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어째 문이나 별다른 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계속 복도만 이어졌다. 정말 불안하고 가슴 조마조마한 일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그들은 누군가가 살짝 이름만 불러도 화가 날 정도로 긴장의 끈이 조여져 갔다. 흑염소는 수진 옆에 딱 붙어서는 길을 인도할 의향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게 꽤 걸은 것 같은 그때였다. 앞서 가던 카할이 뭔가를 발견하고 앞으로 막 달려 나갔다. 다른 이들도 따라 달렸다.
그리고 보았다. 길이 없어 꽉 막힌 막다른 벽을.
그리고 읽었다. 거기에 삐뚤삐뚤 새겨진 붉은 글씨들을.
“암탉이 울면 벽이 열리리라.”
카할이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으나 이게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지. 그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빌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암탉이 어디 있다고? 이미 다 돌로 변해버린 마당에.”
“할 수 없어요. 우리가 암탉처럼 우는 수밖에. 셋 하면 다 함께 울어요! 하나, 둘, 셋!”
“꼬꼬댁”
“꼬르르르”
“꼬끼오”
“콕끼오”
그들은 이안의 제안대로 닭의 날갯짓까지 따라 하며 마구 울어댔다. 거인의 성에서 이런 행동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모두들 나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진, 너 혼자서 울어봐! 암탉은 여자잖아.”
울기를 그만둔 카할이 제안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양 팔을 옆구리에 낀 채 펄럭 펄럭 날갯짓까지 하며 곱고 어여쁘게 울기 시작했다.
“꼬끼오오~~ 꼬끼오오~~꼬오끼이오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앞의 벽이 흐물흐물해지더니 한가운데가 쩍 갈라지며 통로가 벌어진 것이다. 날쌔게 그곳을 통과하자 등 뒤로 벽이 다시 막혀버렸다.
안은 어둡고 차가운 방이었다. 중간에 우물 하나만 달랑 놓여 있는데 입구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고 오랫동안 버려진 듯 황폐하였다. 그곳으로 다가가려다 수진이 멈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깜짝 놀라 외쳤다.
“어머, 염소가 못 들어왔어. 어떡해?”
“지금 염소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이안이 신랄하게 말을 내뱉으며 그녀의 어깨를 돌려세우고 우물 쪽으로 떠밀었다. 그 꺼림칙한 동물을 떼어놓으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 그였다. 우물벽은 바짝 말라있었고 바닥은 꽤 깊어 보였다. 레빌이 어두운 안쪽을 뾰족한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어. 바깥이랑 연결되어 있나 봐. 여기 계단 비슷한 것도 있는데.”
“제가 먼저 내려가 볼게요.”
수진에게서 램프 반지를 받아 낀 카할이 역시 지하세계의 후예답게 돌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바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반지의 수정을 돌려서 켰다. 주변을 살핀 후 괜찮다고 외치자 한 명씩 천천히 내려갔다. 마른 지 오래되어 돌에 이끼가 끼어있지 않아 전혀 미끄럽지 않았다. 모두가 안전히 내려오자 주위를 정찰하던 카할이 비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안내했다.
“저기 통로가 이어져 있어.”
아마도 예전에 자연스레 물이 차고 빠지던 물길이리라. 그러나 벽과 바닥은 이미 완전히 말라 만지면 먼지가 날릴 정도로 건조했다. 과연 이런 곳에 토르의 망치가 있을지 다들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자신들을 이끌고 온 운명의 힘을 믿고 나아갈 수밖에. 게다가 바람에서는 나무와 꽃냄새가 섞여있었다. 좋은 징조인 것 같았다. 그땐 그런 줄로만 믿고 있었다.
해골 계단 사이를 유유히 지나 계단 끝에 우아하게 도착한 남자에게로 흑염소가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그는 거인들을 돌려보낸 바로 그 자였다. 그가 흑염소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것의 머리통은 점점 작아지더니 몸속으로 쪼그라들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세 개의 멍멍이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예전 푸다크 별궁의 수진의 방을 침범한 적이 있는 바로 그 지옥의 개였다. 붉은 광선을 뿜어내는 6개의 눈이 그를 바라보며 반갑게 꼬리 치자,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의 머리를 차례차례 쓰다듬어주었다.
“잘했어, 펜리스. 이제 네 명의 귀염둥이 실력들 좀 봐볼까?”
