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dy Hwang 황선연 May 13. 2016

9. 키릴장막 아케이드 - 3

 

 길이 끝나자 양탄자들은 손님을 땅에 내려주고는 바닥에서 유턴하여 되돌아갔다. 그들 앞으로 커다란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상점, 베이커리, 식당, 카페, 호프, 약국, 사진관 등으로 가득 찬 광장은 밀집된 가게들에서 나오는 조명만으로 주변을 훤히 밝히고도 남았다. 또한 활기찬 시장인 이곳은 막 잡은 생선처럼 생동감으로 팔딱팔딱했다. 카페와 식당에는 동맹원들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 이른 아침을 먹기도 했다. 빗자루와 양탄자를 파는 가게와 캠핑 도구를 파는 가게도 여럿 보였는데, 가격을 두고 흥정하거나 때로 흥정이 격해져 서로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저 앞 광장 끝에 세워진 어마어마한 크기의 새 청동상이 눈에 쏙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까마귀와 비슷해 보이는데, 놀랍게도 발이 세 개였다. 그녀는 다시 세어보았다. 정확히 세 개였다. 청동 까마귀는 입을 크게 벌린 채 곧 하늘로 비상하려는 듯 날개를 활짝 펼친 모습이었다. 

 

 광장을 통과하는 내내, 지원과 히든벅, 이안은 이곳의 분위기에 별 흥미가 없는지 눈길 한번 옆으로 주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러나 수진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재밌어 보이는 것들이 주변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침 약국 앞을 지나치는 중이었다. 약국의 벽과 기둥에는 그곳에서 파는 약들을 소개하는 전단지들이 다닥다닥 빼곡히 붙어있었다. 그런데 소화제나 감기약 같은 일상적인 것들 외에도, 과자처럼 알록달록한 모양의 약 그림들과 그 옆에 써놓은 설명들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제일 먼저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벽 한가운데 붙인 ‘오맙소사그만’이란 약이었다. 가장 잘 팔린다는 베스트 제품을 의미하는 파란별 훈장이 왼쪽 가장자리에 붙어져 있는 전단지에는 한입 크기의 네모난 붉은색 젤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옆으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함께 적혀있었다.     




[‘오맙소사그만’은 갑작스러운 충격이나 끔찍한 상황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계속 편안한 심리적, 육체적 상태를 유지시키는 복합안정제. 특히 심장 약한 분이 공룡 두개골 탑승 전에 복용하면 도착할 때까지 심장마비 없이 마치 내 집처럼 편안한 심리상태를 보장함.

 단 이 약을 먹은 후, 하루 종일 사과를 먹으면 안 됨. 사과를 먹으면 약 기운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딸꾹질을 하기 때문임.]




 다음으로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오른쪽 기둥 중간쯤에 붙은 안약 전단지이었다. 올빼미 머리 모양의 분홍색 뚜껑이 달린 투명 유리병 안에 노란색 액체가 들어있는 그림이었다. 

     



[당신의 눈을 밝혀주는 ‘올빼미 안약’.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기 5분 전, 이 안약을 양쪽 눈에 넣으면 불빛이 없이도 낮처럼 훤히 볼 수 있음. 효력은 대략 3시간. 

 단 부작용은 안약을 넣은 후, 진짜 올빼미와 5초 이상 눈을 마주치면 안 됨. 5초를 넘기면 올빼미가 달려들어 당신의 눈알을 뽑아갈지도 모름. 만일 그런 사태가 발생했을 시, 본 약국과 제약회사는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함.]     




 본디 어둠을 싫어하는 수진은 즉각적으로 이 안약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사야겠다 결심하고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일행에게 좀 빌려야겠다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뿔싸,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약국을 기웃거리는 사이 그만 그들을 놓치고 만 것이다.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그녀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거의 울음을 터트릴 듯 고개를 마구 돌리는데, 한쪽 구석의 허름한 사진관에 앉아있는 제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온 백기사라도 되는 양, 그녀는 후다닥 그리로 달려갔다.

 

 제이는 하얀 벽을 등지고 조그만 나무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못마땅한 지 인상을 팍 쓴 채 앞에 둥둥 떠 있는 카메라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카메라 뒤에 선 사진사 역시 똑같은 표정으로 뭐라고 구시렁대자, 제이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제이는 다가오는 그녀를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어이, 왜 혼자 돌아다니니?”


