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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Apr 29. 2016

9. 키릴장막 아케이드 - 2


 그들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히든벅은 이안의 옆에 바싹 붙은 채 눈치를 살피며 그의 기분을 풀어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수진은 지원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드디어 그녀는 참고 참았던 질문들을 그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아저씨, 여기가 어디예요?”


“이곳은 ‘키릴장막 아케이드’란다. 브라잇 동맹 밖으로 나가거나 동맹 안으로 들어올 때 통과해야 하는 곳이지. 네가 살던 세상의 공항과도 같은 곳이야. 키릴장막은 보다시피 양옆으로 길게 뻗어있어 문(door)이 아주 많단다. 그래서 인파가 이처럼 몰려드는 거야.

 ‘하하호호히히’ 땅에 브라잇 동맹이 결성된 이후 동맹원들은 이곳을 거쳐 넓은 세상으로 뻗어나갔지. 물론 원칙적으로 우리의 존재는 극비로 부쳐졌지만, 용기 있는 자들은 낯선 곳에서 스스로의 삶과 운명을 개척해나갔단다. 예를 들면 아까 만났던 ‘이장’ 같은 케이스 말이다. 그는 대한민국에 정착한 오나시아인의 후손인 셈이지.”


“방금 인사를 나눈 ‘레드점핑초코’는 사람인가요, 아님 요정인가요?”


"그는 맛있고 달콤한 것을 만드는 요정왕국인 ‘스위티니아’에서 왔단다. 나에게 아이스크림 만드는 비법을 전수해준 스승님이시지. 스위티니아에 있는 그의 집에서 같이 살면서 배웠었지.

 전에 내가 브라잇 동맹에 대해 살짝 말해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왕국들이 있었는지 혹시 기억나니?”


“오나시아, 스위티니아, 일...아, 모르겠어요. 저 머리가 그다지 좋지 못해요.”


“아직 생소해서 그런 거야. 곧 익숙해질 거다. 저들을 봐보렴.”


 그는 그녀와 아까 길에서 부딪쳤던 난쟁이 무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로 떠드는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주위 행인들이 그들을 무섭게 흘겨보며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한층 더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녀가 가만히 들어보니 한 명의 수염 끝을 장식한 리본이 보기 흉하네/보기 좋네 두 편으로 나뉘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난쟁이들이요?”


 그녀의 대답에 깜짝 놀란 그가 재빨리 자신의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며 말했다.


“쉿, 저들은 난쟁이라고 불리는 것을 무척 싫어해. 딥언더니아인이야. 땅속 지하왕국인 ‘딥언더니아’에서 왔지.”


“그런데 주변에서 그들을 좀 싫어하는 것 같아요.”


“흠.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동맹원이 저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편이지.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외모, 일자무식, 괴팍한 성격 때문에 말이야. 가까이 가면 냄새도 좀 나지 않니? 솔직히 나도 저들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단다.”


 그녀는 저 앞으로 큰 짐을 등에 짊어진 채 가고 있는 동양인 가족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들은 ‘오나시아’ 출신이겠죠? 근데 너무나 평범해 보여요.”


“오호,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돼. 평범해 보여도 동양 마법왕국의 오나시아인은 각자 자신만의 특수한 능력이나 생존기술을 숨기고 있거든.”


 의아해진 표정의 그녀가 그의 머리 위에 놓인 낡은 초록색 갓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아저씨도 동양인인데 왜 ‘오나시아’ 출신이 아닌 거죠? 다른 오나시아 남자들처럼 갓을 쓰셨잖아요?”


“음, 나는 좀 예외라고 해두자꾸나. 그리고 ‘일룸니아’에도 동양인이 꽤 있단다. 당연히 ‘오나시아’에도 서양인이 있을 거고. 요즘 한국도 그렇지 않니? 해마다 외국인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지. 그것과 같은 이치란다. 그리고 이 갓은 ‘초록갓 아이스크림’을 창업하신 김지만 사장님께서 쓰시던 거야. 그분은 원래 ‘오나시아’ 출신으로 ‘스위티니아’에서 교육을 받으셨지.”


 때마침 그들 옆으로 멋있게 차려입은 창백한 피부의 미남미녀들이 지나쳐갔다. 그러자 지원은 전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며 그녀의 귀에다 조용히 속삭였다.

 

“저들은 뱀파이어일 거야, 확실해. 20년 전, 뱀파이어 왕국인 ‘뱀파니아’도 동맹에 편입되었지. (그중 한 미남이 수진에게 윙크를 하며 지나가자 지원은 화들짝 놀라며) 어머머, 어서 내 옆으로 바싹 붙으렴. 난 왕자님을 제외한 어떤 뱀파이어도 당최 믿을 수가 없거든.”


 한쪽 구석으로 파란색 로브를 입고 하늘색 고깔모자를 쓴, 하얀 수염이 배꼽까지 늘어진 노인이 서 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검은색 고깔모자와 망토를 두르고 기다란 빗자루를 든 중년 여인을 수진이 턱으로 가리키자, 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저들은 ‘일룸니아’에서 왔지. 나와 왕자님의 고향인 ‘일룸니아’는 마법사와 마녀로 가득하단다. 그리고 지금 보이진 않지만 인어가 사는 왕국 ‘아쿠아니아’도 같은 동맹국이지.

