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과 일행은 키릴장막을 왼쪽에 끼고서 계속 걸어갔다. 곧 매끈한 바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지점에서만 납작한 디딤돌들이 바위 표면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데, 바닥에서 20센티 정도 뜬 채 일렬로 박혀있었다. 사람들이 그 디딤돌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한 줄에 많아야 네댓 명 정도였다. 다섯 번째 줄 마지막에 서 있던 이장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수진은 비어있는 열일곱 번째 돌 앞에 가 섰다. 그들 자체로도 딱 네 명이기에 뒤에 오는 사람들은 다음 줄로 넘어가야 했다.
그렇게 대충 삼십 개의 줄이 만들어졌다.
“띠링띠링~”
모차르트의 교향곡 ‘반짝반짝 작은 별’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안의 손가락이 위를 가리켰다.
“수진, 저기 위 좀 봐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장막의 꼭대기 위로 거대한 크리스털별이 세워져 있는데 밤하늘에 은은하게 빛이 났다. 교향곡이 끝이 났다. 그러자 아름다운 광경이 그들 앞으로 펼쳐져 내려왔다.
크리스털별에서 흡수한 달빛이 강하게 반사되더니 아래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달빛은 바위 표면에 흩어져있던 수많은 크리스털 조각들을 깨웠고, 순식간에 빛의 뭉치들은 딱딱한 기차 트랙으로 모습을 변화시켰다. 꼭대기에서 시작된 달빛 트랙은 어느새 가장 아래 디딤돌이 있는 데까지 다닥다닥 빠르게 깔리었다.
“뿌우웅~뿌우웅~”
경적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투명하게 빛나는 기차가 장막 꼭대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박 모양을 닮은 크리스털 마차 30대가 나란히 붙어있는 기차였다.
“칙칙폭폭~칙칙폭폭~”
기차는 바위에 바짝 붙은 채 트랙을 따라 거침없이 내달렸다. 흡사 하얀 여자 목에 걸린 보석 목걸이 마냥 눈부시게 반짝이었다. 곧 그것은 디딤돌이 튀어나온 탑승구에 정확히 일치하며 멈춰 섰고, 작은 별 교향곡과 함께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그들은 땅에 내려오자마자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드디어 아래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탑승할 차례가 되었다. 수진과 일행도 얼른 들어가 앉았다. 기차 칸의 실내는 앞뒤가 둥근 크리스털 벽으로 막혀있고, 긴 크리스털 의자가 서로 마주 보게 설치되어 있었다. 수진과 이안, 지원은 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히든벅은 커다란 덩치 때문에 반대편 의자를 혼자 독차지하였다.
교향곡이 끝나자 기차는 내려올 때와 반대로 꼬리 부분이 머리가 되어 거꾸로 트랙을 올라갔다.
15분 후, 키릴장막의 꼭대기에 도착하였다. 다시 교향곡이 들려오고 나서야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에서 내렸다. 수진도 군중에 섞이어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뾰족한 바위 위에서 스스로 균형 잡고 서 있는 크리스털별이 눈앞에 나타나자,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그것을 감상하였다. 크리스털에서 내뿜는 빛이 옅어지며 아무런 조명도 없는 이곳을 신비롭게 밝혀주고 있었다.
이안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땐 이미 군중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원과 히든벅도 보이지 않자 그가 알려주었다.
“다들 안으로 들어갔어. 어두워질 테니 우리도 어서 가자.”
잠시 후, 그는 어떤 표지판 앞에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뚜렷이 비치는 형광 초록색 글씨를 그녀가 소리 내어 읽었다.
“키릴장막 미끄럼틀, 19번 석실, 총 20분 걸림, 한 명씩 타시오. 타박상 주의”
표지판 바로 뒤로는 미끄럼틀 쇠바닥이 깔린 납작한 통로가 뚫려 있었다. 통로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이안은 놀이동산에 처음 놀러 온 아이처럼 잔뜩 들떠 외쳤다.
“이거 스릴만점에 굉장히 재미있다고 들었는데. 난 한 번도 타본 적이 없거든.”
그는 그녀에게 먼저 타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녀가 머뭇거리자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신이 먼저 갈 테니 따라오라는 말만 남긴 채 미끄럼틀을 타고 사라졌다. 그녀 혼자만이 그곳에 남게 되었다.
