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44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44
― 'AI'와 그리고 나도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 ―
요즘은 오래 전, 내가 사십대 때 썼던 글들을 다시 꺼내 다듬어 올리고 있다.
이번에는 'ChatGPT' 도움도 좀 받아본다.
그때 내가 쓴 글들을 들춰보면 솔직히 거칠고, 같은 얘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런데 ChatGPT가 그것들을 매끄럽게 고쳐 내보낸다.
문제는, 읽어보면 너무 매끈하긴 한데 내가 원래 의도한 내용이 잘 안 보이고, 그런 내용들이 뭉뚱 잘려 나가 버린 경우가 많다는 거다.
결국 다시 고쳐 쓰다 보니 새로운 글쓰기에 가까워졌고 시간도 더 들었다.
그래도 신기하긴 했다.
이 긴 글을 단 1초도 안 돼서 술술 내뱉으니, 세상 좋아졌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앞으로 ChatGPT만 잘 다루고, 잘 활용하면 훌륭한 문학작품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결국 문제는 질문이었다.
내가 던지는 질문 바탕이 좋아야, ChatGPT도 좋은 글을 토해낸다.
물론 ChatGPT도 완벽하지 않다. 아직은 조금씩 틀리고 부족하다. 중요한 건 그 부족한 구멍을 내가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지고 또 질문들을 이어가다 보면, 제법 괜찮은 결과물이 나온다.
이런 걸 보면 ChatGPT 같은 AI를 누구나 똑같이 잘 활용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에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스필버그'가 2001년에 만든〈AI〉라는 영화이다.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AI가 입양 되었다 버려지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 였다. 감동적으로 봤던 기억이 있다.
그 영화 속에서 세상의 모든 궁금증을 AI 컴퓨터에게 묻고 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의 ChatGPT와 똑 같다.
영화가 나오고 나서 20년 조금 넘어서 현실이 되었다.
소설이나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상상력, 참 대단하다. 세월이 지나고 보면, 소설, 영화 속에서 그려낸 미래가 거의 다 현실로 나타나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20여 년 전 내 사십대 때, 나도 제법 감수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제 올린 글에 이어, 이번엔 내 ‘四春期’였던 사십대 글 2탄을 다시 다듬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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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 ㅡ
“사람 속을 알 수가 없다.
대체 몇 개의 얼굴로 사람을 만나는 것일까?”
내가 가입한 어느 카페에 익명으로 달린 글이다.
‘가면’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뉘앙스만큼은 결코 밝지 않았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이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무척 중요한 화두가 된다.
특히 사이버 공간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실이라면 평생 스치지 못할 사람들이 짧은 글 몇 줄로 갑자기 가까워지기도 한다.
글은 한 사람을 전부 드러내진 않지만, 어느 정도 자신을 꾸밀 수 있는 거울이다. 글에는 성격과 생각, 가치관이 묻어나오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어쩌면 굳이 다 알 필요도 없는 것인지 모른다.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나 가족,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도 한순간 낯선 얼굴을 발견해 섬뜩했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순간을 여러 번 마주했다.
심지어 남이 아닌 내 안에서조차.
알지 못했던 나를 들켜버린 듯 오싹했던 기억들...
사람의 속은 그만큼 깊고, 오묘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말자.
괜히 파헤치려 들다간 상처만 남는다.
부부사이에도, 가족사이에도, 친구사이에도 각자의 세계를 인정해 주자.
그것이 사회적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말이다.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여유가 필요하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끔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라면서 수없이 많은 “하지 마라”를 들으며 컸다.
그리고 유교적 체면 문화는 우리 뼛속까지 새겨져 있다. 그래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 어쩌면 습관처럼 우리 안에 스며든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존경받던 인물이 단 한 번의 일탈로 무너지는 장면을
우리는 너무도 자주 목격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무섭도록 쉽게 손가락질한다. 그리고 스스로 위안을 삼듯 다짐한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 속에서도,
사회적 권위를 누리며 젊잖을 빼던 이들이 가면 뒤에서는 집단 성행위를 하며 쾌락을 즐기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모습이 드러난다.
어쩌면 인간의 이중성은 본능을 억누르며 살아야 하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익명 뒤에 숨어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쉽게 드러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것이 때로는 군중의 집단적 광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역사는 이를 이미 여러 번 증명해왔다.
그렇기에 나는 생각한다.
가끔은 ‘다른 나’가 되고 싶다는 충동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는 것을...
사회가 법적으로 금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럴 때마다 억누르는 것이 꼭 옳지만은 않다.
잠시의 일탈은 오히려 삶을 지탱해 주기도 한다.
물론 그 속에 함몰된다면 위험 하지만, 마흔이 넘은 나이라면 그 경계쯤은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도 종종 상상한다.
내가 아닌 다른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는 모습을...
그것은 속이거나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나를 옥죄는 수많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가끔은 '변진섭' 노래 '새들처럼'을 흥얼거린다.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면,
나도 따라 날아가고 싶어.
파란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나도 그렇게 날고 싶어."
정말, 노래가사처럼
<나도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ㅡ 초롱박철홍 ㅡ