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사심, 늘 죽음을 생각하는 마음
내가 처음 죽음을 목격한 것은 어린 시절, 아파트 단지 안에서였다.
단지 안의 놀이터 한 구석에서 남자 아이들이 모여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아이들 쪽으로 다가갔다가 참혹한 죽음의 현장을 보게 되었다. 회색 아스팔트 바닥에 들쥐 한 마리가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들쥐는 자동차 바퀴 같은 무거운 것에 깔린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보는 죽음 앞에서 나는 바짝 얼어붙었다. 남자 아이들 몇 명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채 소리 높여 깔깔거렸는데, 그들의 웃음 소리가 나를 더 무섭게 만들었다. 떼 묻지 않은 아이들의 잔혹성이 그야말로 순수한 악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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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레의 죽음도 무서워하던 아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살아있는 벌레보다 죽은 벌레가 더 무서웠다. 생명의 기운이 온전히 사라진 채 온몸이 뒤틀리고 뒤엉켜있는 모습은 나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벌레들의 죽음은 한 가닥 실처럼 가녀린 죽음들이었다. 하지만 들쥐의 죽음은 달랐다.
그 쥐를 어떻게든 땅에 묻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 해서 미안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과연 그 쥐를 누가 묻어주기나 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마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거라고, 그냥 쓰레기 봉투 같은 데에 버려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이 되니, 쥐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들쥐의 죽음은 나에게는 덩치가 큰 죽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두려움이 무색하게도 어느 누군가는 그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치워주었다. 세상에는 작고 큰 죽음들이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는 직접 죽음을 마주하기도 하고, 죽음을 편하게 보내주기도 한다. 죽음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 자전거 바퀴가 굴러가듯이 시간이 앞으로 흐르고, 어떤 방향으로라도 나아가는 것일 테다. 죽음은 그만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죽음들은 또 당연하지가 않다. 예기치 못한 사고와 질병으로 인한 준비되지 않은 죽음들이 있다. 사람도 그렇고, 들쥐도 그랬다.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바퀴에 깔려 죽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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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은 직접 여러 사자성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가 만든 사자성어 중 ‘상주사심‘이라는 것이 있다. ’늘 죽음을 생각하고 지금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그의 말은 이렇다.
“상주사심은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 이런 뜻이지. 늘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 살아 있는 목숨을 고맙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어.“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상주사심’하며 사는 것, 이 뿐일 것이다. 아무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으니 죽음 앞에 서있는 지금을 고마워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오늘도 벌레와 들쥐는 죽고, 사람도 죽는다. 보이지 않는 죽음을 늘 생각하다보면, 또다시 마주하게 되는 죽음 앞에서는 좀 더 초연하게 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