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톰펌 왕과 옆에 나란히 앉은 손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까지 도달하자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넋이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저렇게 잘 생길 수도 있구나.’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들 정도로 손님이 매우 아름다웠던 것이다.
비단실처럼 부드럽고 우아하게 구불거리는 금발머리, 난로 불빛에 반사되어 마치 대리석 표면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하얀 피부, 냉혹해 보이지만 수정같이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완벽한 얼굴선과 귀족적으로 뻗은 코, 날씬하면서도 적당히 근육이 붙은 탄탄한 몸매에 딱 맞게 재단된 회색 모직 양복까지. 마치 고귀함과 우아함이란 성분이 첨가되어 완벽한 남성미를 뽐내는 크림을 온몸에 짝짝 바르고 나온 것만 같았다.
수진은 흡사 그가 지상에 강림한 천사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위해 눈을 여러 번 비비며 관찰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그가 살짝 입술 끝을 올려 웃음을 지었다. 그의 얇은 입술 아래로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드러났다. 뱀파이어였던 것이다.
한순간 그에 대한 환상이 살짝 깨졌지만, 그래도 사람을 끄는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다는 점에 대해 그들은 깨끗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왕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들 최면에서 깨어난 듯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왕에게로 돌리었다. 손님과 비교하여 그의 외양이 너무 초라하고 못나 보여 다시 한번 깜짝 놀라는 그들이었다.
“그래, 나한테 할 말이 뭐지?”
“옆에 손님이 계신 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잠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떠신지요?”
이안의 말에 손님이 나른한 몸짓으로 소파에서 일어나려 하자 왕이 그를 저지했다.
“아니, 그냥 앉아있게. 같이 듣자고. 어차피 자네도 딥언더니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잖나? 저 아이들이 광산에서 살아 돌아온 이야기도 막 들었고 말이야.
이분은 나의 오랜 친구인 ‘샤를르 리’란다. 뱀파니아 왕국 출신이지.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어서 말해 보거라. 왜 날 보자고 했지?”
이안이 입을 벌리려던 그때였다. 카할이 재빠른 동작으로 소파 곁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다 꿇고 앉았다. 그리고 왕을 우러러보며 비장하면서도 강단 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저희가 오늘 왕을 뵈러 온 이유는 거인들에게 빼앗긴 토르의 망치 때문입니다.”
“토르의 망치? 안타깝게도 그것은 현재 딥언더니아에 없지. 그래, 뭘 더 말하고 싶은 게냐? 이제 너도 알았으니 다른 이들이 아는 건 시간문제이겠구나.”
왕은 왜 비밀을 누설했냐는 듯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이안과 수진을 쓱 째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카할의 양 옆에 똑같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이안이 살며시 고개를 들더니 대담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간청하였다.
“왕이시여. 저희가 요툰하임으로 가서 토르의 망치를 되찾아오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곧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무섭게 화를 내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입에서 침까지 마구 발사되어 그들의 머리 위로 부슬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제정신들인 게야? 요툰하임이 무슨 아이들 동화책에나 나오는 곳인 줄 알아?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하는 말이더냐?”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토르의 망치는 이곳 딥언더니아 왕국에 속한 것입니다. 마왕 블랙수트가 탈출한 이상, 성물을 '다크 동맹'인 악의 무리 손에 더럽히게 둘 순 없습니다. 누군가가 결국 해야 할 일이라면 저희가 하겠습니다. 가서 그것을 꼭 되찾아오겠습니다.”
“대답한 이안은 들으라. 나는 결코 허락해줄 수 없다. 그곳으로 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죽으러 가는 길이란 말이다. 게다가 너희는 아직 어리다. 앞으로 살날이 창창히 남은 이들에게 그런 무거운 임무를 지어주다니, 나 자신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왕이시여.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카할이 애절한 목소리로 간청하며 바닥에 이마를 바짝 대어 절을 했다. 수진도 자동적으로 그를 따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고개를 힘껏 내저으며 거부의사를 표할 뿐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왕의 코와 입에서 짐승이 내뱉는 것 같은 거친 숨소리가 튀어나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그는 한동안 씩씩거리며 아무 말도 잇지 못하다가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자 이안을 향해 물었다.
