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처럼 보이는 등을 가진 코모도왕도마뱀이 사막 위를 날아가듯 질주했다. 그것의 긴 꼬리가 따라 흔들리며 모래 위로 물결무늬를 찍어내자 어느새 휘감아버리는 바람이 불어와 무늬는 모래 밑으로 사르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안과 수진이 그것의 등 위에 타고 있었다. 그는 살아 꿈틀대는 뱀을 매단 지팡이를 그것의 머리 앞으로 들고서 방향을 조정하고 있었다. 도마뱀을 어떻게 잡았는지 여기서 밝히지 않기로 한다. 이야기를 하자면 좀 징그러울 수 있으니까.
“수진, 저기가 ‘키릴장막’이야! 드디어 ‘브라잇 동맹’에 도착한 거야.”
그의 기쁜 외침에 뒤에서 졸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사막이 끝나는 초원 위로 하늘에 닿을 듯 어마어마한 높이의 매끈한 바위 장막이 위풍당당하게 솟아올라 양옆으로 길게 펼쳐졌다. 햇빛을 받아 도자기처럼 하얗게 빛나는 장막의 신성한 에너지가 물씬 넘어와 단번에 그녀를 압도하였다.
‘저 너머로 내가 살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겠구나.’
그녀의 마음속에 잔잔하던 호수가 경이로움과 기대감으로 물결치며 일렁거렸다.
도마뱀이 초원으로 들어서자 한편에 주차된 코발트블루색의 지프와 간이 식탁이 보였다.
“지원 아저씨! 히든벅!”
그녀는 도마뱀에서 뛰어내려 지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간이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던 지원이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어 주었다. 히든벅도 그 옆에 있었다. 그는 밤새 날아와 여기서 제일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원이 좀 전에 지프로 도착했다고 전했다. 지난밤 한밤중의 사냥꾼들과 엮인 일을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이안과 약속했기에, 그녀는 그것에 대해 일절 말을 꺼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건 일행 모두가 무사하다는 점이니까.
지원이 지저분한 간이 식탁 위를 치우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가장 먹고 싶은 것이 있니?”
“치즈피자가 먹고 싶어요. 치즈가 가득 얹어있는.”
그는 주변에서 돌을 줍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은 돌들을 식탁에 내려놓고는 마법지팡이를 꺼내어 주문을 외웠다.
“플라잉이글드래곤, 3인분 치즈피자세트로 변해라!”
“펑”하는 소리, 허연 연기와 함께 돌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연기가 사라지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즈피자 3판, 얼음이 차인 콜라 주전자, 오렌지주스 주전자, 감자튀김, 샐러드 등 음식과 그릇들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식탁에 나타났다.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어 피자 한 조각을 들어 한 입 베어 먹어보았다. 정말 꿀맛이었다. 지원과 히든벅도 각자의 피자 앞에 앉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쭉쭉 늘어나는 모차렐라 치즈가 그들의 입 주변에 덕지덕지 붙었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안은 왠지 앉아있기가 무안했는지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뜨려 하자, 지원이 피자가 가득 든 입을 움직여 겨우 말했다.
“주스가 없어요. 왕ㅈ..”
“어허, 여기선 그런 호칭 쓰지 말라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주의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히든벅의 타박에 그가 순순히 수긍하는데 꼭 교장 선생님께 혼나는 학생 같았다. 수진이 이안을 바라보자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 자리를 떴다. 함께 식사하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워진 나머지 그녀는 지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기, 마법을 이용해서 피를 만들 수는 없나요? 그러면 이안이 매번 사냥 나갈 필요가 없잖아요?”
두 어른은 충격을 받았는지 아주 놀란 표정으로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의문을 눈에 가득 품고서 말이다. 그녀는 묵묵히 콜라를 마시며 “그냥 그렇게 되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사실을 밝히자면 사냥꾼들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비밀에 부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이제 힘들게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과 그의 정체를 안 후에도 별 부담 없이 행동하는 그녀를 보고서 서로 기쁨의 눈빛을 교환했다. 예상보다 일이 순탄하게 풀린 것이다.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지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해보긴 해보았지. 그러나 피만큼은 만들어지지 않더구나.”
“당연하지. 피는 생명의 근원인데 어찌 감히 마법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이오?”
히든벅의 핀잔에 그녀는 일부러 무심한 듯 물었다.
