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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n Lee Dec 02. 2016

낭만적 퇴사와 그 후의 일상-처녀비행 그 후

2016년 12월 1일



매년 초 나는 한해의 무사안위를 기원하는 의식을 치르듯 사주를 본다. 솔직히 100퍼센트 믿지는 않는다. 사주를 따랐으면 나는 이미 첫번째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고(이 구절의 전제는 일찍 결혼하면 두 번 결혼할 것이라는 의미다.) 자유로운 영혼보다 입신양명을 위해 죽어라 달리는 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건, 사주보다 결국 중요한 건 조상님도 말릴 수 없는 우주의 기운을 가득담은 고집과 영혼의 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고집으로 말미암아 나는 지난 8월 말 퇴사를 했다. 그리고 9월에는 일생일대의 미뤄두었던 과제 한가지를 해결한 후 추석여행을 다녀왔고, 10월에는 정말이지 신나게 놀았다. 11월에는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고 퇴사 후 계획했던 것을 이루고자 했다. 쓰고 싶은 델 골라 돈도 열심히 쓰고 다녔다. 콘서트, 뮤지컬, 미술관, 조조영화. 독서, 글쓰기, 새벽까지 아이돌 영상보기(세븐틴 컴백 좀..) 등등 하고싶은 건 다 했다. 겨울이 다가올 수록 제철을 준비하는 귤마냥 나의 한량함은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1일자로, 계획하고자 했던 일이 틀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플랜B를 망각한 자의 최후였다. 30년 가까이 살면서 한가지에 집착하여 그것을 이루어 낸 역사는 한번도 없었다. 대학 입시때 '정시가지 뭐.' 하더니 결국 정시막판까지 기다려 입학하더니 하물며 취업때도, '떨어지면 이거저거 하지 뭐' 하니 취업되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경험한 나였다. 진인사대천명, 그리고 플랜B의 완벽한 하모니가 아니면 인생을 노래하기 힘들구나 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한가지만 집착하고 달리면 안되는 사람. 스스로 반쯤 내려놓고 알아서 흘러가게 놔두어야 계획대로 흘러가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가진것 보다 더 많은 마음을 쓰면 안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마음을 쓰는 대신 머리를 쓰고 몸을 써야 했다. 집착이 공연했다는 건 노력이 부족했다는 걸 뜻한다. 사실 집착만 했지 간절함이 부족했다. '안노력'은 '안간절함'이 이끄는 숙명이었다. 그 계획이 왜 필요한 지 합당한 답을 내리지 않은 채 집착만 했다. 혹은 내가 내린 합리화가 답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키보드로 좋은 허울을 만들고 가슴으론 액션플랜 같은걸 세우질 못했으니, 그게 노력으로 이어질리가 있나. 29.9세나 먹고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


'인생 긴데 길이 하나겠어.' 친구들도, 엄마도, 동생도 한결같이 내게 말했다. 이 말은 다름아닌 내가 그들보다 먼저 한 이야기다. 첫번째 계획에 대한 집착이 정점을 찍을 무렵, 어느 날 밤의 꿈자리가 너무나 사나웠고, 일어난 후 기분이 좋지 않아 떨쳐내려 보낸 카톡이었다. 그 사나웠던 꿈은 오늘의 예지몽이 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나는 나의 촉과, 꿨다 하면 데자뷰 혹은 예지몽일 확률이 높은 수면의 흔적을 약간 신뢰하기로 했다.) 게다가  위의 꿈을 꾸기 전, 오늘같은 일은 짐작하지 못했을 시기 책을 읽을때, 텔레비전 앞에서 깔깔 거릴 때, 친구를 만날때 마저도 자꾸 머리에서 맴도는 것이 있었으니. 잘 생각해봐. 진짜 맞아? 라는 의문이었다.  의심병이 도졌구나 싶어 무시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누군가 귀띔을 해준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를테면 조상님같은.


원치 않던 일은 벌어지고 말았고 불안감은 한층 두터워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지는 않다. 누구나 노력만큼의 보상을 얻게 되어있다. 내가 원했던 보상은 내가 쏟은 노력보다 더 한 노력을 요구 하는 것이었으리라. 하물며 운의 결실인 복권도 꾸준히 사는 사람이 당첨되는 사례가 많다는데. 지금보다 어릴 때 내가 한 노력은 언제나 최대치였고, 그에 맞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으면 난 무조건 불행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짜증만 났다.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잠만 잤다. 나의 세상은 나의 위주로 돌아가야 마땅했다.


그러나 세상이 전혀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아는 오늘 오후는, 몇시간 기분이 조금 나쁠 뿐이었다. 그 마저도 운동 두시간 하고 치킨 먹고 와인병을 비우며 예능을 보고 나니  흐릿한 난감함만 남았다. 만병통치킨, 와아아아아!!!인이 따로없다. 팔자 늘어진 게 아니라 의연해진 거 였으면 좋겠다. 조바심도 덜하다. 예전엔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공백없이 이를 대체할 다른 걸 찾아 부질없이 방황하곤 했다. (부질없다는 건 그렇게 발악 해서 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오늘은 배를 채우고 나니 이런 자기반성과 드립으로 점철된 글이 쓰고 싶어서 그렇게 하고 있다. 비워냄 없이 채우기만 하는 건 이제 지쳤다. 퇴사 후에도 나는 뭐가 그렇게 급해서 비워내질 못해 채우기에만 급급했는지.


예정대로 여행준비를 할 거고, 돌아와서는 정신없는 연말을 보낼 것이다. 20대의 마지막 연말임을 매 순간 되새겨야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계획을 설명하는 것도 자제할거다. 혼자 가는 여행을 설명할 때  어떤 걸 타고 어떤 길을 타고 얼마를 쓸 건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도착해서 무사히 도착했고 즐거운 여행중이라고 말하면 그걸로 될 거 같다. 행복을 부풀려 말하지도 않을거다. 비록 안개속이라 하더라도 분명 바른 길로 가고 있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행복이 꼭 비교의 대상일 필요는 없다. 대부분 잘 가고 있고, 대체로 잘 살고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한거 아닌가?


잠이 온다. 잠시 기분이 나빴던 오후에 했던 짐작은 틀렸다. 운동 하고서 약속까지 다녀왔으니 푹 잘 수 있을 거다. 자고 일어나면 엄마와 카톡을 해야지. 점심 때 쯤 차탈거야. 여행 가기 전에 세탁기 돌려놓고 가야해서. 저녁 맛있는 거 사줘. 아빠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29.9세 백수의 하루는 그럭저럭 대책없이 잘 흘러갈 거다. 언제나 그랬듯.







페북에서 일기를 전체공개로 이따금씩 올린적이 있는데 정돈된(....?) 문장의 형태로 브런치에서 해볼까 하여 올려봅니다.

왜냐면, 드디어 블루투스 키보드를 장만했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흐름이 강렬하겠지만 자주 쓰겠습니다. (브런치가 편해졌나봅니다.)

그 외에도 팩트같지만 지어낸 이야기도 쓸겁니다.

시간이 더 많아진 마당에 쓰고싶은건 다 써볼랍니다.(드러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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