“하나만 더 묻겠다. 요툰하임으로 가기 위해 너희가 전에 지하에서 발견한 그 문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냐? 내가 쇠말뚝과 쇠사슬을 풀어 문을 열어주고 너희가 들어가면, 안에서 거인이 귀여운 표정으로 웃음을 띠며
“어서 오세요, 귀여운 손님. 힘드실 텐데 자, 여기 찾으시던 망치 대령했습니다.”라고 할 것 같으냐?
이 바보들아, 거인이 얼마나 크고 무시무시한지 알기나 하느냐? 난 아직도 여전히 그날의 악몽을 꾼단 말이다. 악몽을 꾸고 난 아침마다 지하로 내려가 사슬과 말뚝을 수차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단 말이야. 그런데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지금 확실히 알려주겠다.
만약 너희가 거기로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들어간 후 문은 바로 닫히고 이전보다 더욱 단단히 봉쇄될 것이다. 재수가 없어 안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절대로 열어 줄 수 없느니라. 알겠느냐? 그 안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단 말이야. 아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 다시는 그 일을 입에 담지 말거라.”
“안심하십시오.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다른 방법으로 요툰하임에 갈 것이거든요.”
이안의 말에 왕의 눈이 왕방울 만하게 커졌다. 더불어 샤를르 리의 보라색 눈동자도 호기심에 보석처럼 빛이 났다.
“도대체 어떻게 간다는 것이냐?”
“학을 타고 날아갈 것입니다.”
“뭐, 하악?”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오자 왕은 말문이 턱 막혀 발음까지 이상하게 꼬였다. 그의 목에서 침이 꼴깍 삼켜지는 소리만 들릴 뿐 주위는 고요하였다. 이어 카할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보충설명을 이어갔다.
“전설에 따르면 학의 둥지가 요툰하임 숲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는 학을 타고 그곳으로 갈 예정입니다.”
“너는... 너는... 그 전설이 확실한 정보라고 믿고 있는 것이냐?”
'이런 바보 천치들 같으니라고.'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눈에서 불꽃이 튀고 부르르 떨려오는 왕의 목소리에 카할은 잠시 머뭇거렸다.
순간 머리 뒤통수로 집채만 한 파도가 불현듯 강타해오는 것만 같았다. 카할의 눈앞이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와 친구들은 단순히 그것이 사실일 수 있다는 가정을 믿고서 여태껏 일을 진행시켜왔었던 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오래된 전설이라는 전제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말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만약 진짜로 갔는데 전혀 다른 곳이라면?
카할뿐 아니라 수진과 이안도 당황하여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그들의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바래졌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나 보다. 전설과 동화가 '진짜 그럴 수 있을 거야.'란 순수함으로 여러 겹 포장되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무조건 믿어도 될 만한 사실이나 정보로 싹 둔갑해버렸으니 말이다.
왕이 씁쓸한 눈초리로 그들을 쳐다보다가 이내 탄식했다.
“아,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전설만 믿고 그곳에 가겠다니 참으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구나.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들이니 겁이 없어 그렇겠지. 그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돌아가 잠이나 더 자도록 하여라. 이건 왕으로서 명령이다.”
“하하하, 왕이시여, 아쉽게도 그 전설은 전혀 헛소리가 아닙니다.”
미소를 지은 샤를르 리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다람쥐처럼 민첩하면서 뱀처럼 유연하고 기린처럼 우아했다. 처음부터 유난히 이안을 주시하던 그가 여전히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옥구슬 같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 전설은, 왕에게는 참으로 애석하게도 이들에겐 참으로 희망적이게도 사실입니다. 이곳으로 매년 날아오는 학들은 ‘거인의 목욕탕’이라 불리는 폭포 너머의 요툰하임 숲에 살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학을 이용해서 간다면 분명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전혀 무책임하거나 말도 안 되는 계획은 아닌 게지요.”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 직접 그곳에 가 보았나?”
“아니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목격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망치를 빼앗아간 사악한 거인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군요. 요툰하임은 굉장히 방대한 지역이거든요. 어쨌든 저에게는 이들의 방법이 꽤나 괜찮게 들리는데요. (이안을 바라보며) 그러면 말이에요, 그곳에 도착한 후에 어떻게 망치를 찾을 계획인지 한번 물어봐도 될까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중요한 점은 거인에 비해 저희가 덩치가 작으니 몰래 숨어 다니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그쪽 상황을 봐가며 다음 계획을 세울 겁니다.”