 자, 이제 브라잇 동맹국 이름들을 한 번 나열해 볼래?”


 그녀는 주변을 가득 채운 군중의 모습과 옷차림을 따져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스위티니아, 오나시아, 딥언더니아, 일룸니아, 뱀파니아 그리고 아, 아, 아쿠아니아?”


“그래. 이제는 꼭 기억하고 있으렴.”


 순간, 그들의 오른쪽에 위치한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길 가장자리의 양탄자 차선 가까이로 데리고 나왔다. 그쪽이 덜 붐볐기 때문이다. 차선 건너편의 텅 비어있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요, 동맹에서 떠나기 위해선 키릴장막 위로 올라가야 하잖아요. 내려올 때는 미끄럼틀을 탔는데 그럼 오를 때는 무엇을 타죠? 혹시 걸어서 오르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하. 아니야, 올라가는 기구는 따로 있단다. 나도 몇 번밖에 타보지 않았지만 정말로 너에게 추천해주고 싶구나. 나중에 아마 타볼 기회가 있을 거야. 동맹 안으로 들어가려는 지금 시각 전에는 동맹 밖으로 나가려는 자들로 저 반대편 길이 북적거리지. 이쪽은 텅 비고 말이야.


 각자 배정된 문으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최대 열 명까지 탑승할 수 있는 공룡 두개골이 바닥에 놓여있단다. 그 안에 모두 탑승하면 숫자 10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0이 되면, 0이 되면 말이야, 그것이 위로 확 솟아오르지. 마치 발사된 로켓처럼 말이야. 그리고 단 몇 초 만에 장막 꼭대기에 도착한단다. 너희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놀이기구도 그만한 스릴을 느낄 수 없을 걸? 처음엔 나도 심장이 멎는 줄 알았거든. 미끄럼틀은 너도 타봤지만 멀미가 좀 나잖니? 그래서 난 미끄럼틀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공룡 두개골은 아주 좋아하지.”


 그녀는 물어보기가 두려워졌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많고 많은 운송수단 중에서 왜 하필 공룡 두개골이란 말인가?

 이곳은 어쩌면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상하면서 특이한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여기야!”


 이안의 부름에 그녀의 고개가 돌려졌다. 5번 석문 앞에 그와 히든벅이 서 있었다. 그런데 번호판이 이전과 좀 달랐다. 숫자 아래로 물결모양의 파란선이 세 줄 그어있었던 것이다. 그리로 향하던 지원이 손목시계를 쓱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음, 이제 나올 때가 됐는데.”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석문이 안에서 열리더니, 초록색 비늘 피부를 가진 남자 두 명이 허리에서 무릎까지 내려온 하얀 치마만 입은 채 어정쩡하게 걸어 나왔다. 다음으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초록색 피부의 여자가 나왔다. 그들은 모두 맨발에, 물속에 빠졌었는지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물이 그들의 다리를 타고 바닥으로 새어 나왔다. 히든벅이 마지막으로 나온 여인에게 공손히 물었다.


“혹시 쿠룸도 같이 오지 않았나요? 이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요.”


 “왔어요. 지금 안에서 옷을 짜느라 시간이 좀 걸리는 것뿐이에요. 곧 나올 거예요.”


 풍성하고 붉은색의 긴 머리를 가진 예쁘장한 그녀의 입에서 쇠가 유리를 긁는 듯 소름이 짝짝 끼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초록 피부의 남자들을 쫓아갔다.


 일행은 문밖에서 20분을 더 기다렸고, 드디어 쿠룸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커다란 덩치에 하얀 피부와 지극히 평범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희한한 점은 바로 그의 옷차림이었다. 검은 파마머리에 검은 양복, 검은 망토를 두르고 검은 구두까지 신은, 꼭 장례식장을 찾아온 조문객처럼 보였다. 그 역시 머리끝부터 발까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히든벅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다가갔다.


“쿠룸, 오랜만이오. 근데 왜 아쿠아니아인이 사용하는 문으로 나온 것이오?”


“빨리 오려고 그랬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가 마침 북극해를 향하던 배 갑판 위였거든요. 인어들이 이용하는 게이트 중 하나가 바로 북극점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지요. 이런, 지금 제 모습이 말도 못하게 엉망이죠? 깊은 바닷속을 걸어왔더니 여간 힘든 게 아니네요. 그나마 말동무가 되어준 인어 친구들 덕분에 마음만큼은 즐거웠답니다.”


 쿠룸은 기분 좋게 껄껄 웃다가 이안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이안의 얼굴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듯 반짝거렸다.


“아, 그분이군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저는 ‘쿠룸 드보르자’라고 합니다.”