“그가 뱀파이어인 것을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다. 사실 말이지, 왕ㅈ..아니 그도 불과 몇 달 전에는 14살의 평범한 인간이셨어. 아니, 평범하지는 않으셨지.”
그녀는 지원의 말에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입 안의 치즈가 맞은편의 히든벅 얼굴로 분사될 뻔하였다. 다행히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내가 예전에 말한 적 있지? 그가 제임스의 칼에 찔렸었다고.”
“네. 그때 그의 아버지인 선왕은 돌아가시고 그만이 살아남았다고.”
“죽었다가 뱀파이어로 되살아나신 거란다. 어쨌든 한 번 죽기는 한 것이지.”
영화를 찍나 싶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녀의 머릿속으로 폭풍우가 거세게 들이닥쳤다. 빅락을 건넌 후로 어째 듣는 이야기의 강도가 점점 세지는 듯했다. 이러다 나중에 이안의 아버지가 사실은 금붕어라고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어떻게 뱀파이어로 되살아난 거죠?”
“우리뿐 아니라 그도 전혀 모른단다. 자신이 왜 변했는지 말이야. 여전히 커다란 의문으로 남아있지.”
히든벅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걱우걱 피자만 먹어댔다.
“인간이었을 때 이안이 어땠는지 무척 궁금하네요.”
“그전에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는 아주 사랑스러운 분이었다 하더구나. 너처럼 잘 웃고.”
지원의 답변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글쎄요. 지금으로선 상상이 잘 안 되네요. 그는 좀 냉정하잖아요?”
“그는 민트 초콜릿을 아주 좋아했어. 매일 식후 20개씩 먹었지.”
불쑥 말을 꺼낸 히든벅이 코에 붙은 치즈를 혀로 핥아먹자 지원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감탄했다.
“정말이요? 그래서 내가 초콜릿 먹는 것을 그렇게 부러워하셨구나. 근데 히든벅은 어떻게 알았어요? 왕자.. 아이고 또, 그가 직접 말해줬나요?”
“프렐리야의 흰사슴이 모르는 것이 있겠소? 왕ㅈ, 아니 그의 식성에 대한 소문은 어디서든 들려오기 마련이오. 사실 말 나온 김에 까놓고 말하자면, 진짜가 아닌 이런 마법으로 만들어진 음식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더이다. 작년 여름인가, ‘브라잇 동맹 데일리’에 기사가 났었는데, 마법 음식을 많이 먹으면 생명이 단축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하던데. 혹시 읽어보았소?”
이미 자기 몫의 피자 한 판을 다 끝내 놓고 무슨 딴소리냐 식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지원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오. 하지만 난 굶기보다 그냥 먹고 빨리 죽겠어요.”
그러냐고 비위를 맞추며 고분고분 대답할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예상 밖의 말이 나오자 히든벅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식사가 끝이 났다. 지원은 지프차를 축소시키고 텐트 미니어처를 확대시켰다. 히든벅은 뭐가 꿍한지 텐트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지원은 수진과 식탁에 남아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오후의 아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고 맑았다.
“아주 좋아. 밤새 넘어가는데 전혀 문제없겠어.”
“밤새 넘어가다니, 어디를요?”
“어디긴 어디겠니? 바로 저 키릴장막이지.”
“네? 저렇게 높은 곳을, 저기를 어떻게 넘어가요?”
그녀의 목소리 끝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장막 아래 어딘가에 문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넘어가다니, 지금 한밤중에 암벽등반이라도 하자는 말인가? 그녀의 눈앞이 글자 그대로 컴컴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달빛이 만든 길을 따라가면 된단다. 너도 들어가서 눈 좀 붙이렴. 밤새 넘어가야 하니 말이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보름달이 두둥실 모습을 드러낸 저녁이 되어서야 이안은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미 텐트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소시지 꼬챙이들이 불 옆에 세워져 있고, 모닥불 위에 스스로 떠 있는 솥에서는 조금 남은 호박 수프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런데 그새 손님들이 와 있었다. 세 명의 낯선 동양인들이 일행과 함께 앉아 저녁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의아한 눈빛으로 그들을 주시하며 수진 곁으로 다가와 앉은 이안이, 수프를 떠먹는 그녀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누구야?”
“저분들도 장막을 넘으려고 기다리고 있대. 조금 전에 텐트 앞을 지나가는데 지원 아저씨가 저녁식사에 초대했어.”
그는 그녀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 있었어? 목소리가 왜 그래?”
