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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 in Wonderland Aug 22. 2017

그곳은 소박한 취향의 세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火山のふもとで] 독후감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건축가인 주인공이 경륜이 풍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고한 유명 건축가 ‘무라이 선생님'의 설계사무실에 들어가 한 사람 몫의 건축가가 되어 가는 이야기. 특히 설계사무소에 들어간 첫 해 여름, 도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사무실의 설계 인력 대부분이 ‘선생님’이 지은 여름 별장이 있는 가루이자와의 아오쿠리 마을로 옮겨 가서 겪는 일들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젊은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던 무라이 선생님이 주인공을 채용한 두 가지 이유가 ‘여름 별장’에서 생활하는 사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사무실 직원들의 마음에 저마다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하는데…




 스포일러를 피하고 줄거리를 시놉시스 방식으로 요약하면 그저 이 정도가 아닐까.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火山のふもとで](2012)는 들썩거리는 스토리라인, 속도감 있는 전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충돌하는 캐릭터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끝까지 읽기 어려운 소설일 수도 있겠다. 소설의 대부분은 1982년의 여름부터 겨울 입구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절이라면 지금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작고 납작한 기계장치들의 ‘시조’들이 간신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다. 이때 조금씩 ‘일반적’인 물건의 위상에 올라선 것은 기껏해야 컬러TV정도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배경이 도쿄가 아니라 휴양지로 유명한 가루이자와. 일부러라도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 자연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곳이므로 주변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말 그대로 클래식하다. 별장의 나무 바닥과 장작을 태우는 벽난로, 마당의 커다란 나무, 넓은 부지를 성글게 둘러싼 울타리, 그 안에서 제멋대로 소리를 내는 산새들, 그리고 생각난 듯 간헐적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별장을 내려다보는 아사마浅間산까지 모두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것들이다.


 느릿하게 진행되는 소설의 한 축은 주인공이 한 사람의 건축가로서 ‘선생님’과 교류하며 성장하는 모습이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보는 ‘선생님 건축’의 특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미 주인공은 대학생 시절에 ‘선생님’이 설계한 교회를 실측하면서 마음 속으로 존경하게 되었고, 그 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설계사무소에 이력서와 입사 희망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가 입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선생님’은 그 자체로 주인공의 ‘롤 모델’이며, 소설 내내 곳곳에서 드러나는 ‘선생님’의 건축가로서의 커리어와 능력도 주인공의 무한한 존경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다. 소설은 그런 선생님에게 영감을 준 스웨덴의 건축가 아스플룬드의 작품인 스톡홀름 시립도서관과 공립묘지인 ‘숲의 묘지’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을 때는 구글에서 이미지를 찾아보면서 스토리를 따라가는 재미도 있었다.


 이 소설의 다른 축은 ‘건축’을 제외한 작은 줄기들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그걸 그냥 ‘취향’이라는 단어로 응축하고자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마음의 움직임, 그러니까 가까이서 사람을 좋아하고, 멀리서 걱정하고, 드러나지 않게 질투하고, 소리없이 경쟁하는 것 역시 ‘취향’의 일부일 테고, 개개인이 좋아하는 음악과 그림, 먹는 음식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이 페이지를 충분히 차지하며 꼼꼼하게 설명이 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의 자동차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묘사돼 있어 잠깐 옮겨보기로 한다.  



 여자 직원들 방이 늘어서 있는 동관 곁에 세워진 목조 차고에는 다섯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다. 크림색 볼보 스테이션왜건240은 선생님의 장거리 여행용 차인데, 여름 별장에서는 주로 장 보러 갈 때 이용했다. 그 옆이 이구치 씨의 다크 그레이 메르세데스 벤츠 스테이션왜건 300TD. 그리고 가와라자키 씨의 메탈릭 블루 시트로엥 DS21과 고바야시 씨의 짙은 감색 푸조305왜건. 제일 끝에 차 주변이 텅 빌 정도로 작은, 마리코의 까만 르노5가 서 있다. (p.84)



 연필을 좋아하다보니 이런 묘사에는 당연히 눈길이 간다.



 우치다 씨의 연필 깎기는 가구 직공의 손놀림과 비슷했다. 그 어느 곳에도 여분의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가락이 폴딩나이프를 가볍게 움직이면서 사각사각 재빨리 깎는다. 칼 끝 각도가 얕으니까 찌꺼기도 얇다. 깎이는 연필이 기분 좋아 보인다. (p.87)



 당연히 연필 깎는 칼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입사하자 선생님이 손수 내 이름이 새겨진 오피넬 폴딩나이프를 연필 깎는 데 쓰라며 주셨다.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은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 차면 여름 별장으로 옮긴다.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로 곁 선반에는 연필로 꽉 찬 유리병이 일곱 개나 늘어서 있다. (p.63)


 구글에서 찾아본 '오피넬 폴딩나이프'는 이렇게 생겼다. 넘버로 사이즈를 구분하는데, No.8의 모습이다.

Opinel No.8


 부끄럽게도 내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스쳐 지나갔지만, 사실 ‘취향’ 가운데 이 소설에서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꼼꼼한 묘사다. 일본의 계절을 가르는 새들의 울음소리, 여름 별장의 풍경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 벌레들, 텃밭에 기르는 꽃과 작물들,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한 차(茶)와 요리, 가구들에 대한 설명은 상세하고 치밀하게, 감각적 표현을 듬뿍 썼다.


 그냥 꽃, 그냥 나무, 그냥 벌레가 아니라 사물 하나 하나의 이름과 특징을 경험과 학습을 통해 명확하게 알고 그 지식을 실생활에서 이렇게 무리없이 꺼내 요리를 만들고 가구를 지어 쓰는 능력을 몸에 새기는 것은 분명 삶의 질을 좌우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소설의 배경인 1982년으로부터 한 세대를 건너 35년이나 지난 지금 책을 덮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이런 소박한 취향의 세계로부터 우리들은 너무 멀리, 그리고 빨리 떠나버린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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