“일행을 놓쳐버렸어요. 아무리 봐도 찾을 수가 없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이런 혼잡한 곳에선 찾기 힘들어. 서로 길이 엇갈릴 수도 있고. 아마 다들 아케이드 밖으로 나갔을 거야. 출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저리로 나가. 그게 제일 빨라.”


 세 발 달린 새 청동상을 지나 보라색 커튼 앞에 길게 서 있는 줄들을 그가 손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려는데 그만 자신을 바라보던 사진사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엄청 화가 난 상태였다. 그녀는 제이에게 왜 그러냐고 슬쩍 눈짓으로 물어보았다.


“내 여권 사진을 다시 찍으려 하는데 그게 잘 안되네.”


 갑자기 사진사가 꾹꾹 참았던 울분을 확 터트리며 짜증이 난 목소리로 그녀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분은 입국심사를 퇴짜 맞으셨어요. 사진이 너무 안 웃겨서요. 이것 보세요. (그가 제이의 여권 사진이 붙은 면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너무 멀쩡하고 멋있잖아요. 마치 영화배우 프로필 사진처럼 말이에요. 이러면 백 퍼센트 통과 못하죠. 그래서 사진을 찍으러 저의 가게에 오셨는데, 웃긴 표정을 지으시라고 아무리 요청을 드려도 도무지 응하시지를 않는 겁니다. 분장도 절대 사양만 하시고요. 벌써 20분째 이러고 있어요.”


“이봐요. 나도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요. 최대한 웃긴 표정을 짓고 있는 거라고요.”


“말도 안 돼! 당신은 계속 사진기를 노려보고 있잖아요! 이보세요, 얼마나 무서우면 사진기가 이렇게 덜덜 떨겠어요? 에고 불쌍한 것.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아예 찍어드릴 수가 없어요. 그럼 고객님은 영원히 퇴짜를 맞아 아케이드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요. 때마침 숙녀분이 오셨으니 고객님 사진 찍는 것 좀 도와주세요. 네?”


 그녀는 자신의 끔찍한 사진이 눈앞에 떠올랐다. 


'참내, 어떻게 여권 사진이 웃겨야 하는 거지?'


 그녀는 결국 처절하게 애원하는 그로 인해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우선 제이에게 최대한 웃긴 표정을 지어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입술을 꽉 다문 채 숨을 참았다. 사진사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보기에도 이건 웃긴 게 아니라 화형을 당하고 있는 자의 얼굴이었다. 흡사 악령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에게 입을 벌려 활짝 웃어보라고 했다. 그의 윗입술이 찌그러지면서 무척 어색해 보였다. 


‘어떻게 할까?’


 문득 어릴 적 장난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기 검은색 종이나 사인펜 갖고 계세요?”


“당연히 있지요. 여기선 그런 것들이 필수랍니다. 저기서 마음대로 갖다 쓰세요.” 


 사진사가 가리키는 책상 위에는 색색가지 사인펜과 색종이, 가발, 말린 수박씨 등 다양한 분장 도구들이 난장판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우선 검정 사인펜과 수박씨 여러 개를 가지고 제이 얼굴에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싫다며 완강히 거부했지만 강경한 그녀의 눈빛에 곧 항복해버렸다.

 

 몇 분 후, 그녀는 그에게 입을 벌려 활짝 웃으라고 시키고 사진사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었다. 그는 허공에 떠 있던 사진기를 재빨리 손으로 집어 들었다. 렌즈를 들여다본 그의 입에서 감탄 어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주 좋아요, 근데 수박씨를 입술 위로 하나 더 붙이면 훨씬 좋겠군요.” 


 그녀는 바로 작업을 했고 마침내 훌륭한 여권 사진이 찍히었다. 사진사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새 사진이 붙은 여권을 제이에게 내밀었다. 그는 급히 그것을 펼쳐보고는 숨을 헉 멈추었다. 사진 속에서 그의 앞니들이 피아노 건반처럼 돌아가며 검게 칠해져 있고, 코 밑에서 입술까지 이어진 수박씨가 흡사 코딱지 행렬처럼 보였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여권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물티슈로 분장을 빡빡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사진관의 한쪽 벽에 전시된 사진들을 흥미롭게 감상하였다. 그러다 그만 한 사진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두 명이 함께 찍힌 사진 속에 박지원 아저씨가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정말로 똑같았다. 그런데 사진 속의 그는 하늘색 도포를 입고 검은 갓을 쓴, 몇 백 년 전의 조선시대 복장이었다. 그의 옆에는 금색 반바지를 입은 백호랑이가 직립으로 일어서서 그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사진의 배경은 높은 대리석 기둥들이 웅장하게 세워진 어느 그리스 신전 같았다. 