이안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답하자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더욱 반짝거렸다. 이안은 아까부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가 점점 불편해지는 중이었다. 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샤를르 리가 재빨리 시선을 돌려 왕에게로 향하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왕의 표정은 다행히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져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는 듯 이젠 타이르는 어조로 아이들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결심은 잘 알겠다만 아무리 봐도 안 되겠구나. 용사도 감당하기 힘든 거인을 어찌 너희 같은 애들이 대항할 수 있겠느냐? 까딱 발각되는 날엔 바로 그들의 밥이 되어버릴 텐데. 이미 지하 감옥의 그 난장판을 목격했기에 무슨 말인지 잘들 알겠지? 요점을 말하자면, 망치는 이제 그만 잊어버려라.”
“허락을 안 하신대도 저희는 꼭 갈 겁니다. 이미 저와 이안은 결정을 내렸으니까요.”
카할의 간청은 왕에게 거의 반 협박처럼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불쾌히 여기지 않은 채 혼자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그때였다. 옆에서 침묵을 지키던 수진이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먹을 불끈 쥔 채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주변 분위기보다 더 무겁게 깔리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저도 같이 갈 예정이니 그리 아시옵소서.”
“뭐라? 수진 너도 말이냐?”
사색에서 깨어난 왕이 화들짝 놀라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남자아이들이야 그나마 이해가 간다만, 약해 보이고 별다른 능력도 없어 보이는 그녀가 영 미덥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안과 카할은 아까부터 꾸역꾸역 참아왔던 불만이 순간 터져버렸는지 무서운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사냥개가 몰아 짓듯 그녀를 꾸짖었다.
“넌 도움이 아니라 방해만 된다니까.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이안, 네 걱정이나 하지 그래!”
“수진, 너한테는 너무 위험해. 이안이야 뱀파이어니까 잘 안 죽을 거고, 나야 체구가 작아서 잘 안 들킬 거야. 그런데 너는 아니야. 그냥 여기 남아 있어. 그게 진정으로 우리를 도와주는 거야.”
“카할, 만약 너희들만 간다면 나 혼자 학에게 잡히든 매달리든 어떻게든 따라갈 테니 그렇게 알아!”
계속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녀와 그런 그녀를 말리려고 진땀을 흘리는 두 아이들. 그들 사이의 실랑이를 왕은 의자에 앉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샤를르 리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상체를 아래로 숙여 그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왕이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왕은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곤소곤 답하였다.
“농담하지 말게. 자네도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많은 군사들조차 거인 하나 앞에서 쩔쩔매었는데 저런 애송이들은 어떨 거 같나? 안 봐도 그림일세. 들키자마자 바로 죽음이야. 아니, 들키기 전에 거인을 보고 바지에 오줌을 싸거나 거품 물며 기절하고 말걸. 암, 그렇고말고.”
“오히려 저들의 수가 적은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거인들 몰래 망치만 훔쳐갖고 나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들과 싸우러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아이들이니 어른보다 훨씬 민첩할 겁니다.
지나간 이야기로, 간달프 마법사가 모은 반지원정대에서 민첩하지만 보잘것없는 호빗 둘이 그 누구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한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었습니까? 이번 일도 저들 주장처럼 충분히 승산 있습니다.”
왕이 연신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가 더욱 달콤한 목소리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가끔 어른이 해결 못하는 문제를 아이가 해결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그건 그들이 우리보다 생각을 적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생각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간단히 해결할 문제도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풀어나가려 하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보기엔 무모해 보이지만 의외로 그게 먹힐 때가 종종 있거든요. 이번에도 같은 경우라고 사료됩니다만. 더군다나 허락을 못 받아도 무조건 간다고 저리 생고집을 부리지 않습니까? 그냥 보내주시지요.”
왕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입장을 정하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번쩍 뜨고는 이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헛기침을 하자 아이들이 말싸움을 멈추고 그를 주목하였다. 짧고 굵은 한마디가 그의 붉은 수염 사이로 새어 나왔다.