그녀는 그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식욕이 떨어졌는지 수프를 다 끝내지 못하고 소시지도 먹다 말았다. 그녀에게 무슨 큰 고민이 있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그가 큰 목소리로 묻자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지원이 재빨리 그를 소개하였다. 그런데 그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신분과 이름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제 아들... 아니 농부 친구 아들인 안드레아입니다. 안드레아, ‘오나시아식’으로 인사드리렴.”
이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지원은 능청스레 윙크를 했다. 히든벅은 그의 초반 말실수가 영 못마땅한지 잠시 그를 노골적으로 째려보았다. 여기서 솔직히 해두자면, 지원은 전형적인 검은 눈의 동양인인 반면 이안은 전형적인 파란 눈의 서양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자관계란 설명은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저 인간이랑 같이 다니다간 왕자의 정체가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겠어. 저런 멍청이 같으니라고.’
히든벅은 인상을 찌푸려졌지만 침을 꼴깍하여 겨우 불만을 집어삼켰다. 이안이 마지못해 오나시아 관습대로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 인사했다. 손님들도 똑같이 인사를 한 후 각자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1) 첫 번째 사람의 이름은 ‘이장’이고, 한국 서울에서 왔단다. 한국이란 말에 수진과 지원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40대 중후반 나이에 180센티가 넘는 키, 호리호리한 몸, 동그란 안경을 썼고 커다란 눈과 높은 코, 하얀 피부는 귀공자 같은 이미지를 물씬 풍기었다. 게다가 값비싸 보이는 검은색 정장에 고동색 뾰족구두를 신은 멋쟁이였다.
자신은 ‘산신령전자’회사의 회장 아들인데, 아버지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 때문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단다. 수진이 손뼉을 치며 그녀의 엄마와 할머니의 스마트폰 모두 산신령 제품이라고 전하자 그는 싱글벙글하며 기뻐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내린 명령은 다음과 같은 사연을 지니었다.
‘이장’의 할아버지는 ‘오나시아’ 출신으로,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무작정 길을 떠나라고 명령을 내렸단다. 그래서 그는 발길 닫는 대로 끝없이 걷고 걷다가 어느 날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보니, 한국의 수도 서울에 도착해 있었다. 전자제품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예상하고 회사를 설립하였으니 바로 ‘산신령전자’였다. 지금 회장, 즉 이장의 아버지가 그 아비의 뜻을 이어받아 열심히 경영을 한 결과, 산신령전자는 한국을 넘어 세계시장에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장실 창문으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투명하게 닦여진 유리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몇십 층 아래로 추락하였다. 깜짝 놀란 회장이 비서를 시켜 이미 목숨이 끊긴 비둘기를 그의 앞에 대령시켰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의 다리에 돌돌 말린 종이가 묶여 있었다. 그가 직접 펼쳐보니 바로 오나시아에 산다던 아버지 친척이 보낸 안부편지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서 고향에 대해 듣긴 했어도 이렇게 친척이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전혀 뜻밖의 소식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의 기분이 갑자기 울적해졌는데 바로 눈앞에 놓인 비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회사가 만든 반도체, 스마트폰과 드론, 한창 개발 중인 자율주행 자동차,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인공지능(AI), 로봇, 그리고 사물인터넷(IoT)을 통한 다양한 기기들을 전 세계에 선보였고 앞으로 선보일 예정으로 인류의 생활을 한층 더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려는 과정에서, 아직도 아버지 고향인 오나시아에서는 비둘기를 연락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날로 회장은 아들이자 사장으로 앉아있는 ‘이장’을 불러 회사가 가진 역량을 총동원하여 오나시아인을 위한 통신수단을 개발하라는 임무를 조용히 지시하였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극비 프로젝트였고, 회사의 신제품 개발팀 누구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온 이장에게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당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 것이었다. 며칠 밤을 새워 가며 고민한 끝에 결국, 직접 그곳을 방문하여 제품 아이디어를 얻어 보리라 결정을 내렸다며 자기소개를 마쳤다.
