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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Mar 05. 2016

7. 한밤중의 사냥꾼들 - 2


“지원 아저씨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바위 옆에서 숨을 고르며 그녀가 묻자 이안이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몰라, 달리다 보니 길이 어긋나 버렸나 봐. 다들 장막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저기, 히든벅은 괜찮을까? 아까 그 비명소리 들었잖아. 혹시 다친 거나 죽은 거면 어떡해?”


“괜찮을 거야. 그의 비명은 아니었어.”


 그녀는 곧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녀는 잠시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커다란 나무뿌리가 밖으로 튀어나와 안으로 아늑한 홈이 생긴 곳에 그녀를 앉혔다.


“여기서 쉬고 있어. 한 번 둘러보고 올게. 금방 올 테니 꼭 여기에 있어야 해. 어디 가지 말고, 응?”


“나 두고 어디 가려고, 갈 거면 같이 가.”


 휘청거리며 일어서려는 그녀를 그가 붙잡아 앉히며 다독거렸다.


“10분이면 돼. 그리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있어. 절대 소리 내지 말고.”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가끔 그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또다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나무뿌리 안쪽 홈에다 등을 대고 눕자 생각보다 꽤 아늑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잠이 들었다. 



“킁킁, 킁킁, 킁킁.” 


 이상한 소리에 그녀는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다.


“이안이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누우려는데 그녀의 얼굴로 찬기운의 바람이 쏴아 불어왔다. 그리고 파란빛을 내뿜는 한 무리가 어두운 수풀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그녀가 앉은 나무 주위를 빙 둘러싸며 완전히 포위해버렸다. 


 사냥개들과 말을 탄 사냥꾼들, 말을 모는 하인들의 몸에서 파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발이 땅에서 떨어져 10센티가량 공중에 떠 있었다. 그녀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들이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사자나 표범 가죽을 몸에 두르고 등에 화살집을 멘 사냥꾼들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로에게 뭐라 말을 건넸지만, 너무 시끄러워서 그녀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무뿌리를 붙잡고 그녀가 일어서려 하자 사냥개들이 사납게 위협하기에 그녀는 주저앉아버렸다. 사냥꾼들 중 가장 덩치가 크고, 감긴 왼쪽 눈 위로 칼자국이 길고 선명하게 난 애꾸눈 남자가 휘파람을 불자 개들은 얌전해졌다. 

 

 그는 말에서 내려 파란 화염에 휩싸인 채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 앞에 멈춰 서서는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뭔가를 꺼내 쓱 내밀었다. 고급 수제 초콜릿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먹으라고 직접 먹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그녀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예전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그녀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저승에서 아무것도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 만약 저승에서 뭘 먹으면 영원히 그곳에 갇히게 될 것이다.’


 비록 저승은 아니지만 유령이 주는 것 역시 절대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자 그녀는 초콜릿을 그의 손바닥 위로 다시 공손히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싹 바뀌더니, 갑자기 자기 목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고통스럽다는 듯 난리법석을 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냥꾼들과 하인들도 똑같이 목을 부여잡고 땅을 구르며 바르르 몸을 떠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뒤로 돌아가고 하얀 거품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냥개들과 말들조차 바닥에 드러누워 몸에 경련이 일며 이리저리 발광했다.


 곧 정신을 차린 애꾸눈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무섭게 호통을 쳤다. 아마 그녀가 먹지 않아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를 감싼 파란 불꽃이 점점 더 세게 타오르고, 그의 표정은 거의 도깨비처럼 무시무시해져 갔다. 겁에 질린 그녀가 나무뿌리 안으로 숨으려 안간힘을 쓰자, 사냥개들의 입에서 파란 불덩이가 침처럼 튀기며 그녀의 등을 향해 무섭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애꾸눈의 손에는 어느새 채찍이 들려있었다.

 

“휘이익.”


 채찍이 공기를 가르며 그녀의 등을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죽은 자들은 어서 여기를 떠나라! 그녀는 사냥감이 아니란 말이야!”


