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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괜찮아

사람마다의 속도가 있다

by 보나


내가 운동에 익숙해지는데 걸리는 속도 : 6개월

내 딸이 새로운 학원에 적응하는데 걸리는 속도 : 2개월


육아휴직을 하고 지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아이들 등교 후 혼자서 길을 걸어갈 때나, 아이 픽업을 하러 갈 때나, 장을 보러 갈 때 등. 걸어 다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지는데 '나도 걸을 때 참 느리게 걷는구나' 하며 아이를 생각하게 된다.




나의 첫째 아이는 느리다. 기질적으로 섬세하지만 행동은 여유 있게 하는 편이다. 무언가를 배우는 속도도 느리고, 학원을 보내면 적응하는 시간도 남들보다 꽤 걸린다. 겉보기에는 금방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충분히 적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남들의 두 배이다. 요즘에는 아침마다 느린 딸아이와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화를 내며 학교를 보내는 엔딩의 드라마를 쓰고 있다. 학교는 가는 주 5일 중 3일을 화를 내며 엄마도 아이도 기분 좋지 않은 표정으로 아침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


목요일부터는 화를 내지 않기로 다짐하고, 전 날 저녁 첫째에게 말했다.


"첫째야 우리 내일 아침에는 화내지 않고 기분 좋게 학교에 가는 거야. 노력해 보자. 알겠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이 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다짐을 했다. 오늘은 쉽사리 화를 내지 않으리라.


일단 깨울 때부터 일어날 기미가 전혀 안 보이는 아이에게 뽀뽀를 해주고, 다리 마사지를 해 주며 잠을 깨웠다. 평소와 다르게 벌떡 일어나서 세수를 하러 갔다면 해피엔딩 이겠지만 사람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역시나 일어나지 않는 아이에게 ‘참을 인’ 자를 새기며 말했다.


"우리 오늘은 기분 좋게 일어나 보자. 엄마가 나가서 기다릴게. 스스로 일어나서 나와줘~."


학교 갈 시간이 촉박하지만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는 방에서 나가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며 아이가 나오길 기다렸다.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지만 밥은 제대로 먹지 못하더라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조금 기다리니 스르륵 일어나 나오는 첫째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첫째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우와, 우리 딸 잘 잤어? 스스로 일어나서 나왔네? 가서 세수하고 오세요."


여기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아이는 세수를 한 후 옷을 평소처럼 느릿느릿 입었지만 그냥 두었다. 그녀의 속도가 있으니 내가 채근한다고 해서 갑자기 빨라질 리는 없지 않은가. 밥 먹을 시간은 평소보다 10분이 늦어졌지만 첫째는 식탁에 앉아 열심히 밥을 먹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밥을 먹어서 다 먹지는 못했지만 꽤 많은 양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에서 학교로 출발하는 시간도 평소보다 5분 늦게 나갔다. 그렇지만 늦는 시간은 아니었고 적당한 시간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웬일인지 마음에 여유가 느껴졌다. 첫째와 둘째의 손을 잡고 학교로 향하는 길. "오늘 날씨가 정말 시원하네. 오늘은 비 안 오겠지?" 하며 여유롭게 대화도 나누고 둘째 어린이집의 원어민 영어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등원했다. 평소에 동생을 지적하기 바빴던 첫째는 동생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엄마가 둘째 영어 선생님을 길에서 만났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시더라."


"우리 영어 선생님은 수업할 때는 선글라스 안 쓰시는데?"


"엄마, 동생 영어 선생님 이름이 뭐야? 누구신데?"


이렇게 여유롭게 아이들과 대화하고 웃으며 등교하는 길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분명 육아휴직 하고 초반에는 하하 호호 웃으며 등교했던 기억이 더 많았던 거 같은데 벌써 매너리즘에 빠진 건가 싶었다.


이럴 때는 사람 사이에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적당한 거리가 중요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어릴 때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모든 걸 통제하고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해야 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아이를 기다려 줄 수 있는 마음과 내 뜻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충돌하지만, 많은 엄마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모두 엄마가 처음이니까 말이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그렇다.


다만,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한 날이라면 한번 더 자신과 아이를 돌아보고 마음을 살피자.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물론 인내심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필요하다. 인내심을 발휘하려면 나 자신의 마음을 조금은 비우고 아이를 위해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남겨두어야 할 거다.




어제 운동을 하는데 운동 선생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오, 이제 진짜 꽤 많이 늘었어요. 처음에는 밴드 끼고 다리 운동할 때 처음부터 다리가 달달달 떨리더니, 지금은 잘 안 떨리네요."


"한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어느 정도 하시네요. 어떤 사람은 3개월이면 하고 어떤 분은 6개월, 어떤 분은 1년도 걸리더라고요."


내가 순환운동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되었는데 그동안 주 3회씩 꾸준히 다녔다. 큰 성장을 바라며 다닌 건 아니고, 체력이 너무 부족함을 느끼셔 체지방 약간 감량하고 근육량은 평균만 올려보자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운동을 할 때는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기계가 나를 이끄는 대로,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그대로 했다. 저 방법은 나에게 안 맞는 것 같아, 왜 이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안 하고 싶지?라는 생각이 몇 번 들기는 했지만 그냥 거부하지 않고 하라는 대로 했다. 역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하는 게 답인 걸까. 운동은 더더욱 거짓말을 안 한다. 내가 한 만큼을 내 몸에 돌려준다.



사람은 사람마다의 속도가 있다.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일반적인 속도에 본인을 맞춰야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지, 그래도 기본은 해야지, 중간은 가야지 하며 본인을 끊임없이 평균에 넣으려 노력한다. 그러면서 원래 뾰족뾰족 개성 있던 본인의 모습을 둥글게 깎아서 원래의 형체를 알 수 없는 모양으로 만든다.


사실 그런 둥근 모양으로 사는 게 평범한 삶이고 행복할 지도 모른다. 남들과 비슷하게 살면서 튀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며 필요할 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평범한 삶. 그런데 둥글게 살면서 행복하면 괜찮은데 예전의 뾰족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으면 어땠을까, 내 개성대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는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육아의 최종 목표는 아이를 건강하게 독립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에 적응하기 좋은 둥글둥글한 아이로 깎아서 세상에 내보내야 할지, 개성을 그대로 살려서 본인이 부딪히며 겪도록 해야 할지, 두 가지 점을 모두 키워서 세상에 내보내야 할지.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다만, 아이가 원하는 방향이 뭔지 관찰하고 지지를 해 주는 것. 그게 답인 걸까?


지금도 내 아이가 무얼 가장 좋아하는지 모르겠는 엄마가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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