2) 두 번째 사람은 아까부터 세상일에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고 옆으로 쭉 찢어진 눈을 가졌지만 그 안에 든 눈동자는 매우 반짝거렸다. 그는 히든벅이 신기한지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았는데, 일부러 시선을 피하던 히든벅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확 째려보고 나서야 겨우 시선을 거두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쳐다보며 그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이름은 ‘제이’, 현재 30살이란다. '오나시아'에서 태어나 중국, 미국, 영국, 한국 등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6년 만에 홀어머니의 생일에 맞춰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집안 내력에 따라 화가가 되어야만 했단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써도 써도 닳지 않는 마법 물감 때문이었는데, 그것으로 그리고 주문을 외우면 그림이 살아서 튀어나온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었다. 화가가 된 집안 조상들은 그것으로 하루에 수 십장씩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아무 그림이나 다 살아 나오는 것은 아니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법 물감이 원하는 정도의 실력과 혼을 지녀야 하는데, 그런 훌륭한 실력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화가였던 그의 할아버지도 한평생 해봐도 안 되다가 노환으로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혼신을 다해 벽에 그린 참새 한 마리가 벽에서 튀어나와 창문 밖으로 날아갔단다.
이번 어머니 생일을 맞이하여 좋아하시는 떡을 그것으로 그려볼 예정이란다. 그는 엄청 빠르고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가 ‘떡’이라고 발음했을 때 모두 ‘똥’으로 알아듣고 크게 경악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있는 것이니까 다들 예의상 그러려니 했다. 별무늬 티셔츠와 반짝거리는 소재의 헐렁한 바지를 입은 그의 패션이 유난히 튀었다.
3) 마지막 손님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남자로, 옷 테두리를 따라 금실로 물방울무늬를 촘촘히 박은 파란 비단 원피스와 주황 쫄바지를 입고 있었다. 색상 때문인지 그의 다리가 매우 얇아 보였다. 그의 목에는 원피스보다 크기가 작은 금실 물방울무늬로 테두리를 박은 파란 비단 목도리를 걸쳤는데, 그 끝이 바닥에 내려앉은 길이로 보아 일어서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올 듯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비단옷과 목도리의 물방울무늬가 모닥불 빛에 반짝거렸다.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고 그 위에 검은 갓을 쓴 그의 이름은 ‘마네킴’.
나이는 밝히지 않았지만 대충 5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오나시아 왕국의 외교 사신으로 중국 북경에서 지내다가 오나시아 왕의 급한 부름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란다. 자신에게 내려질 비밀임무가 무엇인지 말해줄 순 없지만 다른 사신이 맡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다급한 일이라며 스스로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한마디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 그 자체였다.
“당신들은 어느 게이트를 통해 오는 길인가요?”
이안이 묻자 소시지를 씹어 넘긴 이장이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저와 제이는 한국 서울에 있는 게이트 ‘평창동 화장실’을 통해 왔습니다. 마네킴은 중국 게이트 ‘만리장성 성벽 모퉁이’를 통과하셨다는데 오다가 사막에서 만났지요.”
“서울에도 게이트가 있었군요. 평창동 화장실이라, 게이트가 참 독특합니다그려. 화장실이라니.”
게이트키퍼인 지원이 자신과 연관이 있는지라 관심을 보이자 이장은 그 일을 추억하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사실 저의 할아버지께서는 게이트 위치를 알려주시지 않고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마침 아버지가 받은 비둘기 편지를 통해 서울 게이트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요. 편지에 적힌 대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주소를 찾아갔습니다. 북한산 언덕 위의 평범한 붉은 벽돌집이었는데 대문 옆으로 황금잎블루베리 화분이 놓여있더군요. 안주인이 저를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거실에서 제이를 만났지요.
우리는 바로 지하실 구석에 위치한 화장실로 직행했어요. 정말이지 이 양복을 걸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여태까지 가본 화장실 중에서 거기만큼 더럽고 불결한 곳은 처음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굳어서 딱딱해진 곰팡이와 오물 같은 것이 묻어있는 뚜껑 닫힌 변기 위로 설치된 큼직한 선반을 열자, 그 뒤로 게이트가 있더군요. 제이와 전 감히 변기 뚜껑을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냉큼 밟아 게이트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지요. 다행히 구두에는 묻지 않았어요.”
그의 맛깔스러운 설명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지원의 웃음소리가 가장 컸다. 후식으로 나온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 후, 마네킴이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졌는지 불쑥 입을 열었다.