 그녀는 사진사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서 가자며 재촉하는 제이 때문에 바로 떠나야 했다.

       



 그들은 까마귀 청동상의 세 발 사이를 지나 보라색 커튼이 내려진 곳으로 갔다. 바닥에는 동맹국 여권 색깔과 같은 색으로 칠해진 두꺼운 띠들이 나란히 그어져 있었다. 



노랑 띠는 일룸니아

검정 띠는 뱀파니아 

빨강 띠는 오나시아 

파랑 띠는 아쿠아니아

갈색 띠는 스위티니아

초록 띠는 딥언더니아


 

 오나시아인인 제이가 그녀 앞으로 서고, 동맹원들은 각자 국적에 맞는 띠를 밟으며 줄을 섰다. 호각소리가 나자 제일 앞줄의 여섯 명이 다 함께 커튼 밑으로 넘어갔는데, 아주 가끔씩 여권 사진을 퇴짜 맞아 커튼 밑으로 되돌아오는 자도 있었다. 제이가 커튼 밑으로 넘어갔다. 다행히 그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드디어 그녀 차례가 되었다. 호각소리가 나자 나란히 선 여섯 명이 밑으로 넘어갔다. 커튼 뒤로는 텅 비어있고, 저 멀리 떨어진 앞 벽에 나무문이 하나 달려있었다. 그런데 같이 들어온 다섯 명이 가장 왼쪽에 서겠다며 서로 밀치고 싸워대는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이들의 힘겨루기에 밀려 원래 세 번째에서 가장 오른쪽으로 밀려났다. 자리싸움은 우렁찬 으르렁 소리에 바로 끝이 났다.


“크헝~크헝, 일이 바쁘니까 빨리 여권 꺼내놔. 빨리!”


 사납게 생긴 고릴라 감시관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가장 왼쪽에 선, 자리싸움의 승자가 된 딥언더니아인에게 쿵쾅거리며 다가갔다. 하얀 장교복을 입은 고릴라의 왼쪽 가슴 위로 번쩍이는 훈장들이 가득 달려있었다. 그의 충혈된 두 눈이 딥언더니아인을 무섭게 노려보자, 그녀를 제외한 다섯 명 모두가 사진이 붙은 여권 면을 감시관 눈높이에 맞게 동시에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도 얼떨결에 눈치껏 따라 했다.


 잠시 후, 그의 이마에 주름이 생기고 호흡이 불규칙해지더니 목젖까지 보일 정도로 크게 웃어댔다. 


“푸하하하, 1번 사진은 좀 부족해도 통과시키곤 했는데 이건 뭐 대단하군. 통과! 그리고 너도 통과, 통과!”


 운이 좋으면 웃어대던 그의 입에서 누런 침이 튀어나와 중간에 서 있던 저 스위티니아인처럼 얼굴에 침팩을 공짜로 발라주기도 했다. ‘통과’라는 말이 들리면 허공에 떠 있던 나무도장이 날아와 여권에다 입국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러면 여권 주인은 걸음아 나 살려라 달려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 그의 미소가 다섯 번째로 서 있는 왜소한 뱀파이어 남자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원래의 포악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주먹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다.


“이건 하나도 웃기지 않아. 전혀 웃기지가 않다고! 퇴출!” 


 그러나 뱀파이어는 들은 척도 안 한 채 불쑥 손으로 그를 밀치고 문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바닥에 넘어진 고릴라의 한쪽 팔이 밧줄처럼 쭉쭉 늘어나더니 도망가는 그의 허리를 단숨에 휘감았다. 그리고 팔을 허공에다 빙빙 돌리다가 커튼 쪽으로 탁 내던졌다. 그는 주춤거리며 일어나 커튼 뒤로 조용히 사라졌다. 


 수진 차례가 되었다. 그녀의 가슴은 마구 떨리고 영 불안했다. 감시관은 방금 전 일로 기분이 상한 듯 그녀를 몇 초 째려보고 나서야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그의 이마에 다시 주름이 잡히더니 껄껄 웃기 시작했다. 


