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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당신이, 새로운 당신을 가로막을 때

자신을 가로막는 자신의 기준을 재정의할 때, 삶은 변한다.

by 김권수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자기 기준이 나를 가로막고 있을 때


우리의 변화를 가로막는 것은,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자기 기준’일 때가 많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싶어하지만,

“나는 원래 무뚝뚝하고 사교성이 없어.”

다이어트를 해야지 결심하고 운동복을 꺼냈는데,

“난 원래 운동을 좋아하지 않잖아. 괜히 힘들게 하지 마.”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싶어하지만,

“난 원래 언어 감각이 없잖아, 어차피 해도 잘 못할 텐데..”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싶지만,

“나는 낯을 가리고 말이 느려서 자신이 없어.”


마음속 분명한 소망과 바람은

내 안의 오래된 기준과 충돌하면,

우리는 멈춥니다.

그 기준은 대부분 반복된 경험이나 누군가의 말, 강렬했던 한 사건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것이 무의식에 새겨져, 어느덧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식의 자기 정의, 자기 기준으로 굳어집니다.


문제는, 이 기준이 지금의 욕망이나 가능성과 어긋나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뇌는 일관성을 유지하려 하고, 모순은 곧 불안이기 때문입니다. 불안은 뇌에 위험 신호를 보내고, 우리는 다시 익숙한 틀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 앞에서 막연한 불쾌감이나 기분 나쁜 긴장감을 느낄 때, 그건 실패의 전조가 아니라 기준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익숙한 자기 목소리와 대화하기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기준이 진리가 아니라, 단지 <익숙한 예시>들일 뿐이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예시는 대부분,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타인이 만든 기준이거나, 과거의 나로부터 유입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시 쓸 수 있습니다.


“나는 원래 무뚝뚝해.”

→ 그런데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땐 누구보다 유쾌하게 농담도 잘하지 않나?

“나는 운동을 싫어해.”

→ 하지만 친구들과 셔플댄스를 할 땐 꽤 즐겁지 않았나?

“나는 언어에 소질이 없어.”

→ 그런데 좋아하는 드라마 대사는 곧잘 따라 하지 않았나?


이렇게 작은 반례를 찾아내고, 스스로의 기준을 재정의해보는 겁니다.

→ 무뚝뚝해 보여도, 친해지면 따뜻한 사교성이 드러날 수 있고,

→ 운동을 싫어해도, 재미있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즐길 수 있으며,

→ 언어 소질이 없어도, 꾸준히 익히면 술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옵니다.


뇌는 익숙한 것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선택하려 하지만, 그것에 자신을 가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처음엔 약간의 용기와 불편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걸 건너면 우리는 두 가지를 얻게 됩니다.


불필요한 내면의 갈등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를 향한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물어보세요


“그건 진짜일까, 그냥 익숙한 말일 뿐일까?”

자신의 부정적 기준에 작은 균열을 내고 재정의하는 순간, 그것들은 새로운 변화를 문으로 바뀝니다. ‘당연하게’ 믿어온 것들에서 딱 한 발짝만 다른 방향으로 내딛는 용기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우리를 막는 건 외부가 아니라, ‘나는 원래 이래’라는 내면의 기준입니다. 마음속 바람과 욕망은 분명히 있는데, 무의식에 자리 잡은 익숙한 기준이 발목을 잡습니다. 그 목소리를 바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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