 크게 소리를 지른 이안이 나무 위에서 툭 떨어져 그녀 앞을 가로막아 섰다. 개들이 한층 더 요란스럽게 짖으며 덤벼들 태세를 갖추었고, 사냥꾼들은 화살과 칼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애꾸눈이 채찍을 내리더니 왼손을 들어 무리를 진정시켰다. 높았던 화염이 점점 낮아지고 안정을 되찾은 그가 이안을 물끄러미 관찰하였다. 그의 입이 조금 벌려지더니 쉰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 너 역시.. 죽은 자가.. 아니던.. 가?... 피를 빨며... 사는... 뱀파이어 주제에...”


 유령의 억양은 정확하지 않고 대부분 흘려버리는 메아리 수준이었지만, ‘피를 빨며 사는 뱀파이어’란 부분은 수진에게 명확히 들려왔다. 


‘이안이 뱀파이어라고?’


 만약 그 말을 한 자가 산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농담하지 말라며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서 나온 말이기에 감히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어떤 위엄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거나 말은 해도 거짓을 고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 시각, 그녀보다 더 당황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안이었다. 자신의 비밀이 그녀에게 이렇게 탄로 날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뭐라고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는 그를 바라보며 애꾸눈이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의.. 모습.. 이 누구.. 를.. 무척... 닮았어... 내.. 가.. 가장 증오하는.. 자와.. 말.. 이야...”


“증오하는 자라니, 마왕 블랙수트를 말하는 건가?”


 이안의 말에 그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꺽꺽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소름 끼치던지 마치 유리 위를 못으로 찍찍 그을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웃음을 멈춘 그가 휘파람을 불어 신호를 보내자, 사냥개들과 다른 유령들이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그의 손에도 어느새 긴 창이 들려 있었는데, 몸에서 전해 받은 파란 화염에 휩싸여 날카로운 창끝이 높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아악~”

 

 그가 비명을 지르며 창을 힘껏 내던졌다. 이안이 재빨리 마법지팡이를 꺼내어 날아오는 그것을 막으려 했다. 창과 지팡이가 서로 딱 부딪쳤다.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지팡이가 창의 불꽃을 야금야금 먹어버리더니 그것을 먼 바깥으로 튕겨버린 것이다. 동시에 애꾸눈을 포함한 사냥꾼 무리도 다 같이 튕겨져 나갔다. 탈출구가 확보되자 이안은 수진을 어깨에 들쳐 메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숲 여기저기로 팽개쳐진 파란 불꽃들이 서서히 일어나더니 애꾸눈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주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애꾸눈은 손에 든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외눈을 감은 채 홀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안은 숲이 끝나는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수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느새 하늘에서는 밤이 물러나고 새벽 기운이 물씬 묻어 나왔다. 잠시 정신을 잃은 그녀 옆으로 그가 다가와 앉았다. 그는 품 안에서 마법지팡이를 꺼내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아무 주문도 걸지 않았는데 지팡이가 스스로 퇴치하다니.’


 그녀가 정신을 차렸는지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기어서 멀찌감치 떨어지려 했다. 잠시 후 말을 꺼내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었다. 


“뱀파이어...라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머릿속으로 그동안의 의문스러운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음식을 먹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늘 붉은 액체만 마셨어. 점프와 달리기 등이 보통 사람 같지 않았고. 그래, 순록 사건이 있던 날에도 옷에 붉은 자국이 있었지. 그럼 그때 지원 아저씨께 건넨 병 안의 액체도, 다 피였던 거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자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이제 그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시간문제야. 아, 내가 왜 따라왔을까?’ 


 얼굴이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그녀는 그의 앞으로 조심히 다가가더니 덥석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비비며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줘, 제발. 내가 사냥을 해서라도 너의 양식을 꼭 구해 볼게.” 


 그녀의 애절한 호소에 진정성 어린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 난 사람 피는 먹지 않아. 오직 동물 피만 먹지. 근데 지금 네 얼굴을 네가 직접 봐야 하는데. 너 지금 콧물을 줄줄 먹고 있어. 하하하.”


 그녀는 그만 멋쩍어져서 손으로 콧물을 훔쳐냈다. 그사이 그는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호소했다.


“수진, 난 절대 너를 해치지 않아. 만약 못 믿겠다면, 좋아. 브라잇동맹사에 손을 얹고 맹세하지. 널 절대 해치지 않는다고.”


