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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Feb 04. 2016

6. 제임스 왕을 찾아온 뜻밖의 손님

6. 제임스 왕을 찾아온 뜻밖의 손님


“올해부터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로 이미 공표하였던바, 현재까지 징수된 총 세수는 금화 2억만 닢(브라잇 동맹의 화폐단위)으로...”


 일룸니아 궁전 중앙홀의 대접견실.

 

 그 끝에는 수십 개의 신비스러운 칼이 등받이 테두리를 따라 나란히 꽂혀있고,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를 깎아서 만든 일룸니아 왕국의 그 유명한 왕좌가 놓여있었다. 제임스는 그 위에 거만한 표정으로 앉은 채 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센 신하의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뒷벽에 뚫린 조그만 비밀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왕좌를 비추자 그는 마치 해를 깔고 앉은 존엄한 신이라도 된 것처럼 눈부시게 빛이 났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행복한 기분에 젖어 딴생각을 하던 그의 눈앞에 문득, 칼에 찔려 눈물을 그렁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어린 조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여러 번 내저었다. 그러자 앞에서 발표하던 신하의 표정이 두려움에 휩싸여 파랗게 변해갔다. 왕이 지금 안건에 대해 심히 불쾌하다는 표시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그것과는 상관없었다. 그저 이런 불순하고 재수 없는 기억은 빨리 잊을 필요가 있다 여겨, 마법사 클라우드를 만날 때 망각의 약을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그제야 발표되는 안건이 그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마법사 와이즈맨이 중병에 걸려 거동이 힘든 가운데 현재까지 별 차도가 없다 합니다. 앞으로 언제 쾌차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왕국의 대마법사 자리를 계속 비워둘 수 없기에 그를 사직시키시고 새로운 자를 임명하심이 옳은 줄로 사료되옵니다. 왕께서 직접 임명하여 주시옵소서.”


“저런, 매우 안타까운 일이오. 그러나 새 왕에게는 새 마법사가 필요한 법, 나한테 좋은 인재가 있으니 지금 바로 임명하겠소. 대마법사 자리에 클라우드를 임명하는 바요.”


 이름을 듣자 신하들은 웅성거렸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그의 임명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보고를 하던 신하가 다시 왕에게 공손히 읍하며 여쭈었다.


“클라우드의 마법력이 우수하기는 하나, 그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오만해 그런 큰 자리에는 적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다른 자로 하심이...”


“왕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 무슨 말이 그리 길단 말이오? 그는 나와 형제나 다름없는 자요. 지금의 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자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오. 지금 당장 임명장과 그에 합당한 절차를 준비하도록 하시오!”


 제임스가 크게 호통을 친 후 왕좌에서 벌떡 일어나 접견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감히 왕의 권위에 토를 달다니 괘씸한 것들, 곧 저 노인장들도 확 갈아치워야겠어.’

 

 그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주먹을 쥐어 허공에다 흔들어댔다. 이 시점에 와이즈맨이 아파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은 그에게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형 메이슨을 배신하고 자신을 도와주었지만 한 번 배신한 자가 두 번 배신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그를 제거하려 벼르고 있던 차였다. 아주 좋은 기회가 스스로 굴러들어 온 것이다.     


 제임스는 서재로 향하였다. 문 앞을 지키던 병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안에서 클라우드가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안 그래도 망각의 약 때문에 부르려 했는데 스스로 알아서 이리 기다리고 있다니, 역시 대마법사 감이로다.’

   

 그는 흐뭇한 표정을 띤 채 안으로 들어섰다. 클라우드가 비단 의자에서 일어나 공손히 목례를 했다. 그들은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나란히 선 채 대화를 나누었다.


“위대한 일룸니아의 제임스 왕이시여, 앞으로 무한한 영광이 그대와 이 왕국에 함께 하길 진심으로 바라옵고 또 바라옵나이다.”


“아, 내가 늘 말하지 않소? 원래 하던 대로 합시다. 우리 사이에 이리 예의 차릴 필요는 없지 않소?”


“폐하는 이제 한 나라의 공식적인 왕이십니다. 왕 앞에서 예의를 차리는 것이 신하로서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신하인 저의 입장을 헤아려주시옵소서.”


“하하, 그럼 그렇게 하시오. 그나저나 그대에게 꼭 전할 말이 있소. 오늘 와이즈맨을 파직하고 그대를 왕국의 대마법사 자리에 임명하도록 지시를 내렸소. 어떻소? 기쁘오?”


 그는 말로는 기쁘다고 했지만 듣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무표정했다. 기대했던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자 오히려 제임스는 저 스스로 당황하여 먼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클라우드가 넌지시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제가 드렸던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무슨 말이요?”


“메이슨을 처치할 때 꼭 킬링상자에 넣어 죽여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그 상자를 주실 때 아무것도 묻지 말아 달라 미리 요청드리지 않았었습니까?”


 상자 안의 네 면에 날카로운 못이 촘촘히 박혀있는 킬링상자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왕은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랬지. 그래서 그대의 말대로 다 하지 않았소? 그것을 주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었지.”