 그는 오른손을 배 위에 얹고 왼손과 왼쪽 다리를 뒤로 내빼어 상체를 숙이는, 일룸니아식 궁정 인사를 정중히 선보였다. 이안은 어쩔 줄 모르다가 예전에 하던 식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답례했다.  


“그래, 내가 부탁한 것은 가지고 왔소?”


 히든벅이 쿠룸의 옷을 훑어보며 묻자 그는 급히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손동작을 멈추더니 지원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지원이 고개를 두세 번 끄덕이자 그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엄청 빠른 속도로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의 손에 그것을 건네주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정말 글자 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지원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은 비닐로 둘둘 말린 것이었다. 그는 얼른 그것을 자신의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다시 군중 속으로 흡수되어 나아갔다. 수진은 옆으로 지나치는 석문들의 번호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4번, 3번, 2번 숫자 밑으로도 파란 물결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인어왕국의 아쿠아니아인이 사용하는 문들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곁에서 걷고 있는 이안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쿠룸이란 분은 물속을 걸어왔다니까 옷에 산소호흡기라도 달고 있었나 봐?”


“아까 보고도 몰랐어? 그는 뱀파이어야. 뱀파이어는 숨을 쉬지 않으니까 물속에서 익사할 염려가 없지.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니 컴컴한 물속도 문제가 되지 않는 거야.”


 그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가 뱀파이어였다고? 뱀파이어라고 다 미남미녀는 아니구나.’


“근데 이안, 그가 지원 아저씨에게 건네준 것이 뭔지 혹시 알아?”


“모르겠어. 그렇지만 꽤나 비밀스러운 것임이 분명해.”     



 1번 석문에 못 미치는 어두컴컴한 지점에서, 지원이 이안과 수진을 구석으로 불러들였다. 히든벅이 아이들 등 뒤로 병풍처럼 서주니,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그들만의 조그만 은신처가 마련되었다. 지원은 아까 쿠룸에게 받았던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 들고 비닐을 벗기기 시작했다. 몇 겹을 벗겨내자 드디어 안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다름 아닌 조그만 수첩 두 개였다. 하나는 검은색 커버였고 나머지는 빨간색 커버였다. 이안이 보자마자 흠칫 놀라서 그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건 여권이야. 위조 여권.”


 지원은 그것들을 가지고 벽의 크리스털 담쟁이 위에 놓인 촛불 옆으로 다가갔다. 꼼꼼히 살펴보던 그의 입에서 웃음이 빵 터져 나왔다. 초를 한 손에 집어 들고 히든벅에게 다가가 직접 그것들을 비춰주자, 그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감탄했다.


“잘 나왔군. 아주 좋아. 역시 이 솜씨는 그를 따라갈 자가 없다니까.”


 검은색 수첩은 이안에게, 빨간색 수첩은 수진에게 건네졌다. 이안은 재빨리 수첩의 첫 장을 펼치더니 “헉”하는 소리와 함께 인상을 쓰고 손을 덜덜 떨며 툴툴거렸다.


“이건 뱀파니아 여권이네. 이안 드보르자? 아까 쿠룸의 성도 드보르자 아니야?”


“맞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의 조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여권 사진이 정말 예술로 나왔어요. 모자란 부분은 그가 손봐주긴 했지만요.”


 수진 역시 여권을 훑어보다가 첫 장에서 그만 손이 딱 멈춰버렸다. 그녀의 이름은 똑같이 ‘황수진’이었고, 오나시아 출신으로 되어있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사진이, 여권 사진이...


‘아니, 어떻게 이런 사진을 여권에다 붙일 수 있는 거지?’


 사과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가 지원 곁으로 다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여기 사진 말이에요.”


“응, 그거? 네가 잠들었을 때 내가 몰래 들어가서 분장을 시키고 얼른 찍었단다. 어때? 아주 잘 나왔지? 너는 분장을 심하게 하지 않아도 괜찮게 나오더구나. 그래서 아주 편했지. 쿠룸도 그 사진은 거의 건드리지 않고 사용한 것 같아. 초록갓 아이스크림 가게에 걸린 전주인들 여권 사진을 걸고 확신하건대, 너는 곧바로 무사통과야. 확실해.”


 이안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에서 여권을 낚아채 갔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보더니 배꼽 빠지게 웃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너 침 잘 흘린다. 정말로 잘 나왔는데?”


 창피해진 그녀가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그것을 낚아채어 핸드백 안에 쑤셔 넣었다. 그들이 침이 마르게 칭찬한 그녀의 여권 사진은 다음과 같았다.


 감고 있던 그녀의 눈꺼풀 위로 눈을 그려 넣었는데 왼쪽 눈동자는 왼쪽으로 몰려있고, 오른쪽 눈동자는 오른쪽으로 몰려있었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면서 입가 옆으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코 밑으로 검은 콩이 딱 달라붙어 있고, 콧구멍이 유난히 벌름거렸다. 만약 바보 얼뜨기 사진 콘테스트가 지금 열린다면 1등, 아니 적어도 2등까지는 뽑힐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대한 호기심과 사진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일행을 졸졸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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