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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경원illust Aug 10. 2022

잘 가요, 나의 영웅

작업 이야기

나는 오늘. 정말 즐거웠다.

11년 만에 오랜 친구를 만나 꾸밈없이. 숨겨 가리는 말 없이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그림을 그리고 작업을 하고 빨리 무언가 내 작품을 생산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작업자의 뿌듯한 마음으로 1시간 후 퇴근하는 길에...

영국친구들로부터 갑자기 메시지가 띠링띠링 울리는데..

열어보니...

나의 영웅이 세상을 떠났다는 공식 기사가 1시간 전에 나온 것.


꼬꼬마였던 나는 그의 책을 보고 그림책의 세상을 꿈꿨고. 그림책 속에 나오는 지구 반대편의 영국이라는 나라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십 대 시절 나는 꼭 영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그림을 공부하고 싶었다. (한국의 모든 영어 교육이 미국 영어 기준인데 혼자서 영국식이 진짜 영어라며 영국 영어 공부하는 십대..)

이십대가 되어 짐 가방 두 개 싸들고 혈혈단신으로 지구 반대편 영국에 공부하러 가서 나는 그의 작품으로 학사 논문을 썼고. 그의 세계가 나라는 디자인 전공 학생이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책 작가로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말하고 싶은지 그 중심을 만들어주었다.

석사 시절 나는 드디어. 정말로 운 좋게도. 꿈도 꿔본 적 없는데. 나의 영웅인 그를 직접 만났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그는 투덜거리고 불평하는 유머를 지닌 조용한 영국 할아버지인데 굉장히 예외적으로 나에겐 굉장히 나이스하고 주변인들을 소개해주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를 소개해준 나의 지도교수님이 그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이 친절하지 않아도 너무 상처받지 마. 원래 그러니깐'이라고 했는데 상처는커녕 모두가 놀랄 만큼 친절하고 상냥했다. (실제로 그는 학생들에게 굉장히 불친절하고 귀찮아해서 상처를 받는다)

그 뒤로 나는 그와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고. 그는 나를 좋아해 주었다. 학생인 내가 작가가 되길 응원해주었고 나의 그림책 이야기에 웃어주었다.

그는 가끔 나에게 편지를 보내주었다. 그의 사인이 담긴 편지를 받으면 난 정말 정말 기뻤고 지도교수님께 자랑을 했는데.  교수님은 빙긋 웃으면서 '그거 잘 보관해둬. 언젠가 그게 정말 비싸질 날이 올 거야'라고 했다.


몇 년 전(이라고 해도 어느새 또 십 년 전인 거 같다) 삼십 대의 나는 내가 작업한 수많은 그림 중에 그가 좋아할 거 같은 그림 하나를 들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약속을 하고 간 게 아니어서 그는 집에 없었고 그를 만나지 못했다. 집 앞에 그림을 놓고 왔는데. 주소도 적어두지 않은 나에게 그는 어떻게 찾았는지 그의 그림으로 만든 카드에는 내 이름을 꾹꾹 예쁘게 눌러써서 보내준 그림 고맙다고 적혀있었다.


사십 대가 된 나는 언젠가 다시 그를 찾아가 내 그림책을 보여주고 그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살아가며 내 그림책 속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를. 그리고 도대체 그림책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이런 어려운걸 당신은 어떻게 평생 꾸준히 매일같이 했는지 불평 섞인 농담을 주고받기를.  오후 3시 티타임을 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작가로 오랜만에 만족스러움이 가득한 오늘 나는 나의 영웅의 새 작업을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늘 상실. 사라짐. 죽음 등이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있는 것임을 이야기했는데. 그리고 그 가치관에 깊게 동의하는 나에게 있어 그의 떠남은.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못하고 슬픔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의 그의 작품으로 그림책 작가가 된 내가 있다고. 그에게 그래도 말할 수 있었음이. 그가 그 말을 듣고 빙긋 웃었음이... what a crazy girl이라고 말해준 것이.

그 생생한 순간이. 나를 지금껏 붙들고 있다.

그 순간이 지금도 소중하다. 나라는 작가가 나를 잊지 않도록 끌고 간다.


잘 가요 나의 영웅.


천국에서도 투덜투덜 불평하는 유머로 여기저기 관찰하고 성실하게 사각사각한 색연필로 그림책을 만들어 가겠죠!


그래도...지금까지도 아침에 눈을 뜨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을 나의 영웅을 생각하며 성실히 오늘을 작가로의 나를 잊지 말고 살아가야지.라고 마음먹던 나는... 이제 더이상 당신의 책상 스탠드가 켜지지 않는 것을 잠시 슬퍼할게요.


그리고 당신처럼 상실과 이별을 견뎌 그 마음을 녹여내어 작업으로 이야기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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