스릴을 마음껏 만끽한 이안이 19번 번호판이 붙은 석실 문을 열고 나왔다. 문 앞에 히든벅과 멀미를 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지원이 서 있었다. 이안 혼자서 오는 것을 보고 더 하얗게 질려버린 지원이 두리번거리며 수진을 찾자 이안은 태연하게 말했다.
“곧 따라올 거야.”
“그녀를 먼저 보내고 들어오셨어야지요. 혹시나 안 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미 꼭대기까지 왔는데 여기 말고 돌아갈 데가 어디 있겠소? 기다리면 곧 올 거요. 그리고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그녀도 혼자 힘으로 해결을 봐야지, 언제까지 우리가 졸졸 따라다니며 돌봐줄 수 있답니까?”
히든벅의 냉정한 대답에 지원은 내심 놀랐지만 못내 걱정스러운 듯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애를.”
키릴장막 꼭대기는 이제 달도 많이 기울어져 조명이 거의 없다는 표현이 맞았다. 어둠 속에서 앞의 표지판 뒤로 여러 개의 형광 글씨들이 유령처럼 떠올랐다. 미끄럼틀이 이것 말고도 더 있다는 표시였다. 그녀는 칠흑같이 어두운 미끄럼틀 안으로 들어가기가 매우 망설여졌다. 그러나 여기 말고 다른 길도 없지 않은가?
결심을 굳힌 그녀는 엉거주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두 손으로 몸무게를 지탱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뭔가가 으르렁거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그만 손을 바닥에서 떼어냈고, 미처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발밑으로 빛이 나타났다. 그것을 통과하자 엄청나게 큰 방 안에서, 하얀 줄과 붉은 줄이 섞인 사탕 시소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소 오른쪽에 위치한 마시멜로 의자 위로 그녀가 떨어지자 왼쪽 빈 의자 위로 그녀보다 훨씬 큰 초콜릿 볼이 떨어졌다. 초콜릿 볼이 왼쪽 의자를 아래로 쿵 밀어내자 그녀는 의자에서 튕겨져 나와 허공을 붕 날아갔다.
다음으로 떨어진 곳은 거대한 인형이 펼쳐놓은 앞치마였다. 인형이 자동적으로 앞치마를 털어내며 그녀를 앞에 놓인 커다란 찻주전자 속으로 떨어뜨렸다. 귀족 집사처럼 차려입은 인형이 다가와 주전자를 들어 앞으로 기울이자, 그녀는 데굴데굴 굴러 받침 위에 올려진 찻잔 안으로 떨어졌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찻잔이 앞으로 나아가다 갑자기 거꾸로 매달렸다. 찻잔은 벨트에 그대로 붙어있었지만 그녀는 추락하여 얼음 미끄럼틀로 떨어졌다. 아주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가는데, 저 아래 얼음으로 조각된 용이 무시무시한 입을 쫙 벌린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지런한 윗니들과 달리 아래 이빨들이 군데군데 빠져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초집중하여 아래 빠진 이빨들 사이를 비집고 통과했다. 이어 용의 식도와 위, 장을 다 돌고 항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녀는 어둡고 작은 석실 바닥에 놓인 커다란 베개 위로 떨어졌다. 멀미가 나고 어지러워 잠시 누워 쉬었다. 곧 괜찮아지자 베개에서 기어 나와 똑바로 섰는데 뭔가가 허전했다.
“앗, 내 목걸이!”
할머니가 준 그녀의 ‘순종 목걸이’가 없어진 것이다. 베개를 손으로 샅샅이 훑으며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중간에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찾기를 포기하고 깜빡거리는 노란 전등 아래 위치한 문으로 다가갔다. 가슴이 떨려왔다. 심호흡을 한 후 문을 힘껏 앞으로 밀었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훈훈한 기운이 그녀에게로 쏴악 불어왔다.
그녀 앞으로 암벽 내부를 깎아 만든 길쭉하고 넓은 길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나온 19번 석문의 양쪽 벽으로 번호판을 단 똑같이 생긴 문들이 나란히 배열되어 나갔다. 벽은 크리스털로 만든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엉킨 채 빽빽이 덮여있고, 그 잎사귀들 위로 색색의 양초가 올려져 사방을 비추었다.