“허락하겠다.”
그들은 언제 말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는지 다 잊어버렸다는 듯, 서로의 팔을 부여잡으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깊숙이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왕은 의자에서 내려와 그들 앞으로 다가오더니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으며 직접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모두의 오른손을 자신의 손바닥 아래에 모아 겹쳐놓고는 엄숙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맹세를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가벼운 임무가 아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우리 딥언더니아를 위해, 아니 브라잇 동맹을 위해 큰 용기를 내준 너희들에게 진심으로 감동받았다. 오히려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럽구나.
딥언더니아의 왕으로서 너희들의 이름은 딥언더니아 왕국뿐 아니라 브라잇 동맹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위대한 영웅들로서 기록될 것임을 브라잇동맹사에 손을 얹고 맹세하겠노라.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리고 또 하나, 망치를 가지고 꼭 살아 돌아오라. 이건 왕으로서 내리는 무조건적 명령이다.”
‘메리슨 폰데 캠프’의 폐막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의 추억과 기억이 참가자들의 눈앞에 영상처럼 흘러갔다. 행사는 소금궁전 앞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지금 그곳은 준비로 한창 바빴는데 케이크와 파이, 과자가 테이블 위에 잔뜩 차려져 있고, 개막식 때 한 번 본 적이 있는 황금 연단이 번쩍이며 또다시 놓여있었다.
그들은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서로의 손을 붙잡으며 그동안 쌓인 추억들을 이야기했다. 서로 웃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특히 수진이 그들 중 제일 많이 눈물을 보였다. 그녀가 안젤라와도 그럴듯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난 후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왕허준이 그녀의 눈에 밟히었다.
롤리마을의 이상민을 쏙 닮은 아이. 그러나 아무도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고, 그 또한 먼저 다가가 말을 걸지 않았다. 혼자 뚱한 표정으로 테이블 앞에 서서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진 나머지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마지막을 좋게 헤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많이 아쉽네. 그동안 좀 더 잘 지낼 걸 그랬다. 그렇지?”
그녀가 아쉬움 어린 표정으로 그의 옆에서 나긋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녀 쪽으로 아예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무시하며 묵묵히 먹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작별인사를 건네자 그는 귀찮다는 듯 홱 자리를 피하더니 연단 쪽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이 울긋불긋 해지고 속에서 열불이 났다. 왜 먼저 인사를 하자고 했는지 후회막심이었다.
‘저러니 누가 좋아하겠어.’
그녀가 겨우 화를 삭이고 있는 데 케이크 먹기를 막 끝낸 티앤 단까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단번에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놀랐지만 그동안 들었던 정 때문에 어색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가 포옹을 풀고 생크림과 아몬드가루가 잔뜩 묻은 입을 오물조물 움직였다.
“마지막이라니 너무 아쉽다. 근데 오늘 폐막식 후에 누가 마중 나오니?”
“아무도 안 와. 난 ‘학 쫒아버리기 축제’까지 참가하고 떠날 거야.”
“와우, 대단하다. 너 혼자서?”
“아니, 이안이랑 같이. 잠시 카할의 집에서 머무를 거야.”
“진짜 재미있겠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돌연 눈빛에 차가운 기색이 싹 지나가며 그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의 입술이 퉁 내밀어진 것으로 보아 화가 나거나 좀 삐진 것도 같았다. 그녀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의 시선을 슬슬 피해 딴 데를 바라보았다. 어색함을 피해줄 뭔가를 찾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하늘이 도우시사, 짜잔 뭔가 일이 터지었다.
어느새 연단 옆으로 다가온 연두색 의상의 악단이 시끄럽게 나팔을 불기 시작한 것이다. 행사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주위가 부산스러웠다. 흩어져 있던 군중들이 자동적으로 연단 주위로 몰려들었다. 수진도 앞으로 따라나서려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티앤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낚아채었다. 그리고 그의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억센 힘에 휘둘려 그만 뒤로 휘청거리었다. 균형을 잡은 후 심히 놀란 표정으로 그녀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또다시 보고야 말았다. 그의 검은 두 눈동자 안에 한순간 소용돌이치는 특별한 섬광을 말이다.
