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 상, 이만큼 많이 회자된 단어가 있을까? (또 사랑이야?). 시대 불문하고 압도적으로 인기를 끌어왔던 것은 '남녀상열지사'인 듯하다. 자극적이며, 감미롭고,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랑을 잘 설명할 수 없다.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던 기억이 까마득할뿐더러, 스토리가 고만고만한 클리셰 범벅이니 참신하게 설명할 자신도 없다.
그러니 각설하고,
사람들은 돈이 많거나, 돈을 잘 버는 사람을 ‘사랑한다’ 하고,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사랑한다’고 여긴다.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을 경애하며, 유머감각이 풍부한 사람을 동경하여 가까워지고 싶어 한다. 상대의 성적 매력에 그야말로 ‘미친 듯’ 끌리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사랑, 참 쉬워 보인다. 유통기한이 짧은 '금사빠'의 쉬운 사랑 말고. 조건 내건 사랑 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궁극적 단계의 ‘사랑’이란 것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탑티어’의 사랑이란 첫 번째, ‘무쓸모를 포용’하는 사랑이며, 두 번째,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이다. '너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무쓸모’까지 포용할 수 있으니, 한 번에 설명해도 무방할 것이다.
‘무쓸모’란 효용 가치를 다한 어떤 인간의 쓸모없는 상태를 속되게 말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자신조차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으니, 타인은 말해 무엇하랴.
인생의 주요한 도구들을 잃어가고 있음을 부쩍 의식하게 되는 요즘이다. 젊음이라는 밑천도 시한부일 테고, 총알도 점점 떨어져 가고 있다. 언젠가는 모든 보호구와 무기를 내려놓고 무방비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수입의 원천을 잃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흰머리도 쏙쏙 나고, 얼굴에 뭘 발라도 안 바른 만 못하고, 패가망신해 집도 절도 없는 상태를 가정한다면 어떨까. 마지막에 남은 것은 퉁퉁 붓고 만 거죽 껍데기, 암만 아름다워봤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혼일 것이다. 텅 빈 영혼이란 쉽게 흑화 하기 마련이다. 우울증은 스스로를 주도적으로 컨트롤하는 힘을 잃게 된 상태에서 가장 쉽게 찾아온다고 한다고 하니 말이다. 필시 영혼조차도 쉬익 쉬익 매연을 뿜어내고 있을 터.
이 모든 무쓸모를 포용하여 주는 타인이 있을까. 나를 대체할 수 없는 무엇으로 보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이 세상은 어찌어찌 살아갈만한 곳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 하나를 얻어가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자, 수확이 될 것이다.
그런 반면에, 내가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람의 무쓸모를 포용하는 경지까지는 아직 닿지 못했다. 사랑이란 쉽게 상해서, 지금 내가 품은 사랑이 영원할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겠다. 상하는 대신, 술 익듯 관계가 발효 되기를 바란다. 숙성된 감정의 변덕이 잦아들 것임을 믿을 뿐이다. 그래서 나 역시,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큰 수확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마는. 말했듯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