길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길의 1/4 지점에는 손님을 태운 양탄자들이 1차선을 이루며 앞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양탄자 차선 너머로 이쪽처럼 번호판을 단 석문들이 반대쪽 벽면을 다 차지했지만 길은 텅 비어있었다. 날아가는 양탄자들 밑으로 몇 개 안 남은 빈 양탄자가 바닥에 깔린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이 그 위에 타면 그것은 잽싸게 몸을 올려 능숙하게 양탄자 행렬에 끼어들었다.
지원과 히든벅,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파란색 야구 모자를 쓴 이안이 한쪽 구석에 모여 있었다. 그녀는 급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그만 옆에서 달려오던 사람을 보지 못하고 꽝 부딪치고 말았다. 그녀와 상대방 모두 바닥에 덜렁 넘어졌다.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는 엉덩이보다도 방금 그와 부딪친 다리가 너무 아파왔는데, 마치 딱딱한 돌덩어리에 그대로 가 부딪친 느낌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리를 어루만지었다. 그런데 글쎄, 저 앞으로 조그만 아이가 바닥에 배를 댄 채 엎드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그녀는 잽싸게 기어서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등에 손을 얹고 토닥거리는데 놀랍게도 통통한 살이 돌처럼 매우 딱딱했다.
“얘야, 어디 다치지 않았니?”
그녀의 안타까운 어조에, 마치 몸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아직 뒤돌아서지 않은 채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쳐왔다. 아이 목소리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 놀리는 거야? 나 100살이란 말이야! 그러는 너희는 얼마나 크다고 우리 딥언더니아인을 이렇게 무시하는 거야!”
투덜거리면서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린 아이는, 아니 그는 어른 난쟁이였다.
110cm 될까 말까 한 키에 주름진 밤색 피부, 수염이 길어 머리카락과 마구 뒤엉켜있고, 흙이 잔뜩 묻어 얼룩진 갈색 원피스를 허리띠로 찍 동여매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정 장화를 신은 그는 어른이었다. 난쟁이를 처음 접한 그녀가 동물원 원숭이를 감상하는 눈으로 계속 쳐다보자 그는 화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눈빛도 너무 싫어! 딥언더니아인 처음 봐?”
“예, 저는 처음 봬요. 기분 상하셨다면 푸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녀의 예의 바른 사과에 그도 좀 민망했는지 옆에 떨어진 가죽 자루를 어깨에 메고 재빨리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여인이 뒤에서 걸어오다가 미처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쳐왔다. 그녀의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해 허우적거리자 여인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주며 사과했다.
“어머, 미안해요. 제가 딴 데에 정신을 팔고 있었어요. 혹시 다치지 않았나요?”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자 수진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미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리석 조각처럼 매끈하고 하얀 피부에 초록색과 황금색이 섞인 보석 같은 눈동자,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을 가진 그녀는 마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몹시 우아해 보였다. 그녀가 입은 검정 드레스는 모델 같은 몸매를 드러내 주기에 충분했다.
수진이 감탄한 눈으로 계속 쳐다보자 그녀는 싱긋 웃었다. 말아 올라간 그녀의 윗입술 아래로 길고 하얀 송곳니들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뱀파이어였다. 이미 뱀파이어 친구를 둔 수진이었지만 순간 당황하여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그러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두려워 말아요. 난 당신의 피를 빨지 않을 테니까, 귀여운 아가씨.”
그때 멀리서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그쪽으로 손짓하며 걸어갔다. 역시나 빼어나게 잘생긴 남자와 멋있게 차려입은 일행 모두 창백한 피부를 가진 것으로 보아 뱀파이어들이 틀림없었다.
수진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다행히 더 이상의 접촉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반갑게 맞아주는 지원,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히든벅, 파란색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린 이안. 그녀는 이안 옆으로 다가가 방금 경험한 일을 알려주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입이 채 열리기도 전에 그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다짜고짜 신경질부터 내는 것이 아닌가?
“눈은 왜 달고 다니는 거야?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그렇게 여기저기 부딪쳐 넘어지지나 말고.”