그는 매우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녀에게 살짝 몸을 기대어 중얼거렸다.
“우린 꼭 다시 만날 거야.”
악단의 팡파르가 시끄럽게 터져 나옴과 동시에 소금궁전의 웅장한 대문이 활짝 열리었다. 스톰펌 왕과 버핏 위원장, 실크롱, 마스쿠, 블랙 아이런, 돌비 마스터 외에 여러 관계자들이 안에서 한 줄로 나란히 걸어 나왔다. 단정히 빗겨진 붉은 머리와 잘 다듬어진 수염, 황금 왕관과 은 갑옷을 두른 왕이 황금 도끼를 흔들어대며 준비된 연단 위로 올라가자, 따라오던 관계자들은 연단 뒤로 빙 둘러서서 아이들 쪽을 바라보았다. 음악인지 소음인지 모를 곡이 길게 연주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연단 바로 옆에 서 있던 위원장이 몇 발짝 앞으로 걸어 나오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쉽게도 벌써 헤어질 시간이 되었군요. 이번 캠프에는 비록 8명밖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브라잇 동맹’이란 이름하에 모인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는 바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메리슨 폰데 캠프가 다시 개최될 수 있었던 데에는 딥언더니아 왕국의 위대한 스톰펌 왕의 깊은 관심과 따듯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에게 고마움의 박수를 힘차게 보냅시다. 거기 이안과 카할, 그만 수군거리고 나처럼 열렬히 박수 좀 치지요?
또한 여러분을 지도해준 강사님들에게도 애정 어린 박수를 보내지 않으렵니까? 짧은 기간이었지만 딥언더니아 왕국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웠으리라 확신합니다. 캠프 위원장으로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불상사도 있었지만 (그는 도끼눈으로 수진과 이안을 살짝 째려보았다) 다 잘 해결되어 이렇게 폐막식까지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던 점 무척이나 기쁘고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10년 뒤에 캠프가 다른 동맹국에서 (이때 그는 오나시아 왕자 허준을 향해 표나게 눈을 깜빡거리며 눈짓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왕자는 봤는지 아닌지 알 수 없도록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철저히 무시하였다. 기분이 팍 상한 위원장이 찡그린 표정으로 말을 더듬으며) 개..최...개최될 수 있도록 저 또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인생은 짧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길다고도 하죠. 앞으로 우리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만약 다시 마주친다면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가족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눕시다. 왕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수료증을 수여할 것입니다. 제가 호명하면 단 앞으로 나오세요. 카할 캐이브!”
카할은 마치 전쟁터에서 이기고 온 장수처럼 위풍당당하게 연단 앞으로 걸어갔다. 스톰펌 왕이 수료증을 들고 크게 읽어나갔다.
“제11회 메리슨 폰데 캠프 수료증
(딥언더니아 왕국)에서 온 (카할 캐이브)는 딥언더니아 왕국에서 개최한
메리슨 폰데 캠프에서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완수하고
훌륭한 모범을 보이며 진정한 용기와 우애를 몸소 실천하였기에
본 캠프의 수료증을 수여하는 바이다.
또한 (카할 캐이브) 그대는 죽을 때까지 딥언더니아 왕국에 언제든지 찾아와
환영을 받는 귀한 손님이며 소금궁전을 방문할 수 있는 특혜를 갖는다.
3001년 우정의 달 11일
딥언더니아 왕국의 스톰펌”
위원장이 차례차례 호명한 7명에게도 왕은 직접 수료증을 읽고 일일이 수여해주었다. 그 증서에는 개막식 때 찍었던 단체 기념사진이 함께 클립으로 끼워져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장난치면서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이때만큼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고 서 있었다.
곧이어 마지막 행사인 왕의 폐막식 연설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미리 엄숙한 분위기를 잡으려고 악단은 음울하면서도 어두운 곡을 깔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팔을 불던 한 악사가 계속 삑사리를 내는 바람에 이루려던 분위기는 완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손수 연주곡까지 일일이 정해주었던 위원장의 얼굴은 마치 독약이라도 마신 것처럼 보랏빛으로 창백해져 실수한 그 악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실 왕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음악이 연주되는 내내 그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음악이 끝나고도 좀 되어서야 위원장의 부름에 깨어난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왕이시여, 연설을 하셔야지요.”