 그는 오른손바닥을 마치 앞에 가상의 책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위에 얹는 제스처를 취하며 맹세를 했다. 그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그제야 그녀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가 손수건을 건네주자 그녀는 그것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냈다. 날은 점차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상한데. 한밤중의 사냥꾼들이 동맹 밖에서 목격되다니.”


“도대체 그 유령들은 다 뭐야?”


 그녀가 다 쓴 손수건을 되돌려주며 물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가 그것의 걸쭉해진 상태를 보고 그냥 가지라는 제스처로 손을 흔들면서 대답했다. 


“그들에 대한 전설은 매우 오래되었어. ‘하하호호히히’에서는 반년마다 붉은 달이 뜨는데 그런 밤에는 저들이 브라잇 동맹의 숲을 헤매고 다닌다는 거야. 연기를 보거나 소리가 나면 달려가서 무자비하게 사냥을 한데. 산 자의 영혼을 말이지. 그래서 붉은 달이 뜨는 밤에는 외출을 금하고, 집 안에서조차 불을 피우거나 소음을 내지 않도록 주의하는 전통이 있어. 근데 이곳은 동맹 안이 아니란 말이야. 어쨌든 진짜 큰일 날 뻔했어. 특히 너 말이야.”


 그는 아까의 기억을 떨쳐 내려는 듯 고개를 여러 번 흔들어댔다. 그녀는 문득 유령과의 대화가 떠올라서 다시 물었다.


“근데 블랙수트는 누구야?”


 그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눈치를 보아하니 말을 할까 말까 사이에서 계속 고민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고 그녀가 재촉하자, 그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혹시 브라잇 동맹이 결성된 이유를 알아?”


“응. 예전에 지원 아저씨가 말해줬어. 가까이 모여 살던 나라들이 동맹을 만들었다고. 그리고 너는 브라잇 동맹의 수장국인 ‘일룸니아 왕국’의 정통 왕자라는 것까지.”


“그가 설명을 잘해줬겠지만 사실 그게 다는 아니야. 동맹이 만들어진 이유는 그저 가까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어. 다른 절실한 이유가 있었지.”


“절실한 이유?”


“응.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마왕 블랙수트와 전쟁을 벌였거든. 전쟁에서 이겨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섯 왕국이 힘을 합쳐 싸울 수밖에 없었어. 참고로, 그때 뱀파니아 왕국은 동맹국이 아니었어. 다섯 나라는 나의 직계조상인 일룸니아 왕국의 가장 위대한 왕 ‘이안 1세’를 주축으로 방어 동맹을 결성했지. 나의 이름은 정확히 말하자면 ‘이안 7세’란다. (그는 이때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브라잇 동맹은 목숨을 바쳐 용감히 싸웠고 결국 블랙수트를 이겼어. 이안 1세는 전쟁에서 진 그를 지하 깊은 곳 얼음 속에 봉인해버렸지. 이후 마왕의 수하들조차 이 땅에서 종적을 감췄는데, ‘한밤중의 사냥꾼들’도 그중 하나였어. 원래 오나시아 왕국 태생인 사냥꾼들은 마왕 편에 가담했었는데, 그가 전쟁에서 질 것이 확실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 모두 독약을 넣은 초콜릿을 먹고 자살했데. 심지어 사냥개와 말들도 먹여서 다 같이 죽였다지 아마.”


“초콜릿이라고?”


 그녀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그녀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하였다. 


‘그럼 아까 애꾸눈이 주었던 것이 독약이 든?’


 그녀의 반응에 의구심이 든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정색한 채 물었다.  


“혹시 너, 그것 먹은 거 아니지? 한 입이라도 말이야.”


“안 먹었어. 그에게 다시 돌려줬어.”


“정말이지? 정말 안 먹었지? 브라잇동맹사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어?”


“안 먹었다니깐. 내가 유령이 준 것까지 먹을 정도로 돼지인 줄 알아?”


 화를 내는 그녀의 머릿속에 아이스크림을 게걸스럽게 퍼먹던 상민이 떠올랐다. 혹시 이안이 자신을 그렇게 보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들려는 찰나, 그가 엄지손가락을 입술에 대더니 조용히 하라고 시켰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저 멀리 가시덤불 옆에 놓인, 땅에 납작 엎드려있는 회색 바위를 가리켰다. 


 그들이 그곳으로 다가가는데 바위가 꿈틀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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