그는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황당해하는 그녀에게 지원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방금 전까지 히든벅에게 엄청 혼났거든. 그가 이젠 보아도 보지 못한 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하라고 명령을 내렸단다. 그의 신변안전을 위해서 말이야. 왕자님은 지금 화가 많이 나셨지만 다 그를 위해서 그러는 거니 어쩔 수 없지.”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이안을 달래러 앞으로 달려 나갔다.
히든벅과 수진은 군중에 섞여 나란히 걸었다. 그 역시 기분이 안 좋은지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어색해진 그녀는 옆으로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양탄자를 쳐다보는데 문득 그것이 타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닥에 눕혀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천장에 달린 크리스털 담쟁이넝쿨 밑으로 초록색 화살표가 번쩍이며 나타났다. 화살표 끝은 그들이 향하는 정면을 가리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길은 점점 혼잡해졌다. 벽의 석문들이 열리며 동맹원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주변을 관찰하던 중 그녀는 이상한 점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먼저, 난쟁이가 지나가면 모두 황급히 옆으로 비켜섰는데 마치 더러운 병균 보균자여서 접촉을 하면 옮길 수도 있다는 그런 반응들 같았다. 난쟁이 역시 그런 분위기에 익숙한지 별 신경을 쓰지 않거나, 아님 일부러 침을 뱉고 트림을 하는 등 주변의 인상을 더 찌푸리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잘 차려입은 뱀파이어가 무리 지어 지나가면, 다들 지레 겁을 집어먹어 피해버렸는데 난쟁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갓을 쓴 동양인들은 자기네들끼리 몰려다녔고, 고깔모자를 쓴 마법사와 마녀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들이 여기저기 처져있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그녀 옆의 14번 석문이 열리면서 빨간색으로 차려입은 자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120cm에서 130cm 정도 키에 배는 불룩하고 팔과 다리는 짧았다. 난쟁이보다 피부가 하얗고 키는 더 컸는데, 얼굴은 인간과 다를 바 없었지만 빵모자 양옆으로 귀가 길게 삐죽 올라가고 그 끝이 아주 뾰족했다. 빨간 빵모자와 빨간 티셔츠, 빨간 멜빵바지를 맞춰 입고 짐이 매달린 나무 지팡이를 맨 다섯 명이 ‘예약 카드’가 붙은, 바닥에 깔린 양탄자 위로 급히 올라탔다.
그런데 바로 출발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곧 똑같이 차려입은 남자가 문에서 나와 서둘러 양탄자 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면서 곁에 서 있던 수진과 막 다가온 지원, 이안을 슬쩍 흘겨보았다. 하얀 머리와 하얀 수염을 단 노인이었는데 갑자기 흠칫 멈춰 서더니 손뼉을 치며 다가와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박지원, 이게 얼마만인가?”
지원은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다가 생각이 났는지 두 팔로 그를 반갑게 포옹했다. 노인은 듬직한 그의 품 안에서 10살 난 아이처럼 보였다.
“레드점핑초코 아닙니까?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수진은 지원이 ‘레드점핑초코’라고 부른 자를 찬찬히 관찰해보았다. 빨간 빵모자, 빨간 셔츠, 빨간 멜빵바지, 그리고 빨간 구두까지 맞춰 신고, 이분은 무섭게 시리 눈동자까지 빨강이었다. 정말로 온몸이 빨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지 가슴 부분에 위치한 주머니는 뭔가 잔뜩 들어가 있는지 바깥으로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었다.
“레드점핑초코, 저는 당신이 가르쳐준 아이스크림 기술로 먹고살고 있답니다. 롤리마을 손님들이 아주 좋아해요. 아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겠죠? 당신이 개발한 아이스크림이니까요. 당신 이름을 딴 특별 메뉴도 인기 만점이지요. 그새 많이 변하셨습니다. 배도 더 나오시고, 머리도 많이 하얘지시고.”
“허허, 나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있겠나? 그나저나 가게가 잘 된다니 다행이군. 롤리마을이라면 ‘일룸니아 왕국’인가? 아님 ‘오나시아’? 이름이 생소하군 그래.”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한 동네랍니다. 혹시 아세요?”