우물 바닥에서 이어진 통로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에 아주 살짝 물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물이 풍부한 샘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앞 바닥에 웬 물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공처럼 매우 동그랗고, 그들이 바라보는 쪽으로 붉은 실핏줄 같은 것이 혼잡하게 엉켜있었다.
호기심이 든 그들은 재빨리 그것을 지나쳐 반대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수진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으악! 이것은 눈알이잖아!”
그랬다. 방금 눈에서 뽑힌 것처럼 싱싱한 눈알이었다. 사람의 것보다 커서 거의 테니스공만 했다. 우물 안에 눈알이 있다니,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고 소름이 끼쳐오는 그들이었다. 그것의 눈동자는 아주 새파랗고 투명하게 반짝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계속 쳐다보면 볼수록 두려움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보석처럼 아름답고 영롱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끌어당기는 마력이 그 안에 숨어있기라도 한 듯 말이다.
이안이 그것을 손바닥에 들어 올려 살피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앗, 여기 조그맣게 이름표가 붙었는데. 오딘? 오딘의 눈알인가 봐?”
“오딘(아래 보충설명 참조)이 누구야?”
수진이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다른 이들 역시 모르겠다며 고개를 도리도리 했다. 그들은 이안의 손에 들려진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갑자기 신기한 현상이 포착되었다. 파란 눈동자가 불길처럼 타오르더니 점점 망치 모양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그들은 바로 정신을 차리었다. 레빌이 연민이 담긴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는 쯧쯧 하면서 눈알을 처음 놓인 그대로 내려놓는 이안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걸음을 재촉하였다. 수진이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오딘의 눈알은 불길이 꺼져가는 초처럼 점점 빛을 잃으며 어둠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방향을 완전히 틀기 전에 마지막으로 돌아보자 밤바다의 등대처럼, 아니 밤하늘의 별처럼 안광이 한번 번쩍거리었다. 마치 그녀에게 작별인사라도 하듯이 말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통로는 점차 넓어졌다. 그리고 물이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곧 작은 개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점프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폭이었지만 흐르는 속도는 매우 세고 빨랐다. 이안이 냇가 위와 아래를 왔다갔다 하며 지팡이빛으로 자세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 물이 흘러나가는 출구 좀 봐봐. 누가 일부러 뚫어놓은 것 같잖아? 물이 들어오는 입구는 저리 울퉁불퉁하고 이끼도 옆에 끼어 있는데 이건 너무 깨끗이 잘려나갔잖아? 이 단단한 암석이 말이야.”
마치 자로 대고 자른 것 같은 사각형을 이루는 배출구를 그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카할이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여기 물이 말랐던 거구나.”
“그럼 누군가가 일부러 우물을 마르게 했다는 거야?”
수진이 눈을 치켜뜨며 묻자 이안이 확신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봐야지. 분명 누가 여기까지 들어와 일부러 물구멍을 뚫은 거야. 이렇게 반듯이 뚫린 것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절대 아니니까.”
“누가 그런 짓을? 혹시 아까 거인들이?”
레빌이 두려움에 휩싸인 얼굴로 묻자 이안은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답했다.
“거인이 들어오기에 통로가 너무 작아요. 아마 우리 정도 크기의 사람이나...”
“그럼 그때 아저씨가 목격했던 방울을 흔들던 남자?”
카할이 이어 묻자 이안은 침묵했다. 그의 마음에 솔직히 켕기는 구석이 있긴 했다.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누군가가 이리로 유인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혹시 방울을 흔들던 남자일까? 아님 봉인에서 풀려난 마왕 블랙수트?
그러나 이안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에 더이상 그들의 공포를 자극하는 것은 절대 불필요했다.
“잘 모르겠어.”
그는 무심한 듯 대답하고 개울을 폴짝 뛰어넘었다. 그리고 수진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그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뛰어넘었다. 레빌과 카할도 별 어려움 없이 건넜다. 그녀는 걸으면서 뒤에서 레빌이 스치듯 하는 말을 살짝 엿듣고 말았다.
“우물을 황폐하게 만들고 오딘의 눈알까지 빼내버린 아주 나쁜 놈이야. 방울을 흔든 그놈이 틀림없어. 원, 토르의 망치만 찾으면 잽싸게 튀어야지, 그런 무지막지한 놈한테 괜히 개죽음당하지 말고 말이야.”
