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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May 04. 2023

Q. 내가 버려야 할 것은?

A.  ‘눈치’의 아이러니

‘자신의 이마에 알파벳 E자를 써보자.’


이는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실험으로서, 이미 시도해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자신의 이마에 알파벳 대문자 E를 쓴다. 결과 유형은 아래 2가지로 나누어진다.


1) 자기가 보는 것과 동일하게 E를 쓰는 사람

2) 다른 사람이 볼 때 정상적인 E자로 보이게 좌우 반전된 E자로 쓰는 사람


실험의 목적은 사람과 마주한 상황에서 상대와 나의 관계를 의식하는 정도인 ‘자기의식 (self-consciousness)’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한다. 아래는 ‘자기의식’에 대한 설명이다.


1) 정방향의 E를 쓴 사람은 ‘사적 자기의식 (private self-consciousness)’이 높은 사람이라고 하며,

2) 좌우 반전된 E를 쓰는 사람은 ‘공적 자기의식 (public self-consciousness)’이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한편, 두 유형은 아래와 같이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다.


1) 사적 자기의식: 타인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생각, 가치관, 태도, 동기 등 내면의 자신에게 좀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2) 공적 자기의식: 자신의 용모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성향이 강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즉,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실험의 정확도가 높은지는 잘 모르겠다 (출처가 불분명하고, 구전으로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카더라’ 일 수도 있겠다). 다만 ‘자기의식’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나는 좌우 반전된 E자를 쓴다. 실제로 공적 자기의식이 높기도 하다. 공적 자기의식은 ‘그놈의 눈치’라는 고질병으로 발현된다. ‘눈치 본다’의 영어 표현 중 하나로서 ‘walk on eggshells’가 있다. 계란 껍데기 위를 걷는다니 상상만 해도 몸과 마음이 쭈그러드는 듯하다. 내가 꼭 그런 상태이다.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사람들의 자의식은 과잉된 상태이다. ‘자의식 과잉’은 ‘자아도취’나 ‘나르시시즘’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지켜본다면 그들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게 될까’라며 자신에 대한 타인의 생각과 느낌을 남들보다 더 자주, 더 심각하게 염려하는 것이다. 잘 보이고 싶기에 유독 자기를 비난한다는 건 대체 무슨 아이러니일까.


자기 비난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완벽주의라고 한다. 자신에 대한 기준을 높게 설정하고, 도달하지 못할 때 ‘실패’라고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원하는 기준에 수시로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 그때마다 자신을 가혹하게 비난하고 처벌한다. 실수나 실패, 예측할 수 없는 고통은 너무나 극심하다. 그러므로 더욱 완벽해지려고 애쓰는 악순환의 고리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완벽'이란 타인의 기준에 맞춘 것이다.


한편, 자기 비난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기여한 바가 적은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탓을 돌린다. 이것도 내 탓, 저것도 내 탓, 결국에 ‘모든 것이 내 탓’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모든 게 나에게 달려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벌어진 일에 대한 ‘자기 기여도’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타인들과 기타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내 자의식도 유별나게 과잉된 상태이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것도 저것도 나 때문인 것만 같다. 혼자라고 마음 편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 당연히) ‘바보짓’을 수시로 일삼지만, 건이면 건마다 호되게 스스로를 책망한다.


여느 날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나 자신이 불쌍해졌다. ‘여날’을 객관화하여, 완전한 타인으로 인식해 보았다. 그것도 주눅 든 7살의 아이로서. 100% 포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위협은 덜했다. 1인칭의 나와 2, 3인칭의 내가 멋쩍게 눈 맞추는 순간이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어서, 좀 더 좋은 방법은 없을지 연구하는 중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해왔다.


“여날 씨도, 나도,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죽을 수 있어요. 여날 씨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아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여날 씨는 어떤 오늘을 살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꼬리처럼 붙어 있는 이 지긋지긋한 눈치부터 버리고 싶다. 남이야 뭐라든 내 멋대로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제법인 면이 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의 가사처럼 오늘을 살고 싶다고 답한다.


이제 끝이 보이는군.

내 삶의 마지막 막이 내려가려 하네.

자신 있게 살아온 내 삶에 이야기하려고 해.

난 충만한 인생을 살았고,

걸을 수 있는 길은 다 걸어보았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만의 방식으로 해내어 왔다는 걸세.

난 사랑도 했고, 웃고, 울기도 했어.

충만감도, 상실감도 모두 다 겪었어.

이제와 눈물이 가라앉고 보니

재미있게 느껴진단 말이야.

내가 그런 일을 다 해냈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말할 수 있네.

나는 나의 방식대로 해내어 왔다고.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나 자신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지!

지난 세월 숱한 시련들을 마주해 왔지만,

나는 모든 것을 나 스스로의 방식대로 해왔다네.


** 참조 **

이지영 교수의 감정 코칭, 자기 비난의 늪에서 벗어나는 법 (아래 링크)

https://contents.premium.naver.com/subblack/knowledge/contents/230213150048997x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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