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쓰는가] 06.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한스 로슬링, 올라 로슬링, 안나 로슬링 뢴룬드의 <팩트풀니스>

by Keepbook


누군가와 오래 지내다보면 내가 알던 이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변함 없는 사람, 성실한 사람, 앞뒤가 같은 사람,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는 사람.


특히 누군가 자신의 오해를 쿨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배울 점도 많다고 여겨지고요. 이들은 자기를 기만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스스로를 수정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오해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이해를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인 거죠.


오늘은 오해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오해란, 다르게 이해하거나 잘못 파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오해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오해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오해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오해가 필연적이라니, 무슨 뜻일까요?


하이데거의 제자인 한스게오르트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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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해는 선이해에 의해 이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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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선이해란, 선입견입니다. 가다머에 따르면, 모든 이해는 선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선입견은 부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입견이 필요하다고 그는 본 것이죠.


그에 따르면 선입견이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사고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선입견을 벗어날 수가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선입견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미 가지고 있는 해석의 틀이 곧 선입견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가 말한 선입견에 오해를 덧붙여서 설명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가치관에 기반하여 세상을 봅니다. 이미 어느 정도의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오해가 우리의 선입견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해석의 틀처럼 작동합니다.


즉, 오해는 오류가 아닙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이전 단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오해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를 인지하고 수정하려는 태도가 뒷받침 되어야 하죠.


우리가 흔히 오해하게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먼저 역사에 대한 오해입니다. 과거는 절대 '객관적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죠. E.H.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현재가 과거에 영향을 주고, 그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도 오해는 만연합니다.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죠. 동물을 우리의 기준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동물의 감정 및 언어를 과소평가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요.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다른 사람을 '얼굴'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은 내가 결코 소유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얼굴은 해석되어야 하는 - 즉, 존재론적으로 살해되어야 하는 -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응답하고 책임져야 하는 존재라고 는 얘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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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ce of the other in its nakedness is an absolute appeal.

The first word of the face is ‘Thou shalt not kill.’


(타자의 벌거벗은 얼굴은 절대적인 호소이다.

얼굴의 첫 번째 말은 '너는 살해하지 말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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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나의 시각으로 바꾸는 것 뿐이죠. 오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오해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오해에 의해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과 실제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관련해서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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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understand the actual world as it is, not as we should wish it to be, is the beginning of wisdom.


(실제 세계를 그대로 이해하는 것,

즉 우리가 바라는대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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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위 문장은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과 실제 세상은 다르다는 것, 즉 오해를 전제로 합니다. 러셀이 말한 '지혜'란, 오해를 인정하고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용기라고 볼 수 있겠죠.


즉, 우리는 늘 무엇에 대해 오해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오해를 줄이고 그 너머인 진실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이 시점에서 한스 로슬링, 올라 로슬링, 안나 로슬링 뢴룬드의 <팩트풀니스>라는 책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본능에 대하여' 인데요.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책은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게 되는 이유를 10가지의 본능으로 정리 및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본능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죠.


책의 머리말에서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테스트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직접 체크해볼 수 있어요. 저는 이 테스트를 학생들에게 해보도록 했는데요. 두 세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극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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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해 생각하라. 전쟁, 폭력, 자연재해, 인재, 부패⋯⋯. 상황은 안 좋고,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는 것만 같다. 안 그런가?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며, 빈곤층은 더욱 늘어난다. (..) 나는 그것을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그런 세계관은 스트레스와 오해를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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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해하지 않고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팩트풀니스(factculness)'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팩트, 즉 사실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책에 제시된 사실 기반의 데이터를 한 번 들여다볼까요. 5세 미만 나이로 죽는 아동의 비율은 1800년대 44%였던 수치가 현재 4%로 감소되었습니다. 영양부족을 겪는 인구는 1970년대 28%였으나 현재는 11%로 감소되었죠. 평균 기대 수명은 1800년대 31세였던 것이 현재 72세로 높아졌습니다. 수많은 데이터가 책의 근거 자료로 쓰입니다. 이렇게 명확한 데이터가 많은 데도 우리는 왜 세상을 오해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본능 때문이라는 것이 책의 주장이지요. 10가지의 본능이 설명되는데, 일반화 본능, 간극 본능, 비난 본능, 공포 본능, 크기 본능 등입니다. 한 예로 크기 본능에 대해서 설명해볼게요. 2016년에 420만 명의 아기가 죽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420만 명이라니, 어마어마한 수치이죠. 흔히 사람들은 이렇게 큰 숫자 앞에서 압도 당하고는 합니다. 너무 끔찍한 일이고, 심지어 대부분은 쉽게 예방할 수 있는 질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슬퍼지게 되죠. 이렇게 큰 숫자에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되는 것이 크기 본능입니다. 이 본능을 이겨내려면 팩트풀니스를 실천해야 하는데요. 바로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2016년에 죽은 아기들의 수는 420만 명입니다. 그런데 그 전해에는 440만 명이었고, 그 전해에는 450만 명이었습니다. 1950년에는 어땠을까요? 1440만 명이었습니다. 2016년에 비해 1000만 명이 더 죽은 것이죠. 이렇게 비교를 하면 끔찍해 보였던 숫자가 갑자기 적어 보입니다. 우리의 오해를 인지하고, 이해에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팩트를 기반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면 우리는 어느 정도의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세상과 진짜 세상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줄이게 될 수 있는 것이죠. <팩트풀니스> 책은 세상을 좀 더 제대로 보게 돕고, 또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게도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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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생각만큼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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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없이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본능에 따라 사고하고, 필연적으로 오해하는 존재이니까요.


어쨌든 저는 오늘도 오해를 하고, 내일도 또 오해를 하겠지요. 그러나 때로는 제가 좋아하는 어느 사람들처럼 저 또한 저의 오해를 쿨하게 인정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오해를 바탕으로 사람과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애쓰고 싶고요.


그렇게 애쓰다 보면 그 끝에는 내가 지금은 알지 못하는 어떤 진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딘가에 있을 그 진리가 저를 잡아당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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