레드점핑초코는 눈을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예 ‘하하호호히히’를 떠난 것이었군. 멀리도 갔네. 그럼 지금은 다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요. 급한 일로 잠시 들어오게 되었답니다. 여기 수진, 이안 (그들은 이안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이미 결정한 후였다. 워낙 흔한 이름이기에), 그리고 히든벅입니다. 어디 여행 갔다 돌아오시나 봅니다. 저처럼 일행이 있으시네요.”
노인의 얼굴에 전쟁에서 이기고 귀환하는 장군의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네. ‘카카코 아이스크림’ 회장의 초청으로 벨기에를 다녀오는 길이네. 내년에 선보일 아이스크림을 한번 와서 시음해보라더군. 맛에 대한 세심한 평가가 필요하대나 뭐 대나.”
“‘카카코 아이스크림’이라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인데. 그래 신제품 평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흐뭇했던 미소가 순간 썩은 물고기 표정으로 험악하게 굳어졌다. 지원의 질문이 그의 꾹꾹 참았던 분노를 터트린 것이다.
“영 아니었네, 영 아니야. 그쪽 세상이 그렇게 이상하게 돌아가는지 미리 알았더라면 고생하면서까지 가지도 않았을 걸세. 벨기에 본사에서 회장이 직접 떠준 신제품을 맛보았지. 맛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예의상 차마 뱉지 못하고 겨우 삼켜버렸다네.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회장이란 작자는 히트상품이 될 거라고 떠들어대더군. 뭐, 다이어트식으로 만든 거라나? 퉷퉷. (침을 뱉는 시늉만 냈을 뿐이다.)
아직도 혀에 그 밋밋한 얼음이 느껴지는군. 내가 데려간 평가단까지 다 맛없다고 하니까, 세상에나, 그 회장 놈 얼굴이 창백해지고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게 아닌가? 난 그가 간질발작이라도 일으키는 줄 알았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막 돌진해오는 거야. 한 대 치러 오는 줄 알고 탁자 밑으로 재빨리 몸을 피하려 했지. 하지만 그가 한 발 더 빨라 내 옷깃을 붙잡고 흔들면서 이렇게 소리치더라고.
“아직도 세상이 바뀐 것을 모릅니까? 이젠 부모와 아이들이 달고 기름진 아이스크림을 원하지 않아요. 건강에 좋고 열량이 적어 살이 안 찌는 것을 원한다고요. 우리 제품을 먹고 당신처럼 배가 불룩 튀어나오면 정부에서 세금폭탄을 투하하고, 방송사와 언론이 불을 토한단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이제 당신은 더 이상 필요 없소. 다시는 볼일 없을 테니 당장 내 앞에서 꺼지시오! 당장!”
그놈은 예전에 내가 만들어준 제품이 얼마나 히트를 쳤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군. 하지만 이보게, 자네는 초콜릿이 없는, 달콤한 체리 시럽을 뿌리지 않은, 진한 크림 맛이 나지 않는 아이스크림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놈이 먹어보라고 한 것은 그냥 얼음덩어리였어. 브라잇동맹사에 손을 얹고 분명히 맹세할 수 있네. 그것은 아이스크림에 대한 모욕이고 수치야.”
“그래서 회사에서 쫓겨난 이후 바로 이리로 오신 겁니까? 괜히 힘든 걸음 하셨군요.”
“그래도 평가단을 데려갔기에 바로 떠나기는 좀 그렇고, 물론 그놈의 회사는 바로 튀어나왔지만. 부근에 내 고향 친구 몇 명이 살고 있거든. 사탕 회사와 초콜릿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왔지. 그들도 일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고 푸념을 늘어놓더군. 아이고, 일행이 있어서 길게 이야기를 못 하겠네.
만나서 반가웠고, 언제 ‘스위티니아’로 오면 나를 찾아주게나. 난 여전히 그곳에 산다네.”
“꼭 다시 만날 겁니다. 건강하세요.”
지원과 작별 악수를 한 후, 레드점핑초코는 양탄자에 타려다 말고 몸을 돌려 수진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바지 가슴 부분에 위치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한 움큼을 집어 그녀의 손바닥 위로 떨어뜨렸다. 예쁜 포장지에 싸인 초콜릿들과 사탕들이었다. 그는 그녀의 감사인사를 듣기도 전에 벌써 양탄자에 올라타 앞으로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