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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Aug 08. 2024

싯다르타

책 읽기 프로젝트 S2 #3

이 책을 읽고 받은 마음의 울림을 조금이라도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얕은 감상이라도, 부족하더라도 지금 이 느낌을 적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헤르만 헤세는 친구 로맹 롤랑에게 보내는 헌사에서 <싯다르타 Siddhartha>를 "인도에 관한 한 편의 시"라고 표현했다. 이 책은 주인공 싯다르타가 집을 떠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아주 시적으로, 그리고 신비롭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부처, 고타마 싯다르타가 가르침을 전하던 그 시절, 비슷한 고민을 하던 소년의 일생을 통해 부처와는 다른 방식으로 깨달음에 다다르는 이야기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부처는 인생은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소년 싯다르타는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욕망(desire)에서 그 고통을 느꼈다. 지식에 대한 갈증, 자아를 찾고 싶은 갈망. 그것은 부모나 친구에게 받는 사랑으로도, 누군가에게 받는 가르침으로도, 명상이나 금식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집을 떠나 순례자들과 금식하고 명상하고 생각하는 법을 더 수련해도 욕망은 더 강해졌다. 그는 배움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깨달음은, 자아를 찾는 것은 말이나 가르침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깨달음의 순간을 직접 겪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너무 강렬해서 그것에만 시선을 고정한 나머지 다른 것들을 보지 못했다. 계속 자신 속의 자신을 찾고 있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이었다. 보이는 것 뒤에 숨은 본질을 찾으려 하는 게 아니라, 그 보이는 것 자체가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주변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When someone is searching," said Siddhartha, "then it might easily happen that the only thing his eyes still see is that what he searches for, that he is unable to find anything, to let anything enter his mind, because he always thinks of nothing but the object of his search, because he has a goal, because he is obsessed by the goal. Searching means: having a goal. But finding means: being free, being open, having no goal. p.112
“누군가 무언가를 구할 때 그 사람의 눈에는 여전히 그가 찾는 것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깨달을 수가 없고,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찾는 대상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표가 있고, 목표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목표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목표가 없습니다. -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최유경 역


싯다르타는 속세로 들어간다. 큰 도시에서 아름다운 카말라에게 사랑을 배우고, 상인 카마스마비를 만나 장사와 호화로운 생활을 배운다. 어린아이처럼 사는 사람들 틈에서 오랜 시간 그들처럼 살아간다. 술과 폭식, 게으름, 도박…. 이런 것들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며 어느새 명상도, 기다림도, 금식도 먼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어느새 자신의 삶을 경멸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를 내려놓으려 했을 때 다시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듣는다.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삶을 살아가기로 한다. 속세에서 가졌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가진 것 없는 강가의 뱃사공으로 살아간다. 바수데바, 그리고 강에서 또 새로운 것을 배운다. 삶은 일체라는 것, 시간이란 오로지 현재만 존재한다는 것.


In this hour, Siddhartha stopped fighting his fate, stopped suffering. On his face flourished the cheerfulness of a knowledge, which is no longer opposed by any will, which knows perfection which is an agreement with the flow of events with the current of life, full of sympathy for the pain of others, full of sympathy for the pleasure of others, devoted to the flow, belonging to the oneness. p.110
이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의 싸움을 멈추었고, 고통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은 깨달음의 즐거움으로 빛났다. 더 이상 어떤 의지로도 반대할 수 없는 그 앎은, 완전함을 이해하고, 사건들의 흐름과 일치하고, 삶의 여정에 동의하고, 다른 사람들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하며, 단일성으로의 흐름에 동참하는 깨달음이었다 -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최유경 역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라는 뜻을 가졌다. 이 이름을 정한 데는 아마도 부처와 비슷한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결국은 아주 다른 길을 걷게 된 주인공도 결국에는 깨달음을 얻어, 여기에 다다르는 길은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모든 이가 종교인, 혹은 철학자가 아닌데,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꼭 깨달음을 얻는 것이어야 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하루하루 명상하고 기도하고 공부하며 살아갈 여유가 없는 현대인들이 더 많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고타마, 싯다르타, 그리고 바수데바는 꼭 어떤 특정 방식으로 살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다 그것을 깨닫는다.


Knowledge can be conveyed, but not wisdom. It can be found, it can be lived, it is possible to be carried by it, miracles can be performed with it, but i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and taught. p.114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네. 지혜를 발견하고 지혜롭게 살며 지혜를 품고 다닐 수는 있지만, 그 지혜를 말로 표현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다네.  -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최유경 역


싯다르타가 여러 번 이야기하듯, 지식은 배울 수 있지만 깨달음과 지혜는 가르침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글은 언제나 그 의미가 왜곡되고, 현자가 전달하려는 지혜는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이 책을 읽었다고, 어떤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해탈하고 깨달음을 얻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언젠가 지혜를 발견하고 지혜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인생의 순간순간에 이 책을 다시 꺼내어 읽었을 때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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