“그때는 상황이 여의치 못해 말씀드릴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미 원하신 대로 다 이루어졌기에,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 오늘에서야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서 이야기해보시오. 나도 참 궁금했었소. 도대체 왜 형을 킬링상자에 넣어야만 했었소?”


“그건 바로 그분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일룸니아 왕국의 정통성을 물려받은 왕의 피만이 저의 진짜 주인님을 부활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 비친 광기를 보자 제임스의 등짝에 순간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당황한 왕의 목소리가 부르르 떨리었다.


“클라우드,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에게 진짜 주인이 있다니, 왜 처음부터 나에게 말하지 않았나? 피가 필요하다면 그대의 주인은 뱀파이어인가?”


“뱀파이어보다 훨씬 강한 분입니다. 이 세상에 그분보다 더 강한 자는 없습니다. 왕께서도 무조건 복종하셔야 합니다. 마침 그분이 지금 여기에 와 계시니 인사를 올리시지요.”


 제임스의 눈앞이 컴컴해졌다. 왕좌에 눈이 멀어 무작정 도와주겠다던 그를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반란을 도모할 때 그가 몰고 왔던 군대에 대해서도 이상한 감이 들긴 했지만 그냥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다 미끼였던 것이다. 그때 덥석 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클라우드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재와 왕의 침실을 연결하는 비밀문으로 다가갔다. 노크를 하고 잠시 후 문을 열자,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 박스 티셔츠와 화려하게 보석들이 달린 금목걸이, 그리고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최신식 검정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힙합가수가 주로 입는 복장이었지만 그런 음악적 장르를 전혀 모르는 왕의 눈에는 매우 해괴한 복장으로 보였음이 틀림없었다). 커다란 챙 모자가 갸름한 턱과 사파이어 귀걸이를 착용한 한쪽 귀를 제외하고 그의 얼굴을 다 가려버렸다.


 그가 서재 안으로 들어오자 제임스는 또다시 충격에 빠지었다.


‘저 문은 어제저녁 열쇠로 잠가두었어. 열쇠는 궁전에서 나만 갖고 있는데 어떻게 저기서 나오는 거지? 삼엄하게 감시하는 내 침실에는 또 어떻게 들어갔고?’


 남자는 클라우드가 두 손으로 정중히 가리키는, 일룸니아의 왕만이 앉을 수 있다는 검은 책상 의자로 다가갔다. 그가 털썩 거기에 앉자, 앞의 벽난로에서 불길이 순식간에 높게 치솟았다. 마치 그것이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하는 듯했다. 가만히 미소를 짓던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었다.


“그대 덕분에 내가 새 생명을 얻었소.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보답으로 잠시 그대를 왕의 자리에 그대로 앉혀둘 작정이오.”


 책상 앞에 어정쩡하게 선 채, 제임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굴려도 그의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매우 독특했고, 고대 사람들이 사용했다는 발음과 낮게 깔린 저음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어 말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잠시’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가 떠오르지 않는군. 3,000년 만에 다시 이곳도 방문해 보고. 그때나 지금이나 많이 달라지지 않았군그래. 그런데 이 책상과 의자는 처음 보는데? 음, 블랙 드래곤의 뼈와 가죽으로 만든 것들이군.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슬픈 현실이야. 근데 말이야, ‘잠시’라고 하면 한 삼 년 정도를 뜻한다고 보면 될까?”


 주인이란 자가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꾸자 제임스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노기 띤 목소리로 마구 꾸짖기 시작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누구이기에 왕인 나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 나는 브라잇 동맹의 수장국인 위대한 일룸니아의 왕이다. 누구도 나보다 위에 군림할 수 없거늘, 감히 건방지게 누구에게 헛소리를 퍼붓는 것이냐? 내가 부르면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수백의 병사들이 들어와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무덤은 네가 판 것이렷다!”

 

 그가 큰소리로 병사들을 불렀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더 크게 불러보았다. 대답은커녕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운 적막이 문틈으로 흘러들어와 그의 피부와 뼈를 시리게 했다. 그는 불안해졌다.


‘분명 아까 그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여긴 그가 손수 문을 열고 나가 양쪽 복도를 둘러보았다.


“앗, 이럴 수가.”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그만 제자리에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복도 바닥이 병사들의 시체와 피로 뒤덮여 있었다. 아까 문 앞에서 그에게 귀띔을 해주던 병사는 자신의 칼로 직접 배를 그은 채 처참히 죽어있었다. 그의 넋 나간 모습을 본 주인과 클라우드가 안에서 한참을 웃어댔다. 웃음을 가까스로 멈춘 주인이 혀를 차더니 냉정하게 빈정거렸다.


“쯧쯧. 그의 후손이 저렇게 멍청하다니, 영 실망인걸. 이렇게 시시해서야.”


 불현듯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린 제임스.


 품 안에서 마법지팡이를 꺼내려는 찰나, 그의 몸이 뒤로 확 잡아당겨지며 서재 안으로 튕겨 들어갔다. 동시에 문도 꽝 닫히었다.


 피로 물든 복도 사이로 누군가의 커다란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궁전은 잠의 마법에 빠진 듯 아무도 그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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