왕은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아이들과 군중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얕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뱃가죽 안의 오장육부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걸쭉한 목소리로 작정한 듯 말을 꺼내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각자 나라로 돌아갈 여러분에게 이 말만큼은 꼭 해주고 싶소.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어떤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맙시다. 절대로요. 무섭다고 피하거나 숨지 맙시다. 딥언더니아의 용맹한 선조들이 그들보다 몇 십 배, 아니 몇 백 배나 큰 거인들과 싸워 이겼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떠올립시다.
적에 비해 우리가 너무 작고 연약하고 미천하게 느껴지더라도 서로 손에 손을 붙잡고 하나로 뭉친다면 결코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개의 나뭇가지는 약하나 수십 개의 나뭇가지들이 뭉쳐지면 함부로 부러뜨릴 수 없음을 늘 기억합시다.
평화로운 시절에 파묻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희망이란 밝은 꿈을 다시 가슴속에 지피며 나가 용감히 싸웁시다.
브라잇 동맹이란 이름하에 동맹국들이 다시 하나로 뭉쳐질 그 날, 3,000년 전의 블랙수트마키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신령스러운 화이트 드래곤과 왕관 독수리, 이안 1세의 영혼이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할 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정의와 공명의 다른 신이 계신다면, 동맹을 지켜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서처럼 진정한 승리의 기쁨과 대대손손 누릴 위대한 영광을 다시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브라잇 동맹이여, 용감히 나아가라! 브라잇 동맹이여, 당당히 승리하라! 그대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을지어다!”
군중들은 깜짝 놀라 거의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버핏 위원장마저 지금 왕이 캠프의 폐막 연설을 하는 것인지, 아님 살벌한 전쟁터에서 마지막 연설을 하는 것인지 당최 구분이 가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오직 이안과 수진, 카할이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들만이 이곳에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였다.
갑자기 주변이 흐물흐물해지더니 무대의 불이 하나씩 꺼지듯 점점 깜깜해졌다. 사람들이 하나 둘 어둠에 묻혀 시야에서 사라졌다. 폐막식장도 연기처럼 소용돌이치며 없어졌다. 앞으로 닥칠지 모를,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몸서리쳐질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차가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철문이 우레와 같은 소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는 바닥을 뚫고 올라와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 앞으로 스톰펌 왕과 그들 세 명이 덩그러니 남은 채 서 있었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정면의 검은 문을 뚫어져라 주시하였다.
저기를 열고 들어가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무도 몰랐다. 좋을지 나쁠지, 행복하게 살게 될지 결국 비참하게 죽게 될지, 세상의 그 누구도 절대 모를 일이었다. 왕과 그들은 근심과 고민, 걱정과 두려움으로 얼굴이 굳어지며 군데군데 그늘이 번져갔다.
문득 천장 어디선가 새어 나온 한 줄기의 하얀 광선이 어두운 문 위로 강렬히 쏟아져 내렸다. 주변이 밝아졌다. 그들은 암흑을 물리치려는 빛줄기를 열심히 응시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빛이 조금씩 문을 적시며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검은 문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각자의 마음속에 뭔가 출렁이며 물결이 일었다. 꽤나 놀라운 발견이었다. 낙담하는 자신들한테도 의지하고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이 있긴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
그건 바로 다 잘 될 거라는 굳센 믿음과 처연하게 주변을 비추는 저 빛줄기처럼 한 가닥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해보는 용기였다.
실패해도 어쩔 수 없어. 저 문을 열고 당당히 맞서야만 해. 피한다고 계속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두려워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결국 그것이 옳은 일일 거야.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자 그들의 얼굴에서 그늘은 사라지고 한결 편안한 미소가 지어졌다.
주변이 환해지며 어둠이 성큼 물러났다. 이내 사라졌던 군중들이 하나 둘 다시 나타나 보였다. 커다란 철문의 환상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여기는 폐막식장이었고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주변 분위기가 어색하고 웅성거리자 몽롱한 왕은 고개를 내저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황금 도끼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당당하고 우렁차게 선포하였다.
“제11회 메리슨 폰데 캠프의 폐막을 선언합니다.”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