순간 그녀는 그런 무지막지하게 나쁜 놈이 그들 앞에 짠하고 나타나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망치도 못 찾고 그의 말처럼 개죽음을 당한다면 자신의 짧은 13년 인생이 참으로 가엽다는, 긴박한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슬프고 감상적인 생각들이 물밀 듯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어느새 막다른 길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폭이 너무 좁아서 겨우 두 명이 누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벽으로 막혀 더 이상의 길은 없었다. 당황한 그들은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 위로 직사각형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아까 배출구처럼 칼로 쓱싹 자른 듯 인위적인 모습이었다.
“저기도 일부러 뚫어놓았군.”
이안이 찬찬히 살피며 이어 말했다.
“근데 저기를 어떻게 올라간다?”
묻는 레빌이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뱀파이어는 점프력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너도 한 번 해보지 않겠어?”
이안은 있는 힘껏 점프를 해보았다. 그 후로 여러 번을 더했지만 한 번도 그곳에 닿지 못했다. 기어올라가 볼까 했지만 위에서 흐르는 물방울로 벽 표면이 아주 미끄러웠다. 결국 그는 생각다 못해 그녀에게 파란총알을 꺼내라고 했다. 건네받은 그가 그것을 펼쳐보려 했지만 폭이 너무 좁아 반밖에 펴지지 않았다. 실망한 채 도로 핸드백에 집어넣던 그녀는 안에서 웬 종이 꾸러미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얼른 그것을 꺼내어 펼쳐 보였다.
딥언더니아의 지하정원에서 신은 적 있는 카무신들이었다. 캠프 폐회식이 있기 전날 푸다크 별궁에서의 마지막 밤, 그녀는 혼자 몰래 하루 공사가 끝난 지하정원을 찾아가 창고에서 카무신 3켤레를 빌려갖고 나왔다. 그녀의 이름으로 사인한 차용증까지 놓고 나왔으니 절대 훔친 것은 아니라고 당당히 증명할 수 있었다.
이안은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감추지 못하였다. 평상시 덜렁거리고 겁이 많은 그녀였지만 가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도움을 줄 때면 매우 기특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레빌까지 총 4명이었지만 챙겨 온 신발은 단지 3켤레. 하지만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이안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그것을 신고 벽을 타기 시작했고, 제일 먼저 올라간 카할이 신발을 던져주자 이안이 받아 신고 냉큼 올라왔다.
도착하고 보니 또 다른 동굴이 이어지고 있었다. 천연적으로 생긴 자연 동굴이었다. 램프 반지와 마법지팡이에 달린 빛에 의지하여 그들은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길은 위로 향해져 있었고 올라갈수록 너비가 넓어지더니 곧 드넓고 평평한 동굴광장이 나왔다. 종유석과 석순들이 사원 기둥처럼 쭉쭉 올라가고, 한쪽에 맑은 샘도 있었다. 그들은 샘에서 목을 축이고 잠시 쉬면서 수진이 챙겨 온 비스킷을 나눠먹었다. 나무와 풀, 꽃냄새가 섞인 싱그러운 바람이 앞쪽에서 불어왔다.
그런데 카할이 주변에서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커다란 바위 옆으로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잔뜩 쌓인 새둥지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것을 관찰하는 동안 그의 램프 반지에서 나온 빛이 우연히 옆의 바위벽을 살짝 비추었다. 별안간 이안과 수진이 깜짝 놀라 그곳으로 달려왔다. 레빌도 따라오는데 그의 입에서 감탄인지 신음인지 구분이 안 가는 소리가 내뱉어졌다.
“으으흐흠. 저게 다 뭐래?”
빛이 머무는 갈색이 도는 평평한 바위 표면 위로 날카로운 끝으로 마구 문지른 듯한, 아이 그림인지 낙서인지 모를 것이 그려져 있었다. 타원형 같기도 하고 삼각형 같기도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다만 엄청나게 큰 것을 그리려고 한 점은 분명했다. 자세히 보니 꼬리도 있고 벌린 입 사이로 이빨 비슷한 것이 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서둘러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었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오르면서 수진이 먼저 그들 사이의 침묵을 깨트렸다.
“우리 말고도 여기 누군가 더 있나 봐요.”
그러나 다들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붉은 성으로 들어와서 여태까지의 과정을 돌이켜보았을 때 왠지 좋은 징조는 아닐 것 같았던 것이다.
잠시 후 공기가 상쾌해지고 실내는 밝아졌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쳐 들어오는 출구가 나타나자 그들은 기쁜 나머지 그리로 뛰어갔다. 이글거리는 빛이 하나, 둘, 모두를 꿀꺽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