“일룸니아 왕국에서 일어났던 반란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이안과 일행의 눈에 번개가 번쩍하고 지나갔다. 그 이야기가 자연스레 들리는 것을 보니 이제 브라잇 동맹에 거의 다 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예.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히든벅이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답하자, 마네킴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듯 흐르는 시냇물처럼 술술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 일룸니아의 메이슨 왕과 어린 왕자가 그렇게 쉽게 죽임을 당했다니 말입니다. 저희 오나시아 왕국의 타이타이 왕께서도 처음 그 소식을 접하시고 큰 충격을 받으셔서 중국 열하(熱河)의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3박 4일 휴가를 다녀오셨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3,000년이 지난 동맹은 그저 허울일 뿐, 이젠 별다른 결속도 사실 없지 않나요? 각자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 거지, 괜히 내정 간섭해서 서로 얼굴 붉힐 필요가 있나요? 게다가 현재 제임스 왕이 생각보다 통치를 잘하는가 보더군요. 사실 타이타이 왕께서 저를 부른 이유도 그것과 아주 연관이 깊답니다. 이건 비밀이지만 (그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여러분에게만 살짝 말씀드리죠. 동맹국 중 처음으로 오나시아가 일룸니아의 새 왕에게 보낼 축하 사절단 대표로 제가 지명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하, 신하로서 굉장한 영광이죠.”
어느새 자신의 비밀임무를 다 밝힌 그를 바라보던 이안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네킴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잔뜩 흥분한 어조로 꾸짖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동맹국이 반란자를 왕으로 인정할 수 있나요? 친구인 메이슨 왕의 복수를 위해 다 같이 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동맹국 아닙니까? 제임스는 살인자입니다. 살인자라고요!”
그가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말하는 동안 그의 눈동자는 하늘색으로 변하였다. 마네킴보다 더 놀란 히든벅과 지원.
지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네킴에게 여러 번 상체를 구부려 대신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녀석이 요즘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보기엔 멀쩡해도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합니다. 너그러이 이해하시고 용서해주십시오.”
“친구분이 아들 때문에 많이 속상하겠군요. 생긴 건 저렇게 멀쩡한데 미쳤다니 말입니다. 브라잇 동맹의 수장국인 일룸니아와 동등한 위치인 오나시아의 사신으로서 당연히 그 정도는 이해해드려야지요. 흠흠,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마네킴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이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차가움이 번뜩거려, 말은 괜찮다고 해도 방금 그 일로 기분이 몹시 상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장과 제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이안을 주시했다.
히든벅과 지원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나서야 이안은 제정신을 차려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그를 흘겨보는 히든벅의 눈초리는 마치 사물을 관통할 것 같이 날카로워, 옆에 앉은 수진까지도 감히 그쪽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안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앉아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지원이 그의 기분을 다시 좋게 만든다고 이런 말 저런 말로 치켜세워주자 우쭐해진 마네킴이 또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에 이상한 소문 하나가 들리던데요.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문이요?”
히든벅이 이안에게서 겨우 시선을 거두어 관심 있는 표정으로 물었다.
“유언비어이긴 하지만, 마왕 블랙수트가 봉인에서 탈출했다는 소문 말입니다.”
히든벅의 눈이 번쩍하더니 바로 멍해졌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제 표정으로 돌아왔다.
“에잇, 그냥 소문이겠지요. 블랙수트라면 벌써 몇천 년 전 일인데. 그리고 아무도 그의 봉인 장소가 어디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확인할 길도 없고. 누군가 심심하니까 재미 삼아 퍼트린 거겠죠. 하하하.”
지원이 깔깔거리며 던진 농담에 마네킴 역시 껄껄 웃으며 동조했다.
“맞습니다. 마왕 블랙수트라니, 요즘 누가 그런 것을 믿는답니까? 그저 아이들 동화책에서나 나올 소재이죠.”
그때였다. 주변이 웅성웅성해지더니 낯선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네킴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저녁 잘 먹고 갑니다. 안녕히 계시오.”
그가 사람들 무리로 사라졌다. 제이와 이장도 감사인사를 전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수진과 일행은 재빨리 뒷정리를 마치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불쑥 튀어나오며 무리로 합류해 들어왔다. 나중에는 거의 백 명 정도로 그 수가 불어났다. 하늘에 떠있는 밝은 보름달이 그들의 길을 밝혀주는 유일한 등불이 되어주었다. 이안은 여전히 화가 난 상태였지만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수진을 발견하고 그녀를 툭 치며 물었다.
“아까부터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저기, 저 장막을 이 밤중에 어떻게 넘어간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걱정되어 죽겠어. 난 야간산행도 해 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그런 게 아니야!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난 또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