“통과.” 


 입국도장이 날아와 여권에 다음과 같이 찍어주었다. 


3000년  희망의 달  26일에 입국


 그녀는 낯선 요일 표시에 의아했다. 하지만 지체하지 않고 빨리 문으로 돌진하여 열고 나갔다.     


 

 컴컴한 새벽하늘 아래, 신비한 키릴장막이 높은 담처럼 빙 둘러싸고 있는 푸른 평원이 펼쳐졌다. 제이의 예상대로 히든벅과 이안은 출구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이안은 또르르 달려와 성난 표정으로 그녀를 다그쳤다. 


“제이가 와서 말 안 해줬으면 들어가서 너를 찾을 뻔했어. 제발 한눈 좀 팔지 마. 응?”


“알았어. 근데 지원 아저씨는?”


“양탄자 사러 갔어. 곧 올 거야.”


“양탄자? 아까 아케이드에서 보던 날아다니는 양탄자 말이야?”


“응. 이제부터 날아가야 하거든. 자동차로는 가기 힘든 곳이야.”


“광장 안의 상점들에서도 많이 팔던데?”


“그렇지? 너도 분명히 봤지? 근데 너무 비싸게 부른다고 그가 불평하더라고. 출구 밖에서 사는 게 더 싸다면서. 근데 비싸 봤자 얼마나 더 비싸겠어? 꼭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한단 말이야.”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대답했다. 예전 기억이 떠올라 그녀가 물었다.


“혹시 여행킷에 날아가는 기구가 들어있지 않을까?”


“아까 같이 몇 번이나 확인해 봤는데 없어. 너무 저렴한 것을 구입해서 날아다니는 것이 열기구밖에 없더라고. 그것은 너도 알다시피 이미 못쓰게 되었고. 역시 돈을 좀 줘서라도 괜찮은 것을 사야 된다니까.”     


 지원 아저씨를 기다리는 동안, 출구에서 동맹원들이 계속 튀어나왔다. 

 그들은 경비행기, 헬기, 자동차, 버스, 트럭, 오토바이, 자전거, 사륜마차, 양탄자, 빗자루, 롤러스케이트 등 별의별 이동수단을 타고 그곳을 떠났다. 


 초록색 피부를 가진, 맨발의 아쿠아니아인들이 절룩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어디선가 트럭이 달려와 뒤쪽에 놓인 수조 안에 그들을 태웠다. 물속에서 그들의 다리는 순식간에 붙더니 물고기 꼬리로 변하였다. 트럭은 구석에서 계속 대기했고 마지막 손님이 나오자 태우고 출발했다.


 그리고 한 남자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자세히 보니 아까 수진 옆에서 사진 때문에 퇴출당한 바로 그 뱀파이어였다. 그는 매우 급했는지 사진을 찍기 위해 받은 광대 분장을 아직도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눈가에 판다곰처럼 푸른 멍이 크게 칠해져 있고, 입술 주변으로 초콜릿과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있었다.

  

“허버트~ 허버트~ 안 나왔나 보군. 여보시오, 여기 장사꾼 아무도 없소?” 


 그가 허공에다 크게 외치자, 저 멀리 쓰러진 나무 덤불 뒤에서 어떤 자가 고개를 위로 삐죽 내밀어 대답했다.

  

“주인은 지금 화장실 갔소. 내가 대신 가게를 지키고 있지요.” 


 지원의 목소리였다. 뱀파이어가 그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동생이 마중 나온다 했는데 아마 오지 못하나 봅니다. 이동수단을 하나 사야겠는데요.”


“그럼 이리 와서 같이 기다립시다. 곧 주인이 올 거요.”


 그는 그리로 갔고, 지원은 그의 분장한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가게라고 해봤자 덤불 옆으로 박쥐 몇 마리가 들어있는 나무상자와 둘둘 말린 고물 양탄자 두서너 개뿐이었다. 주인을 태운 양탄자가 돌아왔고, 뱀파이어는 박쥐 두 마리를 사서 양쪽 발밑에 한 마리씩 붙인 채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지원은 역시나 가장 싼 양탄자를 그것도 한참 동안의 흥정으로 더 할인받아 구매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목격한 이안은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그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수진과 일행이 탑승하자 양탄자는 덜덜거리며 평원 위를 날아갔다. 처음엔 그것의 신통치 않은 상태 때문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추락하진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