹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수진은 맛있는 음식에 신이 나서 좀 전의 공포와 두려움이 단번에 사라진 것처럼 들떠보였다. 이안 역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쥐피가 가득 담긴 잔을 받고 감동을 받았다. 식사 내내 그의 입에서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카할의 어머니는 아까의 학 사건을 들은 후 일을 당한 당사자의 얼굴보다 더 창백하게 질리었다. 하지만 그녀의 맛있게 먹는 모습에 다시 예전의 안색을 되찾았다. 그런데 어머니의 아래턱으로 거무튀튀한 수염이 어느새 얄팍하게 자라나 있었다. 분명 집을 떠나기 전에는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검문소 질문 중에 '딥언더니아 여자들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턱수염이 나기도 한다.'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구나. 아까 속 썩인 카할 때문일까, 아님 나 때문일까?’
수진이 신기한 눈초리로 그녀의 수염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과자와 차까지 마시고 실컷 놀다가 그들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푸다크 별궁으로 돌아오는 도중에도 이안은 혼자 뒤에 따로 떨어져 걷고, 수진과 카할 둘이서 앞장서며 대화를 나누었다. 가끔씩 그녀가 뒤돌아 불렀지만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뭔가 일을 꾸미려는 거야.’
수진은 물어보기가 점점 두려워졌다. 신경이 쓰이고 긴장이 되는지 한 번씩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러나 이안이 먼저 언급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